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의 확장 속도는 놀라웠다. 지중해에 연한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대를 평정하고 기독교권까지 퍼져나갔다. 유복자로 자랐고 글조차 모르던 선지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이렇게 파장을 일으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척박한 사막 한구석에서 시작된 종교가 제국 로마의 기독교와 겨루며 이토록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독교권은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존 종교와 신흥 종교가 맞부딪친 힘의 충돌이 일어났다. 일련의 충돌은 십자군 전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미증유의 성장을 보여준 이슬람의 힘을 설명하는 가설이 제법 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는 원인 중 하나로 ‘통전성(integrity)’을 이야기하곤 한다. 절대자 하나님(Allah)이 한 분이니 그의 속성으로 말미암은 통일성과 완전성이 이슬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슬람은 유일신 사상을 가장 앞에 내세우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슬람의 신앙고백 ‘샤하다(Sha hada)’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임을 선언하고 있다.
 

ⓒEPA5월17일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습으로 파괴된 예멘 수도 사나의 한 마을 모습.

샤하다는 단순히 신이 한 분이라는 뜻만 나타내는 소극적 선언이 아니다. 우주 만물이 유일신 사상 ‘타우히드(Tawhid)’의 질서에 의해 완벽하게 다스려지고 있다는 적극적 신의 통치와 섭리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물이 절대자 한 분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믿는 이 신앙은 초기 이슬람의 결속력을 이끌어냈다. 교리체계의 단순함도 한몫했다. 단순하고 쉬운 데다 결속력까지 강했으니 빠른 속도의 전교가 가능했다.

규모가 커지고 믿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생각과 입장은 다양해지고 갈리기 마련이다. 신념이 강할수록 작은 논쟁으로도 갈등의 골이 깊어지지 않던가? 문명권 내부의 분파 갈등 역시 만만찮은 분쟁의 요인이 된다. 이슬람도 예외는 아니다. 여전히 궁극적인 ‘이슬람 움마 공동체’로 똘똘 뭉쳐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갈라진 단층선들이 보인다. 이슬람 내 분파의 흐름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종파 논쟁, 정통 논쟁, 그리고 이슬람 성법 논쟁 등이다. 각각 수니와 시아, 정통파와 신비주의, 그리고 샤리아 4대 법학파 간의 역학관계로 이어진다.

7세기 초 정통 칼리프 시대에 갈라진 수니와 시아는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다. 공동체의 권력을 누가 승계할 것인가로 시작된 다툼이었다. 아들이 없었던 선지자의 후계 문제는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다. 선지자의 사위이자 조카인 알리의 계보를 통한 혈연 승계를 주장하던 세력이 오늘의 시아파다. 특정 혈통을 중심으로 모이다 보니 소수일 수밖에 없다. 선지자의 유지에 따라 합의 추대를 주장했던 세력이 수니파의 원류다. 이슬람에 편입된 다양한 부족들을 중심으로 한 이들 그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다. 종파 간에 선명한 단층선이 존재한 것도 아니었다. 대개 섞여 살았다. 통혼도 잦았다. 숫자는 압도적으로 수니파가 많았다. 수니파가 90%를 상회하고, 시아파는 10% 미만이었다. 소수 시아파는 수니파가 주류인 공동체에서 굳이 갈등선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이란과 이라크 등 시아파의 본산인 곳에서는 시아파 신학의 이념과 투쟁 노선이 선명했고 반감을 공공연히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 57개 이슬람협력기구(OIC) 회원 국가 중 종파 간의 갈등을 심각하게 경험한 사례는 많지 않다. 어디든 소수인 시아파는 타키야(Taqiyah·수니파인 것처럼 위장하며 수니 공동체에서 살아가도 괜찮다는 시아파의 지침)의 교리를 전승하기도 했다. 종파 정체성에 따라 중동 지역의 갈등이 오래도록 형성되었다고 보는 역사적 견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AP Photo2015년 8월3일 야지디족 여성들이 ‘IS의 신자르 지역 침입·학살 1주기’ 행사에서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 최근 중동에서 종파 분쟁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격돌 때문이다. 수니파의 대표를 자임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시아파 신정체제의 본산인 이란 간의 갈등은 전형적인 종파 싸움이다. 양대 강국의 싸움은 인근 국가에서의 대리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리아와 예멘 내전은 종파 분쟁 성격을 띤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의 변종인 알라위파(Alawites)로 이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다. 예멘의 후티 반군 역시 시아파의 한 갈래인 다섯 이맘파로 이란과 협력관계로 알려져 있다.

