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 말하면 캠핑은 ‘자연인’이 되는 게 아니라 ‘도시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캠퍼들을 보니 자연으로 도시를 옮기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지 어느 정도의 도시를 옮기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대체로 캠핑카나 카라반을 이용해 좀 더 확실하게 도시를 옮기려는 쪽이 주류였고 최소한의 장비를 사용하는 미니멀 캠핑은 비주류였다. 미니멀 캠핑이라 할지라도 드립 커피 한잔과 같은 ‘옮기고 싶은 최소한의 도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연과 도시화의 밸런스를 맞추는 ‘적정 도시’ 개념은 무주산골영화제(6월5~9일)와 무주 여행을 설명하는 중요한 코드다. 무주산골영화제와 무주에는 도시인들이 딱 좋아할 만한 수준의 ‘적정 도시’가 구현되어 있다. 대체로 관광에 관심을 둔 지방자치단체에는 ‘과잉 도시’가 구현되어 있기 마련이다. 도시인을 겨냥한 시설물도 도시에서는 한물간 것들이 많다. 무주에는 ‘자연에 대한 도시인의 욕망’이 잘 반영되어 있었다.
영화제 보도 자료에는 ‘유어마인드’ 등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독립출판물과 아트북을 판매하는 1세대 독립서점인 유어마인드는 요즘 젊은 세대 감수성과 딱 맞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매년 주최하는 곳이다. 젊은 관객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고려가 곳곳에서 엿보였다. 한국장편영화 경쟁부문인 ‘창’ 섹션의 ‘영화평론가상’ 심사를 김병규·정지혜·홍은미 등 젊은 영화평론가에게 맡겼다.
산골 무주에 젊은이가 넘쳐났다
직접 찾아간 무주산골영화제에는 기대 이상의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현실 세계에 펼쳐놓은 듯한 ‘자연주의 유기농 영화제’였다. 고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무주등나무운동장에 젊은 관객들이 한가롭게 앉아 있었고, 운동장 한쪽에 설치된 커다란 원형 천막 아래로는 유어마인드가 산골책방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버스가 하루에 다섯 번밖에 없는 이곳 무주에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마치 서울 홍대 앞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보는 듯했다.
도시인들은 지역 행사에 갈 때 전원적인 행사장 모습을 기대한다. 막상 직접 가보면 대부분 쇠락한 읍내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표’가 읍내에 있기 때문이다. 행사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고 ‘티’를 내야 하는 단체장 처지에서는 행사를 읍내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다. 무주산골영화제 역시 마찬가지다. 무주 읍내에서 주요 행사를 진행한다.
그런데도 무주산골영화제는 운치가 있었다. 무주등나무운동장과 한풍루 덕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무주예체문화관, 무주전통문화생활관 등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무주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행사장은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호젓한 느낌을 주었다. 산과 들과 마을과 강이 어우러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행사장이 아늑했다.
그릇이 좋은데 담기는 음식이 맛없을 리 없다. 무주등나무운동장에서는 그 장소에 꼭 어울리는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이 무대를 장식했다. 한풍루 앞 무주지남공원 ‘산골미술관’에는 요즘 젊은 영화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박정민 배우를 주제로 전시가 열렸다.
지역에선 구도심 활성화나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공간을 주고 청년들을 밀어 넣는 식의 밀어붙이기 사업을 많이 하는데 무주의 방식은 호흡이 길었다. 무주의 어른들은 조지훈 프로그래머를 비롯해 영화제 기획진이 영화제의 꼴을 만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올해로 7회째). 조 프로그래머가 정원선 여행작가에게 무주를 소개하는 책을 부탁했고 이 책도 3년 만에 〈무주에 어디 볼 데가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판을 깔게 만드는 무주의 방식은 다른 지자체도 참고할 만하다. 그들 스스로 기획자와 향유자가 되어 무주를 보면 무주가 재해석되고 재발견된다. 관광은 단지 관광자원을 그대로 활용하는 일이 아니라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완성된 것을 주기보다 완성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게 중요하다. 무주산골영화제가 그 전범이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면 다른 세대는 따라오게 되어 있다. 무주산골영화제도 점점 가족 관객이 많아져서 이에 맞춰 가족 프로그램 비중을 늘리고 있다.
야영장에서 느끼는 영화제의 진면목
무주산골영화제의 또 다른 무대인 덕유대야영장에서는 산골영화제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덕유대야영장 대집회장에서 열린 야외 상영회에선 영화 감상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관객들은 팝업 텐트 안에 누워서 혹은 캠핑 의자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추위를 타는 사람은 침낭 안에 들어가 고개만 내밀었다. 하늘에선 별이 쏟아졌다. 이곳뿐만 아니라 무주등나무운동장과 향로산 자연휴양림에서도 야외 상영이 이뤄졌다.
