ⓒ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9일 서울성모병원을 찾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무엇보다 전 국민이 건강보험에 의무 가입하도록 설계한 덕분에 비교적 낮은 의료비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을 도입하려는 동남아 국가 다수가 한국을 모델로 삼는다. 건강보험을 전체 미국인에게 적용하는 정책(오바마 케어)을 추진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역시 재임 기간에 한국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높이 평가했다. 지난 7월2일 문재인 대통령은 전 국민 의료보험 도입 30주년을 맞아 “국민건강보험은 경제발전과 민주화와 함께 우리 국민이 함께 만든 또 하나의 신화”라고 말했다.

국민 모두가 ‘의료보험’에 의무 가입하게 된 시기는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이다. 다만 당시 시민들은 직장이나 지역별로 나뉘어 각각의 의료보험조합에 가입되었다. 이에 따라 어떤 조합은 재정이 넉넉해서 가입자에게 후한 혜택을 줄 수 있는 반면 가난한 조합들은 제대로 된 보험금을 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조합에 따라 납부 보험료도 달랐다.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 등이 건강보험 통합론을 꾸준히 제기했으나 계층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처럼 분리되어 있었던 의료보험조합들을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체계로 ‘일원화’한 사람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는 건강보험의 통합을 “가장 의미 있는 개혁 정책 중 하나”로 꼽았다. 시민사회에서도 김 전 대통령의 복지관이 드러나는 대표적 치적으로 건강보험 통합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용익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지난 30년 동안 각기 다른 위치에서 국민건강보험 체계를 개선하는 운동에 매진해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10년간은 보건단체 운동가로 활동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통합 건강보험 제도를 설계하는 실무자로 일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사회수석으로 임명되어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정책을 내놓았다. 그가 설계했다고 알려진 ‘문재인 케어’ 역시 김대중 정부 시절 건강보험 통합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 8월1일 김용익 이사장을 만나 건강보험 통합과 김대중 정부 복지 정책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건강보험 통합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쟁점이 된 계기는?

1980년대 후반부터다. 노태우 정부가 지역조합을 도입해 (직장조합 구성이 어려운) 농민·자영업자들에게 보험료를 징수하려 했다. 반발이 굉장히 거셌다. 징수율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납입 거부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직장가입자들은 사용자가 보험료 절반을 내주는데 농민·자영업자는 전액을 본인이 내야 했다. 때마침 이 시기 의료운동 단체들과 병원노조(현 보건의료산업노조)가 하나씩 생겨나 농민운동과 결합했다. ‘의료보험을 (직장별·지역별로)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는 통합론 측의 문제 제기가 확산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듬해, 한국 사회의 에너지가 충만하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서 호응이 더 크기도 했다.
 

현행 통합 건강보험의 강점은 ‘위험 분산과 소득재분배 효과’다. 김대중 정부 이전의 전두환·노태우 정부가 ‘조합론’에 기울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조합론’을 지지하는 중요한 논지 중 하나는, 조합을 중심으로 한 의료보험 방식이 세계적 차원에서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이 그런 구조다. (직장별·지역별로) 보험조합이 여럿인 의료보험제도는 일종의 서구적 전통에 가깝다. 영국과 스웨덴은 국영의료제도를 운영하기에 보험 체계를 단일화했지만, 사회보험 방식으로 의료보험을 운영하는 다른 나라들은 대체로 조합주의를 선택했다. 또한 ‘자기조합론’이라는 논지도 있다. (의료보험 재정에 맞춰) 알뜰 살림을 하려면 ‘나의 조합’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근거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건강보험을 통합하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는 소득 파악이었다. 직장가입자는 월급에서 보험료를 떼기에 소득 파악이 잘 된다. (지역가입자인) 자영업자들은 지금도 소득 파악이 불충분하지만, 당시에도 누가 얼마를 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를 묶으면 (보험료를 소득 파악이 가능한 직장가입자에겐 많이 받고 지역가입자에겐 적게 받는)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시사IN 조남진
김용익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김 이사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통합 건강보험 제도를 설계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청와대 사회수석으로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정책을 내놓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제13대 대선 후보 때부터 건강보험 통합을 공약으로 걸었다.

그렇다. 그 당(평화민주당과 후신이 된 민주당 계열 정당들)은 시종일관 건강보험의 통합 일원화를 지지했다. 공약으로 내거는 정책 모두가 곧장 당론이 되거나 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통합 일원화 문제는 워낙 역사가 있는 운동이고 (시민사회에서) 굉장히 열심히 했던 운동이다. 말하자면 깊이 있는 당론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충분히 이해와 합의가 되어 있는 당론이었기에 당내에 별 이견이 없을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건강보험 제도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논의되던 중, 본인이 공부하고 (어느 쪽이 타당한지) 생각을 하신 거라고 본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보건복지부 의료보험통합추진기획단 제1분과장을 맡았다. 어떤 일을 했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보건복지부에서는 건강보험 통합 추진을 준비했다. 그런데 내부에선 이전 정부들의 사례로 봐서, 김 전 대통령 역시 시간이 지나면 조합 유지로 선회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공약대로 건강보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정책기획단을 구성했다. 보건의료운동가, 학자, 통합론을 주장하던 전직 공무원 등 출신이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다. 나는 제1분과장으로서 제도 설계를 맡았다. 있던 조합을 합치고 ‘의료보험’이라는 이름을 ‘국민건강보험’이라고 고치는 등 기술적 문제들은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문제는 조합 직원들이었다. 전국 400여 개에 달하는 조합이 하나가 되면 조합장 400명과 직원들을 감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저항이 심하지 않았나?

