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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는 지금도 돌고 있다

최직경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27일 월요일 제6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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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걷다 보니 2차선 도로의 가드레일에 꽂혀 돌아가는 노란색 바람개비가 보였다. 오후 2시쯤 버스에서 내려 진영시외버스터미널부터 한 시간 남짓을 걷고 난 뒤였다. 걸었던 길의 양옆으로는 공사 현장이나 공장이 즐비했다. 보도블록은 기대도 할 수 없었고, 좁은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화물차들을 피해 걷느라 끊임없이 주위를 살펴야 했다. 5월 중순을 넘어 여름으로 꺾어지는 계절의 아스팔트 도로는 뜨거웠고, 이마엔 더위 때문인지 식은땀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맺혔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는 건, 한 시간조차도 쉽지 않았다.

평일임에도 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기억 속을 걷고 있었다. 함께 온 아이에게 그분에 대해 얘기하는 젊은 부부, 한참을 굳어진 표정으로 수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중년 남자, 박석에 쓰인 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조심스레 묘역을 걷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 난 가드레일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태우며 그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 이제 막 파래지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자리한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있다. 바위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흐릿해져가는 것을 막을 방법을 나는 10년이 되도록 찾지 못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묘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쉽지 않아 더 걷기로 했다. 기념관도 많고 그를 떠올리게 할 물건들을 파는 가게도 있다. 라면이나 막걸리를 팔며 자리를 지키는 식당도 보였다. 난 쫓기는 사람처럼 어디에도 들어가질 못하고, 아무도 없는,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찾아 걸었다. 갓길에 주차된 차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걷고 나서야 혼자가 됐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가드레일 아래로 흐르는 도랑이 전부였다. 거의 말라가는 물을 보며 내년에는 결코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사IN 조남진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앞둔 5월12일 봉하마을을 찾은 시민들이 묘역 앞을 지나고 있다.

누군가를 상실한 것이 동력이 되어 말해지는 희망은 늘 달갑지 않았다. 이모티콘이나 짧은 글로 기억을 되새기는 것은 손쉬운 제스처로 느껴졌고, 그분의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는 여전히 어떤 힘이고 상징이자 근원이기까지 했다. 많은 이들은 그를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워했지만, 난 묻고 싶었다. 10년 전 그때로부터 우리는 아직 한 발자국도 못 뗀 건 아니냐고. 그리고 고백해야 했다. 난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어느새 해는 산을 넘어 논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은 조금 차가워지고 주위는 더욱 고요했다. 그분을 누구보다 사랑했을 사람이 당분간은 이곳을 찾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했다. 그는 누군가를 잃지 않고도 얘기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그때 기분 좋게 반겨달라고 했다. 반드시 기억하고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 당시 그의 말에 느꼈던 고마움일 것이다.

터미널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해가 지고 있는 덕분인지, 길이 조금 익숙해진 것인지 땀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가드레일 너머 넓게 펼쳐진 푸른색 논과 나무들을 보며 걸었다. 나와 그 풍경 사이에, 노란색 바람개비는 계속해서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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