국내에서 가장 큰 야영장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덕유대야영장 역시 ‘적정 도시’가 구현된 캠핑장이다. 친환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덕유대야영장은 시설 과잉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많다. 일단 캠핑장을 대규모로 지어서 자연을 훼손했고 샤워장·화장실·개수대 등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이용자 처지에서 보자면 덕유대야영장은 편리한 캠핑장이다. 이곳에서 캠핑할 때 큰비가 왔는데 덕분에 캠핑장 배수로가 제대로 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중에도 걱정 없이 캠핑하며 피톤치드로 샤워하는 듯한 상쾌함을 맛볼 수 있었다.
덕유대야영장은 고도 673m에 자리 잡아서 여름에 이용하기 좋은 캠핑장이다. 보통 고도가 100m 올라갈 때마다 온도가 0.4~0.5℃가량 낮아지는데 이 정도 높이면 여름밤에 열대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나무가 울창해서 그늘이 많고 캠핑장 아래로 구천동 계곡이 있어 낮에도 물놀이로 더위를 피할 수 있다. 단점도 있다. 무주 읍내와 제법 떨어져 있어서 자동차로 40~50분 걸린다.
무주는 전라도 지역의 다른 지자체와 달리 숙박 인프라가 좋은 편이다. 덕유산 스키장 덕분이다. 무주리조트를 비롯해 펜션 등 숙박시설이 제주도와 강원도 수준으로 넉넉하다. 특징은 겨울철 스키 시즌이 성수기라 다른 계절에는 비교적 저렴하다. 이번 무주산골영화제 기간 덕유산 스키장 인근 숙박업소 중에는 영화제를 후원한다며 반값 할인을 해주는 곳도 있었다.
스키장 덕분에 무주 여행에 유리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1614m)에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스키장 곤돌라를 타고 1520m 높이의 설천봉까지 가서 15~20분 정도 능선길을 걸으면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에 오를 수 있다. 향적봉에서는 가야산·황매산·지리산 등 남부지방의 명산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시간이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은 중봉까지 완만한 능선길을 걸어 다녀올 수 있다. 오르기 쉬워서 아이를 안거나 업고 향적봉에 다녀오는 사람도 많았다. 이것 역시 친환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가족 여행객들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한다.
덕유산과 함께 무주의 매력은 바로 금강이 굽이쳐 흐른다는 점이다. 무주에 올 때 이곳이 금강 상류라는 것은 대부분 모르고 와서 감동을 받고 간다. 특히 금강이 휘돌아 나가는 여울목에 자리 잡은 앞섬마을과 뒷섬마을의 풍광은 강원도 영월이나 정선의 풍광과 맞먹는다. 차이가 있다면 개발이 아직 안 되었다는 점, 끝없이 피어난 금계국만이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앞섬마을 둔치에 늠름한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시원했다. 앞섬마을과 뒷섬마을을 중심으로 ‘금강벼룻길’ ‘맘새김길’ ‘학교 가는 길’ ‘방우리길’ 등 여러 산책로가 나 있다.
금강 덕분에 무주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다. 어죽이다. 이곳 어죽은 다른 곳 어죽에 비해 유난히 맛있다. 금강 상류의 싱싱한 민물고기를 쓰기 때문이다. 민물고기가 풍부해 요령 부리지 않고 ‘원래 만들던 대로 만드는 것’이 이곳 어죽 맛의 비결이다. 푹 곤 민물고기의 살을 발라내 쌀이나 수제비를 넣어 죽을 끓이는 방식은 동일하고 잡내를 잡는 방식만 조금 다른데, 이번에 간 ‘섬마을’ 어죽은 부추로 잡내를 잡았다. 어죽과 함께 권하고 싶은 음식은 빙어로 만든 도리뱅뱅이다. 멸치조림과 닭강정의 장점을 합친 맛이 났다. 민물새우도 별미인데 튀기거나 민물새우탕을 끓여 먹는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 아닌 듯한데 아이들은 한번 숟가락을 대더니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간다면 무주의 장터도 들러볼 만하다. 무주에는 지금도 5일장이 열린다. 반딧불 장터(1일, 6일) 삼도봉 장터(2일, 7일) 대덕산 장터(3일, 8일) 덕유산 장터(5일, 10일)가 열리고 이중 반딧불 장터는 상설로 열린다. 〈무주에 어디 볼 데가 있습니까?〉의 정원선 작가는 반딧불 장터의 터줏대감 임정애 할머니가 파는 찐빵과 호떡을 꼭 먹어봐야 한다고 권했다. 임 할머니는 스물네 살 때부터 50년 넘게 장터를 지켰다.
무주는 도시에선 구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구현해주는 ‘발전된 시골’이다. 이 같은 무주에 언제 가는 것이 좋을까? 일단 8월31일부터 9월8일까지 열리는 ‘무주 반딧불축제’가 있다. 이 축제는 가장 무주다운 행사로 꼽힌다. 반딧불이는 축제 때만 서식하는 것이 아니니 여름과 초가을 언제 가도 좋다. 무주호를 배경으로 적상산 단풍을 볼 수 있는 가을도 좋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덕유산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눈꽃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겨울도 좋다. 무주는 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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