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아빠가 옷을 고르며 “남자는 핑크지” 했다. 아이가 나무랐다. “그거 편견이야.” 얼마 전 휴대전화를 바꿀 때에도 이 말을 했는데 당시 아이는 시큰둥하고 나만 웃었다. 그렇다. 우리 부부는 은연중에 ‘성별 고정관념 뒤집기’라는 20세기형 의식과 실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씩씩한 여자아이를 격려하고 차분한 남자아이를 칭찬하는 식의. 21세기에 태어난 아이는 이미 그런 구분 자체를 넘어서 있는데 말이다. 내가 “그냥 아재 개그”라고 하자, 아이가 “아재가 무슨 죄냐”며 “솔직히 엄마 개그가 더 구리다”라고 덧붙인다. 쩝, 그래. 니 똥 굵다.

우리는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이들은 저만치 달려 나가고 있는데 뒤에 한참 처져서 헉헉대는 주제에 이렇게 자세를 잡으라는 둥, 저렇게 조심하라는 둥 잘 들리지도 않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건 아닐까.

ⓒ박해성
특히 성교육이나 젠더교육에서는 정말 분발해야 한다. 몇 년 전 어느 중학교 강당에서 애들을 모아놓고 성교육을 하다가 컴컴한 뒷줄에 앉은 아이들 사이에 추행이 일어난 적이 있다. 환경적으로 성폭력을 부추긴 셈이다. 그 뒤로 강당 등에서 단체로 진행하는 성교육은 많이 줄었고 영상을 시청할 때도 공간을 어둡지 않게 해놓는 것이 기본 상식이 되었다. 유아와 초등 저학년·고학년, 중학생, 고등학생에 맞는 교육 내용이 개발되어 있지만 가끔 현장에서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중학생이 애니메이션을 본다거나 고등학생이 구체적인 정보 없이 ‘내 몸을 사랑하자’ 등 좋은 얘기만 듣는 경우이다. 아이들은 지금 응급피임약의 효능과 구강성교의 부작용이 궁금한데 말이다. 일부 노력하는 교사들은 호르몬 교란과 감염 위험 등 생물 수업 방식에 기대 에둘러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학교도 고충이 있다. 피임 교육을 본격적으로 하면 성관계를 부추기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학부모의 ‘민원’도 부담스럽다. 실제 “우리 애는 순진한데 학교에서 성교육을 잘못 받더니 계속 이상한 상상만 하는 것 같다”라는 항의 전화가 오기도 한다. 같은 학부모지만 이럴 땐 친절한 콜센터 상담원이 되어드리고 싶다. “불편을 드렸군요. 이런 경우 많이 늦었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상상하길 도와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웃자랐으면서도 덜 자랐다. 연애를 하면 며칠 내로 스킨십을 해야 한다거나, 만나는 중 발기가 되면 꼭 풀어줘야 한다는 식의 그릇된 얘기를 믿기도 한다. 포르노에서 본 대로 성관계를 하려 들다 다치는 일도 있다. 편견을 넘어 각종 차별과 혐오 의식에 젖기도 한다. 인터넷과 또래 문화에서 주 정보를 얻은 결과이다.나이에 맞는 성·젠더 교육은 일종의 예방접종

초등 고학년 그룹 성교육 과정에서 몸캠 피싱을 다뤘다. 강사가 대처법을 묻자 여러 대답이 나왔다. “욕을 날려줘요” “당장 ‘현피 떠요’” “경찰에 신고해요” “엄마에게 말해요” 등. 강사는 그중 바람직한 대응으로 ‘부모님과 의논해요’를 꼽았다. 온라인 범죄에 노출되었을 때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양육자나 교사 등 가까운 어른과 의논하지 않고 혼자 끙끙대다 더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이유도 허탈하다. “혼날까 봐.”

성장기 발달에 맞는 실효적 성교육, 젠더교육은 일종의 예방접종과 같다. 면역을 길러주는 백신이다. 어떤 게 범죄이고 폭력인지 인지를 해야 대응할 수 있다. 주체성을 가져야 자기를 지키고 상대를 존중할 수 있다. 평소 아이들과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요즘 시대, 요즘 아이들에게 맞는 개념과 내용을 장착하자. 배우고 연구하고 말하자. 아이도 어른도 성적으로 순진한 건 결코 미덕이 아니다.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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