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공군의 비행교관으로 활약했고 이후 곡예비행사로 이름을 날린 클라이드 팽본은, 부조종사이자 그의 재정적 지원자이기도 했던 휴 헌든과 함께 세계일주 비행 신기록 수립에 도전하기로 한다. 둘은 ‘미스 비돌’이라는 이름이 붙은 붉은색 벨란카 스카이로켓 기체를 몰고 뉴욕 공항을 이륙했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 신기록은 물 건너가고 만다. 중간기착지인 하바롭스크에서 착륙 도중 기체가 손상됐다.
그렇다고 항공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겠다는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기체를 수리하며 시베리아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일본 아사히신문사에서 최초의 태평양 횡단비행에 상금 2만5000달러를 내걸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리가 끝나자마자, 이들은 일본으로 기수를 돌렸다. 불운은 끝이 아니었다. 착륙할 때 기록을 위해 일본 상공에서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해군기지가 찍혔다. 입국 서류도 미비해 이들은 감옥에 갇히고 만다.
바퀴 떼어내고 해변에 동체착륙 감행
이들은 태평양을 횡단하는 비행을 하러 왔다고 납득시켜 1000달러 벌금을 내고 풀려난다. 이들에게 주어진 이륙 기회는 단 한 번. 만일 실패하면 미스 비돌은 당국에 압수되고 팽본과 헌든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오로지 한 번뿐인 기회를 살리기 위해, 둘은 연료 적재량을 늘리는 등 대대적인 비행기 개조에 착수했다. 무게를 줄이려고 낙하산과 구명조끼를 싣지 않은 것은 물론 무전기마저 떼어냈다. 심지어 둘은 구두도 신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해도 과연 미국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에, 결국엔 착륙용 바퀴까지 떼어낼 수 있도록 구조를 변경했다. 해변 모래사장에 동체착륙을 감행하겠다는, 어찌 보면 무모한 계획이었다.
1931년 10월4일 오후 2시, 미스 비돌은 힘겹게 아오모리현의 사비시로 해안을 날아올랐다. 세 시간쯤 지나 비행기가 안정되었다고 생각될 무렵, 팽본은 계획대로 바퀴를 떼어버렸다. 눈앞엔 구름 덮인 바다만 아득히 이어졌다. 쉼 없이 8850㎞를 날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이것은 린드버그에 의해 이뤄진 대서양 횡단비행보다 약 3200㎞가 더 긴 거리였다. 비행기가 북극권에 근접하자, 구두도 신지 않은 조종사들의 발에 감각이 없어졌다.
이륙한 지 40여 시간 뒤, 미스 비돌은 미국 시애틀 상공에 도달한다. 착륙 역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상공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팽본의 고향인 위내치 해변으로 향했다. 날이 흐린 경우가 별로 없는 데다, 설혹 구름이 끼어 있다 하더라도 눈 감고도 착륙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미스 비돌은 모래사장에 긴 미끄럼 자국을 남기며 내려앉는 데 성공한다. 기수가 모래에 처박혀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기체 손상은 최소에 그쳤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기록에 걸려 있던 상금의 일부밖에 받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이들의 마지막 불운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한 채 고향 땅을 밟은 것만으로도 가지고 태어난 운을 다 써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태평양에 도전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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