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2월 대법원은 특이한 결정을 내렸다. “1995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에 한하여 개명 허가 신청만으로 이름을 고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국민학교 아동에 대한 개명 허가 신청사건 처리지침’을 발표”한 것이지. 한번 신고된 이름을 바꾸는 건 매우 어려웠거든. 빗발치는 개명 신청 속에서 대상이 된 이름들은 지금 읊어도 웃기고 슬프다. “나죽자, 김창녀, 박쌍연, 한시만, 조방구, 이무식(〈경향신문〉 1994년 12월27일).” 여기에 출석부를 부를 때마다 놀림감이 되는 범상치 않은 이름 하나가 있었어. 바로 ‘김일성’이야.

알다시피 김일성은 해방 뒤 북한의 통치자가 되어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북한의 절대권자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야. 남한 사람들에게는 원수였지. 아빠 또래에게는 “때려잡자 김일성”이라는 구호가 매우 익숙해. 그러니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겠니. 초등학교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곤혹스러움은 피하기 어려웠을 거야.

ⓒ연합뉴스1986년 11월 서울 마포구 한 음식점에서 ‘축 사망 김일성’이라는 글귀와 호외 신문을 붙여놓았다.


때려잡고 불태우고 찢어 죽여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였지만 뜻밖에도 그의 얼굴을 공개하는 건 금기였다. 아빠가 중학생 때 〈지금 평양에선〉이라는 반공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어. 탤런트 김병기씨가 김정일 역을 맡아 열연했지만 그 드라마에서도 김일성 주석을 본격 등장시키지는 못했어. 뒤통수에 난 혹과 안경만 살짝살짝 드러냈을 뿐이야. 김 주석을 감당할 배우가 없었던 탓인지, 그를 대놓고 묘사하기가 힘들었던 것인지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방송은 물론 신문에도 김 주석의 실제 모습이 실린 경우는 드물었어. 신문에 그의 캐리커처라도 등장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이 다 되어서였지.

남한 사람들 눈에 김일성 주석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뱀파이어처럼 보였어. 이승만 대통령이 쫓겨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자행하다 심복의 총에 죽임을 당하고, 전두환씨가 그 뒤를 이어 5년 가까이 청와대를 차지한 기간 내내 김일성 정권은 굳건했으니까. 그러니 1986년 11월 뉴스를 보고 아빠는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어.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단다.

등교 시간인 오전 7시30분까지 학교에 닿기 위해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달려 나가던 순간 집 앞에 놓여 있던 신문 호외에 ‘동작 그만’이 되고 말았어. 대문짝만하게 쓰인 호외의 내용은 이랬다. “김일성 총 맞아 피살” “열차 타고 총격받았다” “군부 중심 심각한 권력투쟁 진행 중”.

‘세계적인 주말 대특종’이라며 자랑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가운데에서도 〈조선일보〉의 활약은 대단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설’의 시작은 루머였어. 북한 방송을 감청하던 주한 미군 병사가 장송곡풍의 음악이 끝나고 나온 멘트를 오해해 확인 요청을 한 것이 김일성 주석 사망설로 국제 외교가에 번지게 됐다는 게 소문의 내용이었지. 이 루머를 처음 기사화한 언론이 〈조선일보〉였어. “북한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소문이 15일 나돌아 동경 외교가를 한동안 긴장시켰다. (…) 이 소문의 내용은 중공 국가 주석 이선념이 지난달 초 평양을 방문하기 전에 북한군 일부에서 김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암살 기도 가담자들은 중공으로 도주했으며 북한이 중공 측에 대해 이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해오던 중 이 사건에 가담했던 나머지 일파들이 결국 김을 암살했다는 것으로 돼 있다.” 그해 11월16일자 1면 4단 기사였지.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였지만 한국 언론들은 이 기사가 신호탄이라도 되듯 폭주하기 시작했어.

휴일 호외가 전국에 폭설 내리듯 뿌려졌고 〈조선일보〉는 “세계적인 주말 대특종”을 자랑하며 아예 김일성 주석 사망설에서 ‘설(說)’자를 떼고 사망을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정보기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방부가 김 주석 사망을 ‘확인’하는 입장을 취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어. “열차에서 총을 맞았다”라고도 했고 “폭탄에 당했다”는 보도도 나왔으며 “오진우(인민무력부장) 동지가 정권을 장악했다”라는 방송이 들렸다고도 했어.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시나브로 김일성 주석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지경이었지.

큰일이 난다 생각하고 주식을 죄다 팔아버린 사람도 있었고, 성미 급한 포장마차 주인은 “축 김일성 사망”을 내걸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이 죽었다느니 살았다느니, 언쟁하다가 주먹다짐을 벌여 나란히 경찰서 신세를 진 사람들도 있었어. 서로 부상을 입히고 입은 채 “우리도 김일성의 피해자(〈경향신문〉 1986년 11월18일)”임을 주장했다니 한국 사람들의 흥분 상태는 도를 넘고 있었지.

 

ⓒ연합뉴스1986년 12월 평화의 댐 건설 모금방송에 참여하고 있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좀 이상했다. 김 주석이 열차를 타고 가다가 피격 사망했다는데 평양의 방송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것도 그렇고,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던 바트문흐 몽골 공산당 서기장이 일정을 중지한다는 소식도 없었던 거야. 몽골의 국가원수는 별안간 4000만 한국인이 목을 길게 빼고 지켜보는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지.

세상에나 죽었다던 김일성 주석은 곧바로 바트문흐를 영접하며 멀쩡하게 나타났다. 모든 사망설은 일순간에 봄볕 받은 눈처럼 사라졌다. 도대체 그 말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누가 그런 거짓말을 지어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해명도 없었고 〈조선일보〉는 되레 오보의 책임을 북한으로 돌렸어.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적으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분노하면서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지. 정작 북한은 남의 나라 수령의 죽음까지 제멋대로 지어내면서 도대체 뭘 노리는지 알 수 없는 남조선 사람들의 행태에 무척 의아해했을 테지만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묻겠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어. 사실 김일성 주석 사망설이 터지기 보름 전에 또 하나의 코미디가 있었단다. 1986년 10월27일 건설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수공(水攻)을 획책한다고 발표했어. 이에 발맞춰 텔레비전에서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물에 잠기는 모습을 묘사한 뉴스를 만들어 보도하기 바빴지. 이를 막겠다고 ‘평화의 댐’ 만들기 운동이 벌어져 수백억원의 성금이 걷히기도 했단다. 그런데 수년 뒤 평화의 댐은 거대한 사기극으로 밝혀져. “금강산댐은 당초부터 없었으며 당분간 수공 위험도 없다는 연구 보고서가 한국 과학기술연구원에 의해 작성됐으나 과기처에 의해 묵살됐다(〈동아일보〉 1993년 6월18일).”

1986년 김일성 주석 사망설과 평화의 댐 해프닝으로 대한민국은 대단한 리얼리티 쇼를 세계에 펼쳐 보인 셈이야. 한 나라가 불분명한 헛소문에 놀아나고,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듣고, 뵈지도 않는 것을 보았던 이 ‘분단성 망상장애’는 너무나 웃겨서 슬펐고 어이없으면서 서러웠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국 언론이 마치 경마하듯 폭주한 김일성 주석 사망 오보의 퍼레이드는 우리 역사에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어. 철벽이 되어버린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유치해질 수 있는지, 증오와 공포의 어둠 속에서 어디까지 우스꽝스럽게 허우적거릴 수 있는지 말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CNBC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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