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은 11개월이었다. 달력 속 1월을 애써 외면했다. 잊으려고 애쓸수록 또렷했다. 꾸역꾸역 눌러둔 기억은 매년 1월이 돌아오면 기어코 비집고 나와 삶을 흩어놓곤 했다. 몸살처럼 새해를 앓고 나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쌓였다. 배달로 생계를 잇는 동안 높은 건물에 들어설 때면 겁이 덜컥 났다.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이 몸을 휘감았다. 병원 상담을 받고,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좀체 말을 듣지 않는 몸으로는 일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생계와 일상 사이 시간은 자주 토막 났다.

그런 그늘을 내색하지 않는 이였다. 드물게 모임에 나올 때면 진상 규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며 미안해했다. 홀로 노모를 모시고 사는 사정을 빤히 아는 동료들은 ‘얼굴이나 자주 보자’라며 다독였다. 대답 없이 싱겁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자주 올 수 없었던 그가 그 말을 짐처럼 지고 돌아갔을 거라고, 동료들은 뒤늦게 짐작했다.

그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생존자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몇 차례 마련한 자리에서도 말을 아끼곤 했다. 2017년 서울시가 펴낸 용산참사 백서 〈용산참사, 기억과 성찰〉 인터뷰에 참여한 그는 트라우마를 묻는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기억을 일부러 지우려고 노력을 해서…. 구속되어 있을 때도 기억을 안 하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서 나름대로 기억을 많이 지웠어요.”

ⓒ연합뉴스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4구역 한 건물 옥상에서 경찰의 강제진압이 진행되자 철거민이 “안에 사람이 있다”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2009년 1월20일을 지나는 동안 크게 휘청인 삶은 노력으로 어찌 되지 않았다. 그날 용산4구역 철거민 김 아무개씨(49·사건 당시 39세)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옥상 위에 세워진 가로 6m, 세로 6m, 높이 8m 크기의 망루 4층에 있었다. 한 달 정도 망루에서 지내다 보면 협상이 진행될 거라고 예상했다. 기대는 물대포와 함께 휩쓸려갔다. 경찰의 물대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급히 지어진 망루는 모양만 갖췄지 허술했다. 망루까지 이고 지고 올라온 쌀과 김치, 배드민턴공 역시 김씨와 함께 흠뻑 젖었다.

3년9개월 복역하고 석방됐지만

당시 용산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은 용역깡패를 앞세우고 이례적인 속도로 진행됐다. 그 지역에서 1996년부터 13년간 중화요리집 ‘공화춘’을 운영했던 김씨는 이주 대책을 요구하며 재개발에 타협하지 않은 상가 세입자 23세대 중 일부였다. 그에게는 두 번째 ‘당하는’ 일이었다. 용산에 공화춘을 차리기 전 인사동에서 운영했던 가게도 2년2개월 만에 재개발되면서 권리금 한 푼 못 받고 쫓겨났다. 김씨는 검찰 조서에 이렇게 남겼다. “식당 인수할 때 1억2000만원이 들었는데, 철거하면 보증금까지 합쳐서 6500만원을 준다고 합니다. 여윳돈으로 장사를 하는 게 아니고 생계 수단으로 장사를 하는 건데 철거되면 생계가 막막해지는 거거든요. 그 돈을 받고는 도저히 철거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어서 망루에 올랐다. 1월20일 오전 6시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인터뷰가 예정돼 있었다. 처음으로 외부에 철거민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왜 망루까지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면 해결의 실마리도 생길 거라 믿었다. 인터뷰는 진행되지 못했다. 오전 5시30분, 경찰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망루 안에서 처음 고개를 내민 사람이 김씨였다. 숨 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망루 안으로 들어온 검은 호스가 김씨 얼굴을 정면으로 겨눴다. 최루액이었다. 망루 4층에서 옥상으로 뛰어내리고 채 2~3분이 지나지 않아 망루가 불탔다. 연행된 경찰버스 안에서 김씨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살아남은’ 김씨는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공동정범 중 한 사람이 되었다.

2012년 10월26일, 김씨는 3년9개월4일 만에 석방됐다. 진압을 결정하고 명령했던 경찰 가운데 참사와 관련해 책임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압을 승인하고 명령한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일본 오사카 총영사를 거쳐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복귀했다. 2016년에는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았다. 돌아온 집에서 김씨는 마음을 붙이기 위해 애썼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가 꺾인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돈도 많이 벌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삶의 의지가 컸는데…. 그런 게 꺾이고, 내려놓게 된 것 같아요. 좋게 표현하면 욕심을 많이 내려놨죠(〈용산참사, 기억과 성찰〉).”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서울구치소에 있었던 2년간 이틀에 한 번, 전주교도소로 이감된 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관절염을 앓는 몸으로 고작 10분 아들을 보기 위해 150회 넘게 면회를 왔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지난 6월23일, 김씨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서울 이태원동 자택을 나선 그는 오전 9시30분께 도봉산 천축사 부근 숲에서 발견됐다. 유서 한 장 없는 죽음이었다.

용산참사를 경험했던 많은 당사자들이 김씨처럼 ‘그날’을 애써 잊으려 한다.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사회적 낙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한 철거민은 7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용산참사 당사자’였음을 이야기했던 경험을 이원호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은 용산을 완전히 잊었다며 연락도 못하게 하던 분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연락이 왔어요.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철거민 얘기가 나오는데 택시 기사가 철거민을 옹호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내가 용산참사 철거민이었다’고 얘기하면서 많이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속이 뚫리는 건지 몰랐다면서….”

ⓒ연합뉴스6월27일 경찰청 앞에서 용산참사 등 ‘경찰 인권침해 8대 사건 피해자 단체’ 관계자들이 국가폭력 사과 등을 요구하고 있다.

말로 드러내지 못한 마음은 주검으로 돌아왔다. 유가족은 애초 장례 일정을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비롯해 외부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겨우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아들의 목숨을 결국 앗아간 게 용산참사였기 때문이다. 10년째 지연되고 있는 진상 규명이 그의 우울에 더께를 쌓은 건 아니었을까. 김씨와 함께 망루에 올랐던 한 철거민은 김씨의 죽음에 깊이 공감한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고, 참사를 정리한 백서가 나오고,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며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조사를 한다고 하긴 했죠. 그래서 사람들은 다 끝난 줄 알아요. 정부가 저렇게 나서니까 해결됐다고 생각해요. 기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죠.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한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해요. 그런데 뭐가 달라졌습니까. 권고가 있으면 뭐합니까. 경찰은 과잉 진압을, 검찰은 편파 수사를 아직까지 사과하지 않습니다. 우리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만 이 참사에 책임을 졌습니다.”

“죽음이라는 표현 쓰기가 두렵다”

이원호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은 김씨의 장례를 마친 다음 날 김씨와 함께 망루에 올랐던 또 다른 철거민 생존자의 집을 찾았다. 전화기도 꺼둔 채 몇 개월째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어서 안 그래도 한두 달에 한 번씩 찾곤 했던 집이다. 그는 귀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환각으로 밤마다 잠 대신 술로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어렵게 김씨의 부고를 전하자, 뉴스를 보면 화가 나는 마음을 조절하기 어려워 소식을 몰랐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 결국 자기 탓을 하게 돼요. ‘쟤 때문에’를 넘어서 ‘나 때문에’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용산참사뿐만이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 죽음에 처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두려워요. 두 번, 세 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천천히 말을 잇는 이 사무국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황망함만 남았다. ‘알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침묵 속에 묵직했다. 용산참사는 끝난 일일까. 김씨의 죽음이 다시 묻고 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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