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수는 1926년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이었다. 기근이 발생했을 때 창고의 쌀을 꺼내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준 일, 다른 아이들에게 없던 하모니카를 가진 일은 선명한 기억이다. 신천수는 어린 시절 행복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금 채굴 투자 실패로, 열여섯 살 신천수는 1942년 전라남도에서 홀로 상경했다. 찻집이나 술집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받은 돈의 절반은 집으로 보냈다. 그러던 1943년, 식당 앞에 붙어 있던 모집 광고를 보았다. “오사카 제철소에서 2년간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훈련 종료 후에는 조선 내 제철소에 기술자로서 취직할 수 있다. 대우가 좋고 집에도 송금할 수 있다.”
신천수는 바로 입사 시험을 보러 갔다. 좋은 조건이 소문났는지 100명 모집에 500여 명이 몰렸다. 식민지 젊은이에게, 일본에 가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번듯한 호구지책이었다. 일본어 능력과 친척 중 독립운동 참가자가 없는지 등의 확인을 거친 후, 신천수는 부산으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다시 오사카로 이동했다.

 

ⓒ시사IN 신선영2018년 10월30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휠체어에 앉은 이)가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신천수가 기억하는 일본제철 오사카 공장 기숙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기숙사 창에는 쇠창살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기숙사 부지의 문에는 망을 보는 사람이 있었고, 밤에는 자물쇠가 채워졌습니다.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의로 노동을 멈출 수 없는 강제노동, 즉 노예의 공간이었다.
1943년 9월부터 시작한 일도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기술을 배우려고 왔는데, 실제 작업 내용은 펄펄 끓는 용광로 바로 앞에 서서 반복적으로 석탄을 밀어넣는 일이었다. 며칠에 한 번씩, 용광로로 열을 보내는 길이 100m 이상의 쇠파이프 내로 들어가서 청소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열기가 식지 않은 쇠파이프 속에서 신천수는 탈수할 만큼 땀을 흘렸고, 석탄 분진을 마셨기에 검은색 침을 뱉어냈다. 제공되는 식사량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집에 송금할 수 있다던 월급도 없었다. 일본제철은 첫 월급을 주면서 전액을 강제로 ‘우편저금’에 넣도록 했다. 통장과 도장은 사감이 보관했다. “큰돈을 주면 도망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17세 청년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 돈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신천수는 친구에게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다. 며칠 뒤 사감은 기숙사 사람들을 불러놓고 ‘신천수가 도망가려 했다’며 그를 목검으로 때렸다. 신천수의 증언이다. “목검으로 20대 정도를 심하게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도망가려던 동료가 죽을 만큼 구타당하는 모습을 본 조선의 청년들에게 오사카 제철소는 지옥이었다. 그 지옥은 일본의 패망으로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1974년 일본의 한 헌책방에서 일본제철이 작성한 〈조선인 노무자 관계〉라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일본 고마자와 대학 고쇼 다다시 교수는 1991년 이 자료를 근거로 ‘연행조선인 미불금 공탁보고서’를 발표한다. 일본제철이 식민지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속여 연행하고 임금도 주지 않았는지 등이 객관적 증거를 통해 드러났다.
1997년 71세의 신천수와 또 다른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여운택은 일본 오사카 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와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자신들을 속여서 일본으로 끌고 가 견딜 수 없는 조건에서 노동을 시켰다는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과 미지급 임금에 대한 청구였다.

 

ⓒ연합뉴스박근혜 대통령(왼쪽)과 양승태 대법원장(오른쪽)은 재임 때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 재판을 지연시켰다.

일본 오사카 지방법원은 2001년 12월5일 신천수가 오사카 제철소에서 한 노동은 위법한 강제노동이라고 판단했다. 판결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고들의 노동은 기술을 습득하게 한다는 사전 설명과는 달리 매우 열악했다. 구체적인 임금 액수도 모른 채 일부만 지급받거나 강제로 저금했다. 일본제철의 감시하에 노무에서의 이탈도 거의 불가능했고, 식사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열악한 주거 환경하에서 가혹하고 지극히 위험한 작업에 거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상당 기간에 걸쳐 종사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강제노동에 해당해 위법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지만, 일본 법원 역시 불법적 강제노동 사실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송의 결과는 패소였다.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구(舊) 일본제철’과 ‘2001년 당시 일본제철(제2회사)’은 별개의 회사이고, 구 일본제철의 채무가 지금의 일본제철에 승계되지는 않는다는 이유였다.