그게 (당시 건강보험 통합 과정의) 특별한 점 중 하나였다. 건강보험을 통합 일원화하면 사람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합 직원들은 통합운동에 참여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분위기가 ‘(우리는) 진보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희생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물론 지역조합의 조합장들은 굉장히 반대했다. 당시 조합장 가운데에는 군 출신이 많았다. 직장조합의 조합원들 역시 (통합에 따라 손해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반대했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사회수석으로 일했다. 김대중 정부 보건·복지 정책을 어떻게 평가했나? 방향을 수정한 정책은?

노무현 정부는 기본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이었다. 건강보험 통합 일원화는 노무현 정부에서 충실히 계승했다. 여기에 사회수석으로서 내 손으로 한 게 건강보험의 암 보장성 확대다. 혜택을 전체적으로 올리기 어렵다면 고액 진료비를 유발하는 암 치료에 대한 보장성부터 높이자는 생각이었다. 노무현 정부 말, 건강보험 보장률은 65%로 역대 최고였다. 다만 암 보장성 확대 이후에는 전면적 급여 확대를 단행해야 한다고 봤다. 사실상 이런 내용의 문재인 케어 공약은 2012년 대선 기간 당시에 만들었다. 만약 보장성 확대가 모든 항목의 급여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풍선 효과’로 비급여 항목이 늘어나고, 보장성은 낮아질 것이라고 봤다(의료 서비스 중 어떤 항목은 보험을 적용받고 다른 항목은 적용받지 않는다면, 의료기관 측에서 수익성 높은 비보장 항목의 의료 서비스를 환자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4대 중증질환 보장성을 강화하겠다고 한 박근혜 정부 때는 이런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의 건강보험 통합은 문재인 케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나?

그렇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의료보험에 대한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자, 시민사회는 연대조직을 만들었다. 이름이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와 보험적용 확대를 위한 연대회의’였다. ‘통합 일원화’되지 않으면 급여 ‘확대’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시골 농민들끼리 모인 조합은 급여 확대를 조금만 해도 재정에서 적자가 나버린다. 부자들이 모인 조합은 적립금이 쌓여 있는데도 급여를 확대할 수 없다. 조합마다 보험료는 다르게 매길 수 있지만, 혜택은 동일하게 제공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급여 확대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통합 이외엔 길이 없었다. 독일 같은 국가는 조합주의를 선택하더라도 지역별로 소득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아 큰 탈이 없었지만 한국 상황은 다르다.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는 것은 공공에 이롭나? 과잉 진료 우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보장성을 높이면) 진료량 자체는 늘어난다. 그런데 진료량 증가의 성격은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비용 때문에 충족되지 못했던 필요가 충족되는 것일 수 있다. 진료량이 늘었다고 하더라도 이건 좋은 경우다. 문제는 불필요하게 늘어나는 진료인데,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계량하는 게 쉽지는 않다. 과잉 진료가 일어나는 여러 의료공급체계가 개편되어야 하는데, 이 작업이 지체되고 있다. 1차·2차·3차 의료기관의 전달 기능 정비, 수도권과 비수도권 의료기관의 질적 평준화, 중소 병원의 병상 공급 과잉 등이 그것이다. 문재인 케어의 핵심은 재정을 늘리고 급여를 확대하는 것이다. 확대된 재정을 통해 의료 공급자들이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내야 한다.

올해는 의료보험 전 국민 확대 30주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이다. 한국 복지제도의 역사에서 김대중 정부의 공과를 평가하면?

한국 사회보장제도를 4대 사회보험(국민연금·고용보험·산재보험·건강보험)과 공공부조(기초생활보장제도) 체계라고 요약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제도들을 정비해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국민연금 제도를 전면 시행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만들었다. 건강보험이 통합되지 않았다면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복지 정책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 또한 그때 개혁하지 못했던 부문이 지금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의료공급체계 문제도 그중 하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였다. 작은 정부가 대세였다. 그래서 공공 인프라 부문을 개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김대중 정부 때에야 사회보장제도의 뼈대가 구축됐다고 보나?

이른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라는 두 정치집단의 성격 차이가 현격하지 않았나? 김대중 정부는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재야 운동가 내지 야당 세력이 1980년대 운동권 세력과 만난 정치적 지형에서 성립되었다. 다른 쪽에는 친일, 독재, 군사 그룹이 모여 있었다. 지금도 양 집단은 친(親)복지와 반(反)복지로 나뉜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또한 4대 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허공에서 실행한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의료보험법을 도입한 것은 1963년 박정희 정권이고, 연구는 이승만 정부 말기에 시작했다. 독일도 비스마르크가, 일본도 자민당 정권이 의료보험을 도입했다. 역사를 살피면,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복지 정책에 고정된 견해를 갖는다고 보는 것도 편견이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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