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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기자’가 예멘 난민을 취재하다

제주도에 온 예멘인들은 새 삶을 얻는다는 ‘희망’에 들떴다가 일도, 집도, 돈도 없이 난민 인정도 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다. 심지어는 가족과 생이별해 ‘슬픔’ 속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제주·이스마일 알쿠블라니 (전 <올라> 기자)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6월 18일 화요일 제6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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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출입국·외국인청은 2018년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인 500여 명 가운데 단 두 명만 난민으로 인정했다. 두 사람은 모두 언론인으로 예멘에 있을 때 후티 반군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서 살해 위협을 받았다. 이스마일 씨(31)는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예멘 수도 사나에 있는 신문사 <올라>의 기자였다. 내전이 격화되던 2015년 8월6일 <올라>는 문을 닫았다. 이날 <올라> 신문사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언론인들이 위험에 빠져 신문 발행을 중단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이 페이스북 페이지의 마지막 포스팅이었다. “독자 여러분께 반복해서 사과드립니다. 우리의 깊은 사랑과 슬픔으로.”

이스마일 씨가 쓴 기사 2000여 개 중 후티 반군과 관련된 기사는 7개에 불과하지만 후티 반군은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 집을 떠나 가족, 친구, 지인과 연락을 끊고 1년6개월간 숨어 지내던 그는 2017년 예멘을 빠져나왔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뒤에도 그는 제주도에 머물고 있다. 그와 달리 난민 심사에서 탈락해 단순 불인정 결정을 받은 예멘인 56명 중 55명(한 명은 자진 출국)은 아직 제주도에 발이 묶여 있다. <시사IN>은 이스마일 ‘기자’에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예멘인에 대한 취재를 부탁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난민으로서의 삶도 써달라고 제안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I’m glad to help(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시사IN 이명익
예멘에서 기자로 할동했던 이스마일 씨(아래)는
난민으로 인정된 예멘인 두 명 중 한 사람이다.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은 유수프 씨(25)는 2018년 4월30일 제주도에 왔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학하며 의학을 공부했던 유수프 씨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안정적인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이제는 메스를 잡았던 손으로 채소(무)를 가공한다. 그마저도 얼마 전에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금식과 일을 병행하기가 어려웠다. 5월6일부터 2019년 라마단 기간이 시작됐다. 한 달가량 이어지는 라마단 기간에 무슬림들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하루 12시간 이상 금식을 하게 된다.

인터뷰를 위해 5월19일 유수프 씨를 만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커피숍에서도 그는 별도의 음료를 주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멘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유수프 씨는 예멘 전쟁의 원인을 ‘무지’라고 말했다. 예멘은 아라비아반도의 7개국 중 유일한 공화국이었지만, 과학 발전 속도와 교육수준이 낮아서 평화를 지키지 못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감정을 추스를 겸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유수프 씨가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걱정되어 화장실에 가보니 탈진한 듯 기운이 빠져 있었다. 아이스초코 한 잔을 권했다. 이번에는 유수프 씨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수프 씨는 제주에서 보낸 1년을 ‘천국과 지옥’이라고 요약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에요. 특히 거주 기간 연장 허가를 받을 때 그래요.”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은 예멘인은 3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취업은 할 수 있지만 비자 기간이 짧아 업체에서는 난색을 표한다. 예멘에서의 전공과 능력을 살리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난민 인정을 받은 나조차도 내가 몸담았던 분야인 언론계에서 일을 구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 난민 심사가 완료된 이후 많은 예멘인이 한국 내 다른 지역으로 떠났지만 나는 제주도에 남기로 결정했다. 제주도 내의 이주민·난민 지원 단체에서 아랍어와 영어 통역을 돕고 있다.

5월19일 제주시청 앞마당에서는 5월20일 제12회 세계인의 날을 앞두고 ‘다른 생각, 같은 우리’를 주제로 ‘제주 다민족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세계인의 날은 한국인과 재한 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재한 외국인 처우 기본법’에 근거해 2007년 처음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제주시청 앞에는 축제 기간에 임시로 다문화 거리가 조성됐고, 흰 천막으로 지어진 부스마다 각국의 음식을 판매하느라 북적였다.

ⓒ시사IN 이명익
5월19일 ‘제주 다민족 문화제’에서 난민 불인정 예멘인들을 취재하는 이스마일 씨(오른쪽 두 번째).

누르 씨(28)가 일을 끝내는 시간에 맞춰 함께 다문화 거리를 방문했다. 그는 제주시내 한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한다. 지난해 5월9일 제주도에 온 누르 씨도 한국으로부터 ‘거부당한 난민’ 중 한 사람이다. 누르 씨 역시 무슬림이라 라마단 기간을 지켜야 하지만 자신의 신앙과 한국 생활을 맞춰가는 중이다. 나 역시 집안의 전통에 따라 무슬림으로 길러졌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종교를 갖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우리는 다문화 거리의 터키 부스에서 케밥을 사서 나눠 먹었다. 속이 든든하니 마음도 덩달아 느긋해졌다.

“한국인과 우리 사이의 장벽은 언어뿐”

누르 씨는 제주도에서 보낸 1년을 세 기간으로 나눴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두 달 반 정도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어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기대 말이죠. 한국에 일과 이동의 자유가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고통이 시작됐어요. 일도, 집도, 돈도 없는 와중에 난민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세 번째 기간인 것 같아요. 호텔에 임시로 청소하는 일자리를 구했지만 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누르 씨가 슬픔에 빠진 건 가족 때문이다. 난민에게 보장되는 권리 중에는 가족 구성원이 재결합할 수 있는 수단과 편의를 제공받을 권리인 ‘가족 결합 원칙(principle of the unity of the family)’이 있다. 하지만 누르 씨가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11개월 된 아들 술탄, 아내 파티마 씨(21)와 한국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됐다.

