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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 처절했던 어느 ‘돌멩이’의 삶

유동우씨는 1978년 참혹한 노동 실상을 다룬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펴냈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전민노련에 참여한 죄로 잔혹한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가 최근 민주인권 교육 길잡이로 나섰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9년 06월 27일 목요일 제6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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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태일은 한자투성이 근로기준법 법전을 붙들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노동 착취에 항거해 분신했다. 인천 삼원섬유 노동자 유동우는 전태일 열사를 이어 현장을 누비며 노동법 교육에 앞장섰다. 1978년 유씨는 참혹한 노동 실상을 다룬 자전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펴냈다. 이 책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1970년대 말 유신정권 시절 대표적인 금서였다. 반면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과 대학생 사이에서는 3대 필독서였다.

1979년 전두환 신군부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자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하 전민노련)에 참여한 유씨는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 활동으로 1981년 6월 체포됐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고문이 남긴 후유증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재판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상적인 생업이 불가능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집으로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리다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거리를 전전하는 노숙 생활도 했다. 그가 쓴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았지만 유동우라는 이름은 잊혀갔다.

ⓒ시사IN 이명익
유동우씨는 자신이 고문당했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올해부터 민주인권기념관 해설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유동우씨(70)가 최근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한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주인권 교육 길잡이로 나섰다. 6·10 항쟁 32주년을 맞아 유씨는 물론 박종철 열사 등이 고문당한 장소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 5층에서 그를 만났다.

유씨는 1949년 경북 영주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나무를 해다 팔면서 가족의 생계를 돕다가 열아홉 살에 상경했다. 첫 직장은 왕십리 천일섬유였다. 공장 생활은 지옥이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했지만 기술을 가르쳐주는 게 대가라면서 임금은 안 줬다. 매일 달랑 식권 두 장만 지급했다. 엄연히 근로기준법 위반이었지만 그때는 법이 있어도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두 달 만에 중곡동의 유림통상으로 일터를 옮겼다. ‘오야지(숙련공)’가 될 때까지 숙식만 해결해주는 조건이었지만 그게 어디냐 싶었다. 노동 착취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삶은 고달팠다. 영양실조와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출퇴근 시간도 없이 일하고, 밤샘 근무를 밥 먹듯이 해도 성과급도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이었다. 기계 부품 취급당하는 현실이 암담해 자살을 기도했다.” 약국을 전전하며 모은 수면제를 입에 털어넣었던 날, 그를 살린 건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이었다.

다윗의 ‘돌멩이’가 되기로 결심하다


유씨는 봉제공장 일을 접고 금은방 세공 보조로 들어갔다. 지방을 전전하며 금은세공 기술을 익힌 그는 돈을 모아 폐결핵부터 치료했다. 금은방 세공 일은 굶주림과 열악한 노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켜주었지만 마음은 늘 불편했다. 금은방은 계급 격차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부유한 이들에게는 사치의 장소였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식 결혼반지 하나라도 해주려고 본인 가락지를 긁어모아 들고 오는 곳이었다.

결국 1972년 다시 섬유공장으로 돌아갔다. 그의 인생에 분수령이 된 곳, 인천의 삼원섬유였다. “들어가 보니 3년 전과 달라진 게 없더라. 임금 체불에 근로기준법은 하나도 안 지키는 건 똑같았다. 특히 여성 노동자가 남성 중간관리자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 실신해 병원에 실려가도 아무 탈 없이 넘어가는 노동 현장에 절망했다.” 처음에는 유씨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대신 성직자를 꿈꾸며 통신신학교에 적을 두고 전도에 열을 올렸다. 전도하려는 그에게 공장 노동자들이 되물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면, 신을 접할 시간도 기회도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야 하는가?” “당신은 일요일에 교회를 갈 수 있나?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노동 현실이) 불가능하지 않냐?” 유동우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찾아갔다. 여기서 조화순 목사, 유흥식 선생 등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조화순 목사와 신앙관의 차이를 두고 자주 언쟁을 벌였다. 그러다 차츰 자신의 논리적 오류를 인정했고 기존 신앙관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럼 이제 뭘 할 것이냐.’ 그는 깊이 생각했고 깨달았다. 전도의 대상이던 이 땅의 노동자,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통신신학교를 그만두고 서점에서 노동법 관련 책을 구입해 공부했다. 한자투성이 책을 번역하듯이 공부했다. 이후 노동자 소그룹을 만들었다. 노동운동은 유동우에게 새 삶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유신체제에서 민주노조를 운영한다는 것은 자신을 던져야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삼원섬유는 100% 일본계 자본이 투자한 외자 유치 업체였다. 유신정권은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임시특례법으로 외국자본을 지켜줬다. 유동우가 삼원섬유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하자 중앙정보부(중정)가 주목했다. 그는 해고당했으며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엄혹한 토양에서 그는 더 큰 민주노조의 꿈을 키우고, 다윗의 ‘돌멩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살아온 일대기를 글로 썼다. 유동우의 이야기는 1977년 월간 <대화>에 연재됐다. 반향이 컸다. 이듬해 단행본 <어느 돌멩이의 외침>으로 출간되었다. 중정은 가만있지 않았다. “중정이 출판사에 전화해 금서로 만드니, 대학생들이 해적판을 만들어서 돌려 봤다. 일부 대학생들이 ‘돌멩이 인세’라며 수백 부에 해당하는 책값을 줬다.” 책 출판 후, 전국 곳곳의 노동 현장에서 그를 불렀다. 유씨는 가는 곳마다 노동자 단결을 호소했다.

