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후죽순 임시방편으로 지어진 집들은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었다. 많을 때면 한 달에 1000명 이상이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의 국경을 이루는 나프강을 건너왔다. 제멋대로 어깨를 겯고 선 지붕과 골목 사이에서 맨발로 뛰놀던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낯선 이를 마주한 아이가 미소를 보내왔다. 구체적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그들이 박탈당한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지고 싶었다.

지난 5월19~23일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쿠투팔롱 로힝야 난민촌을 방문했다. 2017년 12월에 이어 1년6개월 만이다. 정씨는 2014년부터 유엔난민기구 활동을 하며 매해 네팔·남수단·레바논·이라크·지부티 등을 다녀왔지만 같은 장소를 다시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장준희방글라데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쿠투팔롱 난민촌이 있다.
미얀마군의 무차별 학살과 폭력으로부터 도망친 로힝야 난민이 이곳에 산다.


국내에는 로힝야 난민이 처한 위기를 주의 깊게 살피며 개입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이양희 유엔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이다. 2003년부터 10년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과 위원장을 역임해온 이 교수는 2014년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에 자원했다. 아동권리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미얀마 내 135개 소수민족에 대한 군부의 탄압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특히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결혼과 출산, 교육, 이동의 자유 같은 기본권 역시 보장되지 않았다. 미얀마는 1982년 아예 시민권법을 개정하며 로힝야족을 국민에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지우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로힝야족 상황이 가시화되기도 했지만, 전 세계가 이들의 존재를 좀 더 또렷이 알게 된 건 2017년 8월25일 이후부터다. 방글라데시로 향하는 피난 행렬의 규모와 속도에 모두가 놀랐다. 당시 미얀마 당국이 정한 작전명은 ‘Clearance Operation’. 로힝야족이 주로 살던 북부 라카인주 여러 지역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총격과 파괴, 성폭력과 방화가 자행됐다. 그해 11월 국경없는 의사회가 콕스바자르 현장에서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를 근거로 사망자를 따져보면 2017년 8월25일~9월24일에 최소 9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5세 미만 아동도 최소 730명이 살해당했다. 미얀마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는 400명이었다.

라카인주에는 아직 약 40만 명의 로힝야족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국제기구의 접근은 차단된 상태다. 이 교수는 2018년 3월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회의에 ‘미얀마 인권 실태보고서’를 제출하고 인권침해 증거를 수집하기 위한 독립기구 설치를 요구했다. 이 교수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2018년 9월부터 62명의 조사관이 로힝야 학살의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고 있다.

〈시사IN〉은 5월28일 정우성씨와 이양희 교수의 만남을 주선했다. 낯선 타인의 고통을 직접 마주해왔던 두 사람의 답변은 넓고 깊었다. 로힝야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한국 사회로 돌아왔다. 한 사회가 ‘우리 밖의 난민’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우리 안의 난민’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누더기가 된 ‘인권’은 눈물로 얼룩져 있지만, 그래서 더 크고 단단한 원칙이 될 수 있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인권이 보장될 때, 인간의 존엄도 비로소 무게를 갖는다.

 

ⓒ시사IN 조남진이양희 유엔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왼쪽)과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5월28일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두 분 모두 두 차례 이상 난민촌을 방문했다. 현재 상황이 궁금하다.

이양희:쿠투팔롱 난민촌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촌이다. 2014년 이후 6개월에 한 번꼴로 방문할 때마다 캠프가 점점 커지는 게 눈에 보인다. 지평선 너머까지 지붕이 빼곡하다. 난민촌 면적이 약 14㎢인데, 거주하는 난민 수는 91만명이 넘는다. 그중 대다수인 74만명이 2017년 8월 미얀마 라카인주에서 벌어진 로힝야족 대량 학살 이후 피신한 사람들이다.

정우성:경기도 성남시(면적 141.72㎢) 인구가 약 94만명이라고 하면 쿠투팔롱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할지 짐작할 수 있을까. 현지에서 만난 난민 대다수가 여성이고 어린이였다. 가족과 이웃의 죽음을 목격했고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였다. 사람들은 미얀마와 로힝야족 사이 역사적 악연과 앙금을 이야기하면서 이 사태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려고 하는데, 그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마치 ‘너희의 고통은 어쩔 수 없어’라는 말처럼 들린다.

미얀마 내에서는 ‘로힝야’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알고 있다.

