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가 애니메이션에 끼친 영향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그중 하나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최초로 ‘콘셉트 아티스트’를 고용한 일이다. 콘셉트 아티스트의 그림은 애니메이션에서 한 컷도 쓰이지 않았다. 오직 작품의 ‘분위기’를 그림으로 제시했다. 스웨덴 작가 시몬 스톨렌하그의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일러스트 한 장 한 장이 모두 미래의 분위기를 포착한 ‘콘셉트 아트’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아트북이다.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세상은 암울하고 황폐하다. 사람들은 ‘뉴로캐스터’라는 일종의 VR 기기를 자주 이용하는데, 뉴로캐스터는 사람들의 뇌를 온라인으로 연결했다. 가까운 미래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야기의 배경은 1997년이다.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사람들이 아무도 뉴로캐스터를 벗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먹는 것, 자는 것도 잊고, 자식들까지 내팽개친 채 뉴로캐스터에 열중했다. 급기야 뉴로캐스터에 연결한 채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도시의 기능은 점차 마비되고, 세상 곳곳에 전쟁의 흔적이 방치된 채 남아 있다. 도시를 밝히는 것은 뉴로캐스터의 서버이고, 움직이는 것은 케이블을 연결하기 위해 이동하는 무인 드론뿐이다.
 

〈일렉트릭 스테이트〉 시몬 스톨렌하그 지음, 이유진 옮김, 황금가지 펴냄


이런 세상에 한 소녀가 작은 로봇과 함께 단둘이 자기 동생을 찾아 나선다. 어떤 위험이 존재할지 알 수 없는 세상. 소녀는 산탄총 하나에 의지해 길을 떠난다. 도시는 텅 비어가고, 곳곳에 뉴로캐스터를 낀 시체가 즐비하다. 소녀는 시체를 뒤져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그들의 차를 슬쩍한다. 길 위에서 소녀는 종종 어두웠던 과거를 회상한다. 비록 사람들 틈에서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지만, 모두가 사라져버린 황폐한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러스트 65장의 압도적 분위기

모하비 사막을 시작으로, 산맥을 넘어 동생을 찾아 나서는 소녀의 여정은 긴장으로 가득하다. 아이는 경찰을 만날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더 이상 경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살아서 움직이는 자들은 모두 뉴로캐스터를 낀 채 주변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수많은 SF 영화가 암울한 미래를 그린다. AI와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간을 압도하는 기계가 인간과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는 흔하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인간이 온라인에 중독되어 스스로 소멸해가는 독특한 아포칼립스를 일러스트 65장으로 보여준다. 암울하고 괴기스럽고,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미지들이 지독히 고독하다. 도시에 버려진 갖가지 조형물과 뉴로캐스터 케이블의 기괴한 조합이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동시에 영감을 자극한다.

기자명 박성표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