ⓒ연합뉴스
2009년 7월 ‘학림사건’이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뒤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79년 10·26이 터져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무너졌다. 1980년 서울의 봄, 5월1일부터 3일까지 전국 노동운동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밤새워 토론을 벌였다. 인천에서는 유동우가, 광주·전남에서는 윤상원이 참석했다(<시사IN> 제612호 ‘형이 죽어간 곳에서 동생은 발길을 돌렸다’ 기사 참조). 이 자리에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이 결성됐다. “신군부와 싸우는 데 지역마다 준비해서 어느 한 지역이 붙으면 동시에 같이 일어나도록 준비해나가자고 약속했다. 윤상원은 내려가서 광주 5·18의 주역이 되었지만 우리는 결과적으로 약속을 못 지킨 죄인이 됐다.” 1980년 광주의 피바람을 목도한 민주화운동 진영은 격동했다. 윤상원 열사가 도청에서 산화한 뒤 유동우는 부채의식을 느꼈다. 군부에 대한 저항의 고삐를 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1년 8월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노동자와 학생세력이 연대해 현 정부(5공)를 무너뜨린 뒤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는 혐의로 노동자·학생 1000여 명을 검거했다. 경찰은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 민병두(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주동자 24명을 구속했다며 ‘학림사건’을 발표했다. 유동우도 포함됐다. 학림사건은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첫 모임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가진 데 착안해 경찰이 붙인 이름이다(학림사건 피해자들은 재심으로 2012년 대법원에서 전원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노숙, 대인기피증, 자살 기도


“두 눈을 가린 천을 풀어보니 사방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방이었다. 다짜고짜 ‘공산주의자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사회주의자네’라며 무차별 구타와 고문을 시작했다.” 유동우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 한 달간 경찰병원에 세 차례 실려 갈 정도였다. 집단 구타와 고춧가루 물고문을 당하며 갈비뼈 3대가 금이 가고, 치아 4개가 부러졌다. “법정에서도 소변을 줄줄 흘릴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을 보고 재판부가 들어가서 누워 있으라고 하더니 결국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출소 이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가난 탓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적·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 혼자 먼저 석방된 것에 대해 미안함·자괴감으로 괴로웠다. 환청에 시달리거나 자다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세상은 말없이 분주했고 견디는 것은 혼자 몫이었다. 게다가 1987년 구로구청 농성사건(13대 대선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져, 이에 항의하는 시민 등이 투표 장소인 구로구청을 점거한 사건) 때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였던 그는 또 한 차례 끌려가서 두 달 반 동안 징역을 살았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방에 혼자 있으면 누가 꼭 총을 들고 잡으러 오는 것 같아 수시로 집을 나가 서울역, 신촌 등지에서 몇 달이고 노숙을 했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극도의 대인기피증을 겪었다.”

길거리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다니자 아내가 정신과 치료를 권했다. 유씨는 ‘미친놈 취급하느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 딸이 강제로라도 입원시켜야 한다고 절규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아내와 딸마저 그의 곁을 떠났다. 가족은 해체되고 정신적 피폐함이 극에 달한 유씨는 2012년 들어서야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박종렬 목사 등 과거 민주화운동 동지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이화영 소장)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유씨는 개인 문제로만 여겼던 자신의 증상이 고문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화영 소장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여기서 일어서지 못하면 가해자인 전두환에게 깨지는 것이라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헤어진 아내와 딸을 찾았더니 받아주더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선으로 올해부터는 민주인권기념관 해설단으로 활동한다. 2017년에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민주화운동가 4명’에 포함돼 풋프린팅을 남겼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 나와 같은 많은 이들이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국가폭력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라고 말했다. “영악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잘 사는데, 어떤 이들은 자기 잘못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산다. 어울리지도 못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소리치지도 못한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혼자 잘 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가 지향했던 가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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