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은 ○○○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이야(송영선 전 의원).”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2004년 6월 공연한 ‘환생경제’라는 연극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내뱉은 막말 중 하나다. 최근 다양한 막말로 입길에 오른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각종 사건·사고를 어떤 근거도 없이 ‘북한 소행’으로 몰아붙이던 중 뇌물 시비로 제명된 송영선 전 의원, 그리고 심재철 의원, 박순자 의원 등 쟁쟁한 정치인들이 출연했다. 자칭 정치 풍자극인 ‘환생경제’에서 무능한 가장인 ‘노가리(노무현 대통령을 빗댄 배역)’는 둘째 아들 ‘경제’의 사망(사인은 이른바 ‘후천성 영양결핍’) 이후에도 소주병이나 들고 다니며 허송세월한다. 서민으로 분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가리에게 성적 모욕이 포함된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결국 저승사자가 경제를 환생시켜주는 대신 노가리를 데려가기로 한다. 연극에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거론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객석에서 즐겁게 관람 중이었다.

ⓒ연합뉴스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신년 특별연설(위)에서 “상품 수출 국가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본투자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한국 경제가 이미 죽었다’라는 믿음을 유포하는 데 열중했다. ‘경제 파탄’이란 유행어도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경포대’라고 불렀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란 의미다. 이런 시도는 상당한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은 최근 한국 경제를 ‘경포대 시즌 2’라고 부르는 중이다. 그들이 환생시키고 싶은 것은 경제가 아니라 ‘경포대 프레임’일 터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경포대’였을까? 그의 대통령 임기(2003~2007) 동안 경제지표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노 대통령 취임 1년차인 2003년 한국 경제의 실질성장률은 시원치 않았다. 2.9%다. 비교적 인식되지 않고 있는 사실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또 하나의 대규모 금융위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취임했다. 전임 김대중 정부는 금융제도 자유화 및 경기 부양 차원에서 신용카드 규제를 크게 완화했다. 카드사들은 고객의 상환 능력도 제대로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카드를 마구 발급하며 시장점유율을 높이려 했다. 신용카드 사용금액 한도도 크게 늘렸다. 2002년 말 카드 빚을 못 갚아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인구가 300만명에 가까웠다. 신용불량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민간 부문이 빚으로 쪼들리면 소비를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투자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전개되면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임자(김대중)와 마찬가지로 집권과 동시에 경제위기부터 수습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신용카드사 종합대책’을 시행하면서 신용불량자는 집권 2년차인 2004년 4월(380만여 명)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해 경제성장률은 4.9%로 회복되었다. 임기 말인 2006년과 2007년엔 각각 5.2%와 5.5%를 기록했다(아래 〈표〉 참조). 노무현 대통령 집권 5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을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4.5%다.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2%에서 3%대 초반으로 유지했다. 거시경제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03~2007년의 한국 경제를 ‘파탄’이라 불렀던 자유한국당 계열의 대통령들은 어떤 성적을 거뒀을까?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2008~2012)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2%, 박근혜 대통령 재임 기간(2013 ~2016)의 그것은 3.0%에 불과했다.

수출 실적 역시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동안 굉장히 가파르게 치솟았다. 전해 대비 수출 증가율이 평균 18.2%에 달했다. 덕분에 수출액이 2006년엔 3000억 달러를 돌파한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동안 연평균 수출 증가율은 9.14%다. 2011년엔 수출액이 5000억 달러를 넘긴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 4년 동안엔 수출 실적이 전해보다 평균적으로 2.14%씩 줄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 임기 마지막 연도인 2016년의 수출액은 5000억 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부동산도 선방한 편, 양극화 문제엔 ‘고전’

주가지수는, ‘경포대’로 불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엄청나게 뛰어올랐다.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620대였던 코스피 지수가 2007년 말에는 1900 선까지 올라갔다. 2002년 말 기준 1200억 달러 규모였던 외환보유액(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말엔 89억 달러)이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할 당시에는 2600억 달러 규모로 2배 이상 증가했다(35쪽 〈표〉 참조).

 


물론 이런 경제지표만으로 노무현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경제를 훨씬 잘 운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국가경제의 전반적 상황은 해당 시기 정부의 경제정책은 물론이고 외부 환경으로부터도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국내에서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을 추진해도 해외 국가들의 경기가 좋지 않으면 수출을 크게 늘리기 힘들다. 더욱이 경제가 고도화되고 그 규모가 커질수록 성장률은 낮아진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임기 5년 동안의 한국 경제가 1인당 국민소득 1만4000달러(2003년)에서 2만3000달러(2007년)로 증가하는 등 사실상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4.5%의 경제성장률을 “경제 파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보다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시기의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경포대’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도 경제 부문에 관한 한 자신감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2007년 1월 신년 연설에서 그는 재임 기간에 “세계시장에서 조선 1위, 반도체 3위, 전자 4위, 자동차 철강 5위를 점유하는 등 우리 주력산업이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4% 이상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OECD에서 7위 정도의 성적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각 당의 차기 대선 주자들은 ‘경제 대통령’을 자처하며 ‘나는 경제를 잘 알아요’를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유의 말투로 이에 대응했다. “분명한 것은 경제를 아는 어떤 대통령도 5%를 훌쩍 넘는 성장을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말하는 차기 주자들이 성장률을 얼마로 공약하는지 지켜볼 것입니다(실제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시 7%를 공약했다).”

