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6월27일 열린 재일한국인과의 간담회에서 국가수반으로는 처음으로 재일한국인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문 대통령은 “재심으로 무죄판결이 이어지고 또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기도 하지만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빼앗긴 시간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독재 권력의 폭력에 깊이 상처 입은 재일동포 간첩 조작 피해자 분들과 그 가족 분들께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사과를 듣는 피해자들은 감개무량했다.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고문 수사관, 검찰, 사법부를 비롯한 국가 차원의 진심 어린 사죄를 기다려왔다. 사과가 그냥 ‘말’이 아니라 ‘진심’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 문 대통령은 정부가 진실을 규명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치유 노력 중 하나로 재발 방지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가해자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
 

ⓒ연합뉴스6월11일 재일한국인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윤정헌·이종수· 박박씨(왼쪽부터)가 구상권 행사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신체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 권리다. 한국 헌법도 모든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군사독재 시절 수사기관의 불법 연행, 감금과 고문, 가혹행위는 ‘관행’이었다. 지난 2월8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의 가혹행위가 있었으며, 검찰은 국정원의 증거 조작을 사전에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민주화 이후에도 가혹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지독한 고문 등으로 인간성을 짓밟고 거짓 자백을 받아낸 수사관과 그 지휘관에게 책임을 물은 적이 없기에 똑같은 사건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6월11일 재일한국인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재발 방지 방안을 하나 제시했다. 간첩 사건을 조작한 군인·공무원들에게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박박, 윤정헌, 이종수씨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재심 재판을 함께 해온 변호사들과 기자회견을 열고 법무부 장관에게 고문 수사관들에 대한 구상권을 행사하도록 청원했다.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은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그 손해를 국가가 배상해야 하며, 공무원에게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을 경우 국가는 그 공무원에게 구상할 수 있다고 규정해놓았다. 국가가 우선 국민 개개인이 입은 피해를 배상한 뒤, 불법을 저지른 공무원 전원에게 각자 가담한 불법행위의 정도에 따라 손해액을 재청구하는 것이다.

이번에 구상권 행사를 청원한 재일한국인은 모두 10명이다. 1970~80년대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군 수사기관인 보안사령부(보안사)가 민간인을 불법으로 연행·감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허위 자백을 강요하여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한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에서, 이들은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피해자이다. 이들은 모두 2010년부터 재심을 시작해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고 모두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민사 판결이 확정되어 한국 정부로부터 배상액을 지급받았다.


“고문 가해자가 국가배상금 부담해야”

이들은 구상권 행사 대상자로 고문 가해자인 전 보안사 수사관 고병천씨(80)를 지목했다. 기자회견에 나선 윤정헌, 박박, 이종수씨는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의 고병천씨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고씨는 가석방된 박박 부부를 찾아가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사건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고씨는 그 외 7명의 사건 조작 계획 수립 및 상신, 전체 사건의 지휘 및 검찰 송치를 위한 허위 자백의 정리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퇴역한 뒤에도 고씨는 자신이 관여한 조작 사건에 대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고문 및 기타 가혹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허위 진술을 일삼았다. 심지어 윤정헌씨의 형사 재심 재판 때는 증인으로 나와 선서한 후에도 자신이 고문한 피해자들 앞에서 “고문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대했더니 윤정헌이 자백했다”는 취지로 위증을 했다. 재심에서 무죄를 얻어낸 윤정헌씨는 고심 끝에 고병천씨를 형사 고소했다. 위증 혐의로 기소된 고씨는 형식적으로 사과했지만, 법정에서 회피성 답변으로 일관해 이례적으로 공판 도중 법정 구속되었다. 고씨는 지난해 징역 1년 실형을 확정받았다. 고병천씨가 처벌받은 것은 재심 재판에서 위증한 혐의였다. 즉, 불법 감금 및 고문으로 처벌받은 것이 아니었다. 고문 가혹행위 피해자는 가해자의 형사처벌을 제기하고 싶어도 공소시효 때문에 그 죄를 물을 방법이 없다.

ⓒ연합뉴스6월27일 열린 재일한국인과의 간담회에서 재일한국인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문재인 대통령.


그래서 윤정헌씨와 박박씨는 고병천씨에 대한 구상권 청구 문제를 변호사에게 문의했다. 위증을 한 고병천씨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위증 관련 재판 당시 고씨 주변에서 지원하던 전직 수사관들의 행태를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국가의 구상권 행사로 민사상으로라도 가해 책임을 묻고 정의를 바로세우고 싶었다.

재심에서 무죄가 나오고 국가 배상도 받은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한국 정부에서 받은 배상금이 국민의 혈세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원자 10명도 자신들이 받은 배상금의 일부라도 ‘고병천씨가 간첩을 조작하며 받은 월급·성과급·연금에서 지불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2010년부터 과거 간첩 조작 사건들에 대한 재심 무죄판결이 잇따르면서 피해자들이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민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거액의 손해배상 책임을 졌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행보에 부정적이던 일부 언론은 급격히 늘어난 국가 배상액만 보도해 시민들에게 국가폭력의 피해보다 ‘국민 혈세 도둑’이라는 인상을 키웠다. 언론이 피해자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국가로 하여금 가해 공무원들에게 구상권을 적극 행사하여 국고로 환수하라고 요구했어야 한다.

대법원은 2011년 과거사 재심 무죄를 이유로 한 국가배상 사건의 지연이자 기산점을 불법행위가 일어난 시점이 아닌 재심 무죄 선고 뒤 손해배상 청구 소송 변론 종결 시점으로 대폭 앞당겨 국가배상액을 줄이는 판결을 내놓았다. 나아가 2013년 12월 양승태 대법원은 재심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기존 5년에서 형사보상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대폭 단축해 배상액을 삭감했다. 대법원이 피해 회복을 해야 할 피해자보다는 정권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이다.

국가는 이제라도 국가배상이 이루어진 간첩 조작 사건들에 대한 구상권을 행사하여 국가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유사 사건의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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