 

일본은 1946년 8월15일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을, 1946년 10월19일 기업재건정비법을 제정·시행했다. 구 일본제철의 회계는 이 법에 따라 1946월 8월11일 오전 0시를 기준으로 ‘신계정’과 ‘구계정’으로 분리되었다. 전범 기업의 책임을 면하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한 셈이었다. 기존 사업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회사를 하나 만든 후 유리한 자산만 넘겼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은 예전 기업에 남겨둔 채, 그 예전 기업을 없애버린 것이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이 같은 비겁한 법률에 따라, 신천수가 구 일본제철에 대해 가지는 손해배상 채권은 현재의 일본제철에 승계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최근 첨예하게 대립하는 1965년 청구권협정의 효력 범위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1946년 시행된 법률에 따라 피해자들의 청구가 기각되는 상황에서 1965년의 협정까지는 나아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신천수는 항소와 상고를 이어갔으나, 2002년 11월 일본 고등재판소와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 모두 추가 판단 없이 1심 판결을 인정했다. 일본에서 그의 소송은 패소로 확정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생전의 신천수 할아버지의 투쟁 모습.

한국 사법부 “개인 청구권 소멸되지 않았다”

 

 

 

신천수는 2005년 2월28일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 3명과 함께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3월1일에 소장을 접수하고 싶었지만 휴일이라 전날 접수했다. 2008년 4월,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확정된 패소 판결이 걸림돌이 되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신천수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에서 패소한 판결의 효력이 이 사건에도 미치고, 구 일본제철의 채무가 현재의 일본제철에는 승계되지 않으며,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신천수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소멸되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최근 보수 언론에서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이 1965년 청구권협정을 ‘유별나게’ 해석해 일본의 경제 보복을 야기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한국 사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관련해 ‘불법행위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라고 일관되게 해석해왔다.
신천수는 항소했으나, 2009년 7월 서울고등법원은 1심 법원과 동일하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결국 이 사건도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고 한다. 소송 지원 활동가들도 원고들이 또 실망할까 봐 법정에 오라는 말을 못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2012년 5월 청구권협정 관련 부분을 제외한 모든 쟁점에서 하급심 법원의 판단을 뒤집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의 진정한 의미는, 1965년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에 있지 않다. 청구권협정에 대해서는 1·2심과 같은 판단을 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이와 다른 전제(‘일본의 식민 지배는 합법’)에 선 일본의 판결이나 법률은 대한민국에서 승인될 수 없다고 한 판단에 2012년 대법원 판결의 진짜 의미가 있다. 대법원은 일본 판결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일본 판결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가 합법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구 일본제철과 새로운 일본제철은 영업재산·임원·직원 등이 동일한 회사였다. 그러나 오로지 ‘전후 배상채무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 아래 제정된 일본법으로 이 회사의 모든 책임을 제거해준 것이다.

한·일, ‘식민지 불법성’ 문제 합의 못해


한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 과정에서 ‘식민지 불법성’ 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청구권협정이 ‘이견 합의’로 불리는 이유다. 적당히 덮고 넘어갔던 양국 간 합의 속에서 식민지 피해자들의 고통은 침묵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또다시 법에 가로막혀왔다. 그러나 2012년 대법원은 식민지가 불법이라는 전제 위에 이루어지지 않은 법률과 판결을 강제동원 피해를 다루는 사건에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은 원고들에게 승소 판결을 했다. 열일곱 살에 오사카로 끌려가 구타를 당하며 제대로 된 식사나 월급 한번 제공받지 못했던 신천수가, 71세가 되어 비로소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패소했던 신천수가, 88세가 되어서야 대한민국 법원에서 자신의 명예와 권리를 회복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일본제철은 또다시 대법원의 판단을 받겠다며 재상고를 했다. 신속하게 선고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통상의 예상과 달리, 오랜 시간 동안 심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야 그 과정이 재판거래·사법농단이었음을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발만 동동 굴렀다. ‘우리 할아버지들 연세가 많으신데 왜 판결이 확정되지 않나’ 걱정만 할 뿐이었다. 한국과 일본 정부, 대법원과 외교부, 그리고 일본제철을 대리했던 김앤장 변호사들 간의 긴밀한 공모 속에서 강제동원 재판이 일부러 지연되고 있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대법원 판결이 고의로 지연되던 2014년 10월8일, 신천수 할아버지는 20년 넘게 이어온 소송의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여운택, 김규수 할아버지도 같은 운명이었다. 원고 네 명 중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확정판결 선고일에 출석한 사람은 이춘식 할아버지 혼자였다. 이춘식 할아버지는 혼자 이 판결을 보게 되어 “기쁘지만 서글프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신천수와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년 넘게 싸워 얻어낸 판결을 ‘폭거’라고 비판하며, 경제 보복을 가한다. 한·일 언론은 양국의 조치와 대항을 ‘전쟁’처럼 보도하지만, 정작 이 문제의 시작점은 온전히 알려지지도 사유되지도 못하고 있다.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식민지의 젊은 남성들을 노동자로, 젊은 여성들은 성노예와 근로정신대로 끌고 갔던 일본 정부와 기업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 1965년 한국과 일본이 국가 간 약속을 맺는 과정에서 다루지 못했던 이 문제를 이제야 대면하게 된 것이다. 신천수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지금 상황을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훌륭하게 싸웠고, 좋은 판결을 받아냈다. 그다음부터는 우리들 몫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하고 싶다.

기자명 임재성·김세은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대리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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