이양희:미얀마에서 나의 입국이 불허된 시기도 2017년 8월경부터였다.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에서 만났던 세 살쯤 됐을까 싶은 아이가 자주 생각난다. 무릎에 앉혔더니 양손으로 무언가를 토막 치는 손짓을 했다. “우리 아빠를 ‘이렇게’ 했다”라고 말하더라. 폭력을 목격한 것도 폭력 피해와 똑같은 상흔을 남긴다. 개인적으로는 미얀마 입국을 금지당하고 나서 오히려 더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됐다. 미얀마에 입국하면 못 가는 지역도 많고, 미행당하고, 떠나고 나면 사무실을 뒤지거나 하는 일이 항상 일어났다. 콕스바자르에 자주 가는 이유도 가장 최근까지 미얀마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줄었다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에 1000명씩 넘어왔다. 현지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다.

정우성:쿠투팔롱 난민촌에서 로힝야족을 처음 만났을 때 처참했다. 내가 2014년부터 유엔난민기구에서 활동하며 만났던 난민들은 마지막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난민촌에 살지만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서 국가 재건에 이바지하고, 아이들도 그 나라에서 기여할 거라는 기대가 있다. 그런데 로힝야족은 달랐다. 누구도 다시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양희:미얀마로 돌아가 봤자 난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얀마 당국이 로힝야족이 살았던 곳마다 불을 놓아 다 갈아버렸는데, 2014년에 법을 바꾸면서 ‘불이 난 지역 땅과 집과 논밭 모든 것은 정부에 귀속된다’라고 못 박아버렸다. 더 기막힌 건 아예 지역이나 마을 이름을 바꿔버린다. 로힝야족이 ‘내가 ○○에 살았다’고 말해도, ‘찾아봐라, 지도에 없잖아’ 해버리는 거다. 미얀마에 135개 소수민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로힝야족에 대한 핍박이 가장 심하다. 영국에서 독립할 때 돕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인종 청소를 정당화한다. 군부 최고 책임자가 공공연히 말한다. “로힝야는 아직 청산되지 않은 일(unfinished business)이다”라고. 2017년 8월 학살 이전부터 미얀마는 로힝야족을 꾸준히 핍박해왔다. 방글라데시로 피난 행렬이 시작된 것도 1990년대부터다. 1982년에 시민권법을 개정하면서 NVC (National Verification Card·국적증명카드)를 발급했는데 로힝야족에게는 아예 발급조차 안 해줬다. NVC 없이는 병원도, 학교도, 일터에도 갈 수 없다. 그렇게 난민촌으로 흘러들어와 태어난 사람도 50% 가까이 되는 걸로 안다.

난민 중에도 여성과 아동 난민이 겪는 차별과 억압은 이중적이다. 가장 긴급히 지원되어야 하는 건 무엇인가?

정우성:쿠투팔롱 난민촌에 있는 난민 중 55%가 18세 미만 아동·청소년이다. 초등교육 적령기에 있는 아동이 44만명이고, 고등교육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을 합하면 52만명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정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점이다. 미얀마에 살 때는 로힝야를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육 기회가 없었고, 이주해온 방글라데시에서는 지역 주민과의 마찰을 우려해 허가를 안 하고 있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친구들은 아무래도 자기 민족이 받았던 탄압에 집중하게 되고, 그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양희:내가 요즘 방글라데시 정부와 요원해진 것도 교육 문제 때문이다. 난민촌 아동·청소년에게 교육과 취업 기회를 줘야 한다고 하니까 “그건 네 권한이 아니다”라고 하더라. 교육을 못 받으면 콕스바자르 자체가 커다란 ‘화약고’가 될 수 있다. 그게 콕스바자르만의 문제일까. 중동의 IS 문제가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었나? 예전처럼 국경이 의미 있는 시대가 아니다. 버려지고 잊혀진 세대를 전 세계가 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정우성:보통 오후 4시30분~5시에 난민 캠프 외부인은 모두 떠나게 되어 있다. 도로 상황도 나쁘지만 가로등이 없어서 해가 지면 다닐 수가 없다. 여성들이 안전 문제로 밤에 다니기는커녕 화장실도 못 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캠프 내부에 로힝야 자치 커뮤니티가 여럿 결성돼 운영되고 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인 여러 활동을 한다. 전력 공급이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태양열을 이용한 가로등을 일부 지역이나마 설치하는 식이다. 실은 워낙 방대한 규모의 지역이다 보니 가로등 설치에도 엄청난 예산이 든다. 이미 대규모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책임으로만 맡겨둘 수 없는 상황이다.

이양희:지난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 미얀마 상황을 보고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쿠투팔롱 난민 두 명과 함께했다. 남성은 한 자치구에서 지도자이고, 여성은 동료들과 함께 캠프 내 여성 5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그들이 경험한 성폭력과 인신매매 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했다. 난민촌에 갈 때마다 NGO의 조력이 아닌, 자치적으로 생겨나는 조직들이 참 보기 좋더라. 우려되는 게 최근 방글라데시 정부가 난민 캠프를 둘러싸는 철조망을 설치하거나 섬으로 이주시킨다는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그게 해결책일지….

