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가 속한 8인조 걸그룹 러블리즈는 2014년 미니 앨범 〈걸스 인베이션(Girls’ Invasion)〉을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타이틀곡 ‘Candy Jelly Love’는 물론 음반의 전반적인 프로듀싱까지 음악가 윤상이 담당했다는 사실로 뜨거운 화제를 모으던 그때, 케이는 이미 시작부터 남다른 프로의 기운을 풍겼다. 하얀 피부에 가녀린 체형. 누가 봐도 대다수의 걸그룹이 지향하는 전형적인 ‘소녀’ 이미지에 그린 듯이 어울리던 그는 그러나 무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좀처럼 빈틈이 없었다. 마치 양의 탈을 쓴 맹수처럼 매 순간이 날카롭고 정확했다. 아직 열아홉이라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는 보는 이들에게 꽤 복잡한 감정을 전달했다. 그동안 지치지도 않고 소녀를 소비해온 대중과 미디어는 여전히 그들이 언제까지나 연약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며, 깜찍한 애교를 통해 위기 상황을 모면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케이는 그 모든 가치에 순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어떤 것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러블리즈의 꽃이라는 의미의 별명 ‘꽃케이’를 외치면서도 턱 아래 스스로 만든 꽃받침의 무게를 무대에서 증명해냈고,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애교 요청을 숨 쉬듯 해치우며 끝내 ‘애교 노동자’라는 별명을 얻어냈다. ‘애교 여신’이나 ‘애교 요정’이 아닌 애교 노동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흔한 애교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숨은 ‘이것이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성실히 해내고야 말겠다’는 프로로서의 노동의 가치가 빛을 발한 셈이다.
아이돌과 스타 산업이 지닌 어두운 이면과 결코 멀지 않은 거리에 있음에도 자꾸만 케이에게 눈길이 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프로라는 것을 잊지 않고 매사에 성실히 임하는 한 사람의 쌓여가는 하루를 바라보는 것.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거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위 사람들에게 늘 양보하는 성품을 지녔다거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스물다섯 살 김지연의 사소한 일상 습관들까지도 프로 아이돌 케이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준비된 모든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까지도 굳건히 MC 자리를 지키고 있는 KBS 〈뮤직뱅크〉의 첫 방송 날, 프로그램은 환영의 의미로 케이의 어린 시절을 편집한 영상을 내보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보아의 노래와 춤을 격렬히 따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여자아이는 이제 시간이 흘러 케이팝 신에서 ‘아련함’을 가장 잘 표현할 줄 아는 6년차 아이돌이 되었다. 단단한 실력은 지금도 충분하지만 오랫동안 품어온 그의 꿈을 양껏 담아내기에 아직 이곳은 너무 좁다. 케이만의 색깔과 야망을 담아낼, 그의 진정한 아이돌 2회차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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