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덜 가르쳐도 되니까 기대가 크지는 않은데…. 선생님도 여자분이니까 아시겠지만, 여자가 아무리 잘나도 소용없잖아요.” 학부모는 내 눈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지난주에 치른 평가원 모의고사 성적을 확인한 뒤였다. 내가 학원비를 내줄 게 아닌 이상 부모의 선택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결실을 보기 위해 학원을 좀 더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중요한 다른 가치도 많을 것이다. 학부모가 숙고하고 교육에 배분할 자원을 결정했을 테니 굳이 염려를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딸이라서 덜 가르친다’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상담을 하다 보면 학부모들이 사교육 투자비용을 결정하는 기준을 여럿 알게 된다. 자녀의 현재 성적, 기대치, 흥미와 진로, 부모와 쌓아온 신뢰도, 학벌에 대한 가치 부여 수준 등 그 기준은 부모가 살아온 세월에서 비롯된다. 이 집처럼 딸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집안이 있는 반면 딸이니까 더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는 집도 있다.

“딸이니까 덜 가르치겠다”라는 말은 어쩌면 방어기제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다달이 최소 200만원을 지불하면서 재수학원을 보내고, 성적표를 꼬박꼬박 확인해 상담하러 오는 학부모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 모두 유명 대학 출신인 데에 자부심이 있었고 소득수준 또한 상위 10%였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 갖는 무형의 자본을 신뢰하며 교육비 지출에도 여유가 있는 가정이다. 요즘 입시 환경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오빠가 고교 3년 내내 “팽팽 놀다가” 재수학원을 2년 연속 다니고 대학에 진학했기에 동생인 이 학생이 고등학생일 적에도 ‘일단 수시에 올인하고 안 되면 재수학원 가서 정시를 친다’는 전략을 짜놓고 있었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 관한 한 부모 역할을 잘 수행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딸은 못해도 괜찮다.” 어쩌면 담당 강사에게 위안을 얻기 위해 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자녀를 비난하고 실망하기보다는 사회적 편견에 기대는 것이 속 편해서 한 말인지도 몰랐다.

ⓒ박해성 그림

돌처럼 굳어져 사회 속에 깊이 박히는 말들

문제는 이렇게 합리화하기 위해 던진 말들이 돌멩이처럼 단단히 굳어져 사회 속에 깊이 박힌다는 데 있다. “딸이니까”라는 변명은 특히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딸’의 사회적 성취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낮다. “아들이면 어떻게든 분교(서울권 대학의 캠퍼스)라도 보낼 텐데, 딸이니까, 대학 이름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겠죠.” “처녀 때 다 잘났었죠. 애 낳고 키우다 보니 소용없어요. 그래도 얘는 딸이니까, 이해하시죠?” “재수하다 안 되면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고 해야죠. 아들이야 사회생활 해야 하니까 좀 다르겠지만….” 여러 학부모가 자신을 달래기 위해 별 의미 없이 한 말들은 거대한 담론이 되어 다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을 형성한다. 가끔은 담당 여강사에게 “여자 능력 쓸모없다”라며 동의를 구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이다.

딸은 사회적으로 낮은 기대를 받기 때문에 성취가 나빠도 괜찮을 거다, 어차피 언젠가는 가정에 종속될 임시 노동력이기 때문에 ‘잘난 여자’가 될 필요는 없을 거다 따위, 이 말들은 남도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내 딸이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거라며 여학생에 대한 기대를 하향 평준화한다. “어차피 애 낳으면 다 똑같은데 적당히 (일·공부를) 하다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도 되지 뭐”라는 식의 말들이 세상엔 아직 너무 많다. 그런 말들이 딸의 설 자리를 어떻게 좁히는지 모두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기자명 해달 (필명·대입 학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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