정우성:난민 문제가 장기화되다 보니 궁여지책으로 나온 대책 같다. 방글라데시도 그렇지만 지금 난민을 보호하고 수용하고 있는 국가 8할이 인접 지역의 최빈국이다. 그 나라와 국민들이 난민에게 보여준 관용을 우리가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세계 언론이 유럽으로 넘어오는 난민에 대한 뉴스를 주로 다루다 보니 이런 현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오해도 생긴다.

 

ⓒ유엔난민기구(UNHCR) 제공정우성 친선대사는 5월19일부터 23일까지 쿠투팔롱 난민촌을 방문했다. 2017년 12월에 이어 두 번째다.


이양희:맞다. 국제사회가 사실 할 말이 없다. 방글라데시가 지금 어느 나라도 못하는 자비를 베풀고 있다. 100만명 가까운 난민이 있다는 건 치안을 비롯한 각종 문제가 다 방글라데시 책임하에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산을 깎아 난민촌을 만들면서 훼손된 생태계 복원이 언제,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게 결국 미얀마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국제사회가 충분히 압력을 넣지 못하고 있다.

정우성:보통 난민촌이 형성되는 지역은 그 나라에서도 빈민들이 생활하는 외곽 지대다. 그런 지역에서 대규모 난민을 장기간 수용했을 때 난민에게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다. 식수나 땔감 같은 자원을 나눠야 하는 선주민과도 갈등이 생긴다. 혜택이 지역 주민에게 돌아갈 수 있게끔 지원이 실행되어야 한다. 난민촌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거나 옷가지 같은 현물을 보내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는데, 마음은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현금 지원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가능한 한 필요한 물품을 캠프 주변에서 구입해서 쓰는 게 원칙인데, 이를 통해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고 주민들이 좀 더 우호적으로 난민을 바라보게 된다.

난민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특히 걱정되는 사항이 있다면?

이양희:다행히 지난해에는 큰 피해 없이 우기를 지나갔지만 올해는 어떨지 모르겠다. 정치적 해결이 지연되면, 인도주의 차원의 지원이라도 꾸준히 이뤄져야 하는데….

정우성:우기와 장마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게 토양 자체가 비가 내리면 쓸려 내려가는 흙이다. 그래서 나무도 심고 풀도 심는 ‘플랜트 프로젝트’를 하고는 있는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양희:대규모 난민이 몰려온 초창기에는 응급지원에 급급했지만, 이제부터는 지속적인 프로그램이나 서비스 지원이 들어가야 한다. 대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지은 집이라 2년을 채 못 넘기더라. 2018년에는 국제사회가 약속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졌는데 올해는 예측이 안 된다.

정우성:사태가 장기화될수록 점점 잊혀가기 때문에 모금액이 줄 수밖에 없다. 어떤 긴급 모금도 100% 달성되지는 않더라. 비극이 재생산돼야 도움이 그나마 도착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게 이분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이양희: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나 내전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난민촌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단순히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유엔 에이전시 사람들한테 장기 계획(long term planning)을 세워야 한다고 하면 다들 까무러치니까, 요즘은 ‘조금 더 긴’ 계획(longer term planning)을 세우자고 당부한다.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강제력 없는 ‘성명’ 정도다.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이양희:미얀마 양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안 가면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우성:친선대사 활동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남수단 난민촌에 방문하면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멀리서 꼬마가 막대기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더라. 가까워지면서 보니까 그게 막대기가 아니라 소총이었다. 저 꼬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차량이 국제기구 차량이어서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까…. 아무 일 없었지만 여러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다.

이양희:문제가 발생한 뒤에 성명이 100개 나온들 뭐가 중요하겠나. 답답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으로서 기본적인 의무 외에도 실제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려고 한다. 내 임기가 내년 3월까지인데, 지난해 9월 미얀마 사태를 조사하는 독립기구를 하나 출범시켰다. 유엔이 2600만 달러(약 305억) 예산을 배정해 훈련받은 62명의 조사관과 2년간 로힝야 학살의 증거와 증언을 수집한다. 조사·분석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ICC로 가져갈 예정이다. 근데 ICC의 한계가 고위 책임자만 다루게 돼 있다. 실제 학살을 저지른 사람은 처벌하기 어렵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게 회복적 정의인데 실제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서는 가해자 처벌이 확실히 이뤄져야 한다. 별도의 지역 재판소를 열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