바레인 국적인 파티마 씨는 미국 유학 중 홀로 술탄을 낳았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미국이 예멘인 입국을 금지하면서 누르 씨는 아내와 아들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파티마 씨는 술탄과 함께 친정이 있는 바레인으로 갔지만, 아들 술탄이 미국 국적자라 바레인에서 안정적인 체류가 어려웠다. 바레인에서 미국 국적자의 비자 기간은 최대 3개월이다. 3개월에 한 번씩은 바레인을 일단 떠나야 한다. 국적이 모두 다른 세 식구가 함께 살 수 있는 최선의 장소는 한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르 씨가 받은 난민 불인정 결정 통지서에는 사유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우자와 자녀의 국적국에서 안정적 체류가 가능해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해 불인정한다.’

유수프 씨와 누르 씨처럼 젊은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계획할 수 없고, 삶의 지속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특히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질식할 것만 같은 예멘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희생되는 대신 살아남기로 결정했다. 예멘 난민 불인정자들의 희망은 한국 정부와 법이 그들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누르 씨는 한국 정부에 불인정자들의 서류를 다시 꼼꼼히 심사해달라고 호소했다. “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인도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해주시길 고대합니다. 한국인들은 평화롭고 공존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장벽은 언어뿐입니다.”

‘그곳(예멘)’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한국에 입국한 이후 1년간 나는 안전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내 삶은 완벽하게 다른 세기(Century)를 지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튀니지에서 출발해 2011년 아랍을 뒤덮은 ‘아랍의 봄’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예멘 역시 비껴가지 않았다. 2011년 2월 예멘에서도 아랍의 봄이 시작됐다. 나는 이 혁명을 이끄는 주요 청년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나와 동료들의 요구는 매우 간단했다. 우리는 부패와 폭정 대신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자 위험이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시사IN 이명익
지난해 6월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 ‘무사증 입국’한 예멘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취업설명회.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랍어로 시를 쓰던 나는 작가를 꿈꿨다. 출판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소설도 4편이나 완성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랍의 봄을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저널리즘에 눈을 떴다. 내가 가진 재능으로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을 기록하고 예멘인이 겪는 고통을 전달했다. 혁명이 끝나고 2014년 후티 반군이 예멘을 장악하기 전까지 이 활동은 내 삶의 대부분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자 생활을 접어야 했다. 후티 반군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저널리스트와 미디어 전문가를 위협했다. 혁명은 내전으로 귀결됐다.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12개국과 ‘아랍 연합’을 결성해 전쟁에 개입했다. 내전은 국제전으로 확대됐고, 더 복잡해졌다.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인도적 체류 허가도 못 얻은 56명의 삶

2015년은 내 평생 가장 위험한 해였다. 당시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경험한 모든 일을 글로 다 쓸 수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예멘 내 모든 언론이 ‘망했다’는 것뿐이다. 당시 예멘 내 언론사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폐간하거나, 완전히 후티 반군의 편에 서거나. 결국 나는 예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힘겨운 결정이었다. 지금도 한 번씩 그때의 끔찍한 시간을 꿈에서 만난다. 예멘을 떠나 아르메니아와 말레이시아에서 1년3개월을 보내는 동안 비자 문제로 예멘으로 돌려보내질 거라는 공포에 떨었다.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33조 1항은 ‘추방 또는 송환의 금지’를 보장하고 있지만 나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두려움의 덫에 빠졌다. 다시 한번 결정해야 했다.

2018년 5월5일 배낭 하나만 멘 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친구도, 희망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었다. 그저 안전하길 원했다. 나는 제주공항에 도착한 유일한 예멘인이 아니었다. 그해 4월과 5월 사이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예멘인 500여 명이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제주도로 왔다. 우리의 불투명한 운명은 난민 신청서를 제출한 후에야 분명해졌다. 나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한국의 세련됨과 교양 속에 섞이고 싶었다. 우리와 관련해 퍼지기 시작한 온갖 루머와 부정적인 뉴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주에서 내가 만난 한국인들은 내가 여전히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우리를 돕기 위해 앞장섰던 한국인들이 보여준 환대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새삼 가르쳐주었다.

결과적으로 나를 포함해 오직 2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412명은 인도적 체류 허가 지위가 주어졌다. 인도적 체류가 허가된 예멘인 대부분이 일자리를 찾아 제주도를 떠났다. 56명은 그마저도 얻지 못하고 단순 불인정됐다.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은 난민법상 신원 보호를 위해 이유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중 5명은 출국 명령을 받았고, 한 명은 자발적으로 한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부모와 함께 불인정 결정을 받은 어린이 5명도 포함되어 있다. 제주도 이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는 이들은 제주도에 발이 묶인 채 재심사를 준비 중이다. 한국의 난민정책을 존중하고 한국 정부와 법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단순 불인정 결정을 받은 이들은 안전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불안하다. 최선을 다해 옥죄어오는 불안과 심리적 압박을 견뎌내고 있다. 나는 아르메니아에서 집필을 시작한 다섯 번째 소설을 계속 쓰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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