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 미드(미국 드라마) 한 편씩 보는 게 소소한 취미다. 요즘 보는 드라마는 〈슈츠(Suits)〉다. 무슨 일이든 자신만만한 대형 로펌 변호사와 뭐든지 한번 읽으면 달달 외우는 천재가 만나 종횡무진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벌써 9년째 롱런을 이어가고 있는 작품인데,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한 편씩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법정 드라마이지만 법정 풍경보다 더 재밌는 건 캐릭터다. 사실 내가 두 주인공보다 더 아끼는 조연이 있다. 독특한 외모와 취향이 콤플렉스인 ‘루이스 리트’는 항상 실수하고 뒤늦게 깨닫는다. 잘생기고 능력 좋은 주인공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그가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심리상담가다. 그는 전화기를 붙잡고 ‘세상에서 나만 이렇게 괴로울 거다’라며 신세 한탄을 하지만, 알고 보니 그가 질투하던 잘난 주인공도 힘들 때마다 자신의 심리상담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상담 신은 보다가 졸면 안 되는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데, 달라진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중요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시사IN 양한모
주연도 조연도 너나 할 것 없이 상담을 받으니 누군가 상담소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내가 본 대부분의 미국 드라마에는 심리 상담을 받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권태기를 겪는 부부나 교통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 불면증을 앓고 있는 사람 등 대상도 다양했다. 심지어 그들은 비슷한 경험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상담가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며칠 전 심리상담소에 간 적이 있다. 자신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 몇몇에게만 털어놓은 친구가 함께 상담소에 가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가기는 겁나고 무섭다고 했다. 상담소는 붐볐다. 진료를 잘 본다고 소문난 치과만큼이나 대기 줄이 길었다. 우리 옆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응, 나 안과야.” 아주머니는 익숙하게 말했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은행’ ‘외근’ 등의 얼버무린 단어를 속삭였다. 회사 업무 시간에 자신의 심리상담가와 통화하는 내 ‘최애’ 캐릭터 루이스 리트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미국이라서, 혹은 드라마라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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