지역 패권 차지하려고 종파 동원

역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이란이 이라크-시리아-레바논 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아파 벨트(Shiite belt)를 구축하고 나섰다는 게 사우디의 시각이다. 이란의 국시인 이슬람 혁명의 전파가 시아파 벨트를 타고 가시화되면 절대왕정 체제인 사우디 등 걸프 왕정은 체제가 흔들리게 된다. 이에 맞서 사우디는 수니파 정체성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막대한 오일달러의 힘과 이슬람 종주국의 우월성을 앞세워 수니파 국가 규합에 나섰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종파’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지역 패권을 다투는 두 나라가 싸우는 과정에서 종파가 동원된 것이다. 사우디와 이란은 어쩌다 보니 수니와 시아를 대표하는 나라였고 자연스럽게 힘을 모으기 위해 종파 동원에 나선 것이다. 어떻든 수니 연합과 시아 연합의 갈등은 중동을 반분하며 전반적인 지역의 진영론을 만들어냈다. 이 종파 진영은 중동 곳곳에서 비극적 내전을 견인하고 있다.

거대 종교, 특히 교리체계와 예전 전통이 확고한 유일신 종교는 늘 정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종교라 해도 정통파의 완고한 교리에 도전하거나 뭔가 삐딱한 습속을 전수하는 무리들을 경계하곤 했다. 이슬람에도 정통파와 살짝 어긋난 조류가 있었다. 이슬람 신비주의, 이른바 ‘수피즘(Sufism)’이다. 이슬람은 본래 신비주의만은 강하게 배격해왔다. 특히 수니파는 율법을 내세워 좀 더 경건하고 엄숙한 전통을 강조하다 보니 초월적 경험을 추구하는 어떤 시도도 금기시했다. 수피즘 조류를 견인한 이슬람의 일부 지도자들은 인간의 심성을 포착하여 독특한 제의를 내세우며 신비주의를 확산시켰다. 이들은 신과의 합일, 성자들의 경험, 그리고 의식과 제례를 중시했다. 경전을 치열하게 읽어나가며 사유하는 종교 행위보다는 경험과 직관을 더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는 전체 무슬림 인구의 1% 내외에 불과하다. 소수다. 이들의 신비 체험과 몽환적 제의는 여전히 무슬림들에게 매력적이다.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수피는 당시 정통을 내세우는 이슬람 신학자들에 의해 일부 박해를 받았다. 때론 이단으로 몰려 처형까지 당한 사례도 전해진다. 특히 18세기 수니파 근본주의 와하비즘(Wahabbism)은 수피를 극도로 미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나름대로 이슬람 내 주요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단 논쟁은 많이 희석되었고, 독특한 문화적 전승을 지키면서 이슬람의 다양성을 품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AFP PHOTO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 돔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정통파 주류 이슬람에서 인정했다고는 하나 수피즘은 늘 갈등의 내연(內燃)성을 안고 있다. 알카에다나 IS류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가장 좋은 먹잇감은 정통에서 벗어나 응징을 구실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수 세력이다. 수피즘류의 신비주의나 교리를 살짝 변형한 소수파 교단을 표적으로 삼아 이단 논쟁을 일으키며 공격과 살상을 부추기기 쉽다. 신비주의적 성격을 갖는 야지디(Yazidi)에 대한 IS의 학살과 성폭력은 반인륜적 범죄의 대표적 사례다.

이슬람은 정교일치를 지향한다. 세상의 모든 통치행위는 절대자의 교훈과 법도를 반영해야 한다. 정교분리를 지향하는 기독교의 영역 주권과 정교일치의 이슬람이 신봉하는 통전성 원리는 대척에 있다. 정교일치의 이슬람은 통치를 위한 핵심 기제로 성법(聖法)을 내세운다. 샤리아(Shariah)다. 유력한 지도자가 절대 권력을 구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샤리아 통치를 지향한다. 샤리아 통치에도 종파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다. 시아파의 경우 이맘(Imam·이슬람 지도자)의 전권 통치를 지향한다. 자연스럽게 강한 위계 구조를 갖고 있다. 다수파인 수니의 경우 경전의 해석을 수평적으로 인정하는 편이다. 시아파와 같은 위계 구조 대신 지역별로 자율적인 샤리아 해석 전승에 따라 정치 문화가 만들어졌다.

소수파는 폭력 세력의 좋은 먹잇감

문제가 있었다. 7세기에 기록된 경전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현재 맥락에 맞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즉 21세기의 현대적 맥락과 조응하지 않는 옛 서사로 인해 경전과 현실 사이에 이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경전과 현실의 격차를 앞에 놓고 해석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기제가 바로 마드합(이슬람 법학파)이다.