정우성:피해 당사자의 직접적인 증언을 수집하는 건 무척 중요하고 큰일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최초 증언을 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나.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 문제를 해결하도록 국제사회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이양희:미얀마 정부의 최고 화두가 경제개발이다. 인권에 입각한 경제개발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미얀마 정부가 국제사회에 자꾸 ‘라카인주 멀쩡하다, 안전하니 투자하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나 기업도 사람들을 몰아내고 지은 기반시설이라는 걸 유념해야 한다. 미얀마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한 번씩 나에게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온다. ‘한국 기업이 큰 건물을 지었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네가 있는 한국이 이렇게 무분별하게 들어올 수 있어?”라고 묻는데 할 말이 없다. 미얀마 내 다른 지역도 충분히 많은데 굳이 문제가 있는 지역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EPA이양희 유엔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이 지난해 3월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서
미얀마 인권 실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우성:동의한다. 미얀마 정부와 정치적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건 방글라데시도 아니고 국제기구도 될 수 없다. 결국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속한 인접 국가와 아세안의 대화 상대국인 한국이 함께 로힝야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확대해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한국 정부나 기업이 미얀마가 원하는 경제개발을 제공하되 반인권적 행위에 대해서는 투자할 수 없다는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미얀마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양희:미얀마도 비준한 유엔 아동권리협약의 일반논평 16호를 보면 ‘아동 권리에 대한 기업 부문의 영향과 관련된 국가의 의무’가 있다. 기업의 투자가 지역 아동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현재로서는 미얀마가 협약을 형식적으로만 비준하고, 다 위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이에 대해 전혀 관여를 안 한다. 로힝야 이슈가 잊히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정우성:잊고 싶다고 잊히는 문제가 아니다. 난민 문제는 유기적이라 문제가 꼬리를 물고 돌고 돈다. 결국 국제사회 전반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할 거다. 절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난민 문제로 홍역을 앓았던 한국 정부가 흘려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다.

이양희:한국인들이 예멘인에게 배타적 태도를 보였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한국은 불과 70여 년 전 전쟁으로 국민 대다수가 난민(국내 실향민)이었던 나라다.

정우성:제주 4·3 전후로 일본으로 건너간 분들도 난민이고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상하이 임시정부도 난민 정부다. 난민을 비롯한 인권 문제가 정치적 이해에 따라 해석되면 안 되는데, 아직 한국은 그런 부분을 조심스러워한다. 지난 정부들이 이런 문제를 정치 문제로 쟁점화하고 활용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여파 탓인지 마땅히 정부가 나서서 보호해야 하는 순간에도 미온적 태도와 움직임을 보일 때면 안타깝다. 한국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많다고 느끼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여러 조정이 필요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양희:난민 문제도 그렇지만 성소수자 문제도 그렇다. 차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동성애 조장’으로 해석된다. 유엔 아동권리협약 비준할 때를 안 떠올릴 수가 없는데, 여러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권리를 주면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말했다(웃음). 아직 어느 나라도 아동권리협약 때문에 망하지 않았다. 선을 긋고 너는 이쪽이냐 저쪽이냐 따져서는 안 되는 문제들이 분명히 있다.

정우성:우리는 난민을 막연하게 나와 다른 어떤 대상이나 집단으로 규정짓는다. 난민은 그저 어려움에 속해 있는 개인이다. 저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보고, 듣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먼저였으면 좋겠다. 이번에 쿠투팔롱에서 한 할머니 댁을 방문한 기억이 난다. 모녀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와 함께 사는 여성이 ‘남’이라고 했다. 그 여성의 남편이 총살당하는 걸 할머니가 목격했는데, 그 상황에서 그 여성을 ‘딸’로 보호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서 함께 피난 왔다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 하나의 상황이나 에피소드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게 인간의 삶 아닌가. 지난해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때도 보면, “왜 핸드폰을 갖고 있어? 왜 나이키 운동화를 신어?”라고 비난했다. 내가 지금 집에서 피난을 가야 하는데 나 같아도 나한테 필요한 것 중에 가장 절실하고 좋은 걸 챙길 것 같다. 그런데 난민 하면 ‘다 헐벗고 못 살아야 우리가 너희를 도울 수 있다’라고 관계 설정을 미리 해버린다.

이양희: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사회가 건강할 수 있겠나.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동정이 아닌 동지애를 가졌으면 좋겠다. 법적으로는 ‘난민’ 지위가 필요해서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일상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한국인은 다 그래!” 이런 말 되게 싫지 않나.

정우성:단시간에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거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다른 생각도 충분히 존중한다. 그저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솔직하게 말할 뿐이다. ‘먹고사는 일에나 충실하라’고 하는데 배우는 시민이 아닌가? 배우이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공감을 포기해야 한다면, 차라리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게 낫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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