샤리아 법의 원천(root)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먼저 가시적인 법의 원천 둘이 있다. 거룩한 경전 꾸란(Quran·코란)과 선지자의 언행록 하디스(Hadith)다. 객관적인 경전의 영역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랜 사유 훈련과 경전 탐구를 통해 이슬람의 본령을 잘 이해하는 성직자들의 주관적 영역이 있다. 키야스(Qiyas·유추)와 법학자들 간의 이즈마(Ijma·합의)다.

불변의 경전을 앞에 놓고 주관적인 해석과 논의를 통해 법을 만드는 프로세스다. 여기서 보수와 중도 및 진보적 판단이 갈린다. 보수적일수록 경전에 매달리고 유추와 합의 영역을 배척한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일수록 경전 문구 자체보다는 폭넓은 해석에 방점을 둔다. 이 전통에 따라 법학파가 형성되었고, 이슬람은 지역에 따라 양태와 성향을 달리하게 된다. 위계질서가 강한 시아파는 대략 하나의 학파로 수렴한다. 수니파는 크게 네 개의 학파로 나뉜다. 학파에 따라 꾸란과 하디스를 해석하는 방향과 행태가 다르다.  

전통적 보수 노선을 견지하는 학파가 바로 한발리(Hanbali) 학파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적 입장이다. 한발리는 철저하게 경전에 치중한다. 유추와 합의, 즉 주관적 해석을 경계한다. 오직 꾸란과 하디스에 기록된 내용을 신봉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경전을 왜곡하는 못된 습성이 있으므로 할 수 있으면 문자대로 살아내야 한다고 본다. 당연히 극도로 보수적이며 완고한 통치 이념으로 나타난다.

한발리와 거리가 먼 조류는 말리키(Maliki) 학파다. 모로코,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등 대부분의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이 조류를 따른다. 경전을 중시하면서도 유추와 합의를 강조한다. 현대 생활에 해석이 애매한 상황에 처할 때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진보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법의 주관적 원천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학파가 하나피(Hanafi)파다. 주로 터키 이슬람이 이 그룹에 속한다. 말리키가 구전의 전승에도 무게를 실어주는 반면, 하나피는 상대적으로 성문법적 전통을 강조하는 편이다. 두 학파는 사안에 따라 조금씩 보수적, 진보적 해석으로 엇갈리긴 하나 대개 유연한 편으로 평가받는다.

보수 전통의 한발리와 상대적으로 열린 말리키, 하나피 사이의 법학파가 하나 있다. 샤피(Shafi)파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법학파다. 보수적인 부분이 많은 편이지만, 때로는 가장 파격적인 진보 성향의 법 해석도 나온다. 예를 들어 딸에 대한 재산상속을 가장 먼저 허락한 법학파다. 주로 동남아시아권의 국가들이 샤피파에 속한다. 최근 진보적 해석이 많아지는 추세다.

이슬람 성법의 해석과 판단을 다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들 법학파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문제는 이슬람이 정치화되면서부터 법학파의 판단은 지역별 이슬람 습속을 규정하는 범주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9·11 이후 이슬람이 구체적 정치 이념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샤리아가 폭력적 지하드를 합리화하는 쪽으로도 해석되었다. 단순히 보수와 진보 논쟁이 아니라 극보수의 성향으로 점차 수렴되는 경향성이 나타났다. 아직 종파 분쟁만큼, 또는 이단 숙청 논쟁만큼 폭력성이 불거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악화되고 있다. 와하비즘에서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자신들의 극보수성에 동의하지 않으면 폭력으로 제거해도 된다는 해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타크피리(Takfiri)들이 나타난 것이다. 알카에다보다 더 폭력적인 IS류의 극단주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이슬람 종교정화 운동을 운운하며 온건 무슬림들을 공격하고 있다. 앞으로 이슬람권 내부의 갈등 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은 하나의 공동체처럼 보인다. 15억 무슬림이 모두 메카를 그리워하고 하루 다섯 번씩 예배를 드린다. 라마단 금식에도 함께 동참하고 빈민들에 대한 구휼도 공동으로 나선다.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갈라진 금들이 많이 보인다. 종파 분쟁, 정통성 논쟁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법 해석 갈등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대개 이슬람과 유대-기독교의 전선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같은 신앙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발견되는 미세한 차이가 오히려 내부적 폭력성을 증폭시키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와 이슬람권의 싸움에서 발생한 희생자보다 유대-기독교권 내부 갈등과 전쟁의 희생자들이 월등히 더 많다. 이슬람도 비슷한 경로로 가고 있다.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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