이런 노무현 대통령 역시 두 가지 주제에서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부동산과 양극화였다.

임기 동안 부동산에 대한 그의 입장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부동산만은 잡겠다”에서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로 바뀌더니 2007년 초에는 “부동산, 죄송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올라서 미안하고,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한 번에 잡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통계수치로 살펴보면,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동안 집값이 다른 정권에 비해 많이 올랐다. 한국감정원 〈전국주택가격 동향조사〉에 따르면, ‘전국 주택가격 상승률’이 2003년 5.7%, 2004년 -2.1%, 2005년 4.0%, 2006년 11.6%, 2007년 3.1%였다.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4.5%다(취임 연도의 첫 2~3개월은 임기에 넣고, 퇴임 연도의 첫 2~3개월은 빼서 계산했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대통령 임기 동안의 ‘전국 주택가격 상승률’을 계산해보니, 연평균 기준으로 노태우(1988~1992) 8.7%, 김영삼(1993~1997) 0.1%, 김대중(1998~2002) 3.5%, 이명박(2008~2012) 2.7%, 박근혜(2013~2016) 1.6%였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동안의 상승률이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보다 높고 노태우 정부에 비해서는 낮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 주택가격이 크게 오를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 사정이 있다. 2000년대 초 IT 거품이 폭발한 이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기준금리를 대폭 낮춰 경기를 부양하면서 글로벌 차원에서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늘어난 유동성 중 상당 부분이 부동산에 투자되어 전 세계적으로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이런 거품이 터진 것이 바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다. 이후 글로벌 부동산 시장은 안정기 혹은 침체기로 들어섰다. 2008년에 전 세계를 덮친 불황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부동산 거품이 어느 정도의 깊이와 넓이를 가졌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한국 경제 역시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에 본격적으로 포섭되면서 외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체질로 바뀌어 있었다.

‘토지+자유연구소’ 남기업 소장은 OECD 자료에서 2003~2007년(노무현 정부) 24개 회원국별 주택가격 상승률을 조사했다. 주택가격이 가장 크게 오른 나라는 유럽의 덴마크(1위)였다. 상승률은 무려 53.8%(물가인상률의 영향을 배제한 실질치). 이 밖에도 뉴질랜드(2위)는 51.9%, 프랑스(4위) 46.1%, 스웨덴(6위) 44.2%, 미국(16위) 15.3% 등이다. 한국의 주택가격은 9.3% 올랐는데, 24개 국가 중에서 순위는 18번째였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비교적 주택가격이 덜 오른 편이라는 이야기다. 일본·독일·포르투갈·아일랜드 등은 주택가격이 오히려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당시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던 나라들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2003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취임식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집값 상승에 부동산 대출 규제와 공시지가 현실화, 보유세 부과 등으로 대처했다. 이 정책들은 ‘경제 파탄’을 주장하던 세력의 반발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으나 점차 한국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개입하는 기본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경기 부양으로 치우쳐 부동산 시장의 과열을 방관했다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한국 경제에 1997년 외환위기에 비견할 만한 충격을 가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동산과 함께 괴로워했던 문제는 양극화였다. 당시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김창호씨는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직후 〈시사IN〉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이) 가장 가슴앓이 했던 것이 바로 양극화 문제였다. 양극화란 것은 전 지구적 현상이다. 한 나라의 정부 처지에서는 해결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양극화가 참여정부 시기에 심화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부른 속내는, 이 문제에 만족스러운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짙은 회한이다(〈시사IN〉 제90호, ‘과거의 썩은 다리로 미래의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기사 참조).”

통계청이 제공하는 지니계수(0에 가까울수록 평등,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를 보면 당시의 양극화 경향이 확인된다. ‘도시 2인 이상’ 가구 기준으로 지니계수는 1990년 0.266에서 1995년 0.259로 떨어진다. 1990년대의 상반기에는 한국 사회가 더욱 평등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2002년에는 0.293까지 올라간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는 0.316으로 증가했다.

5분위 배율(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 소득으로 나눈 수치. 클수록 불평등) 역시 1990년대 초·중반 3.8~3.9 수준이었지만, 외환위기 이후인 2002년에 4.77로 높아진다. 2007년에는 5.79까지 올라간다.

문제는 양극화가 단기적으로 속 시원하게 해결될 수 있는 의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온 지구화와 정보화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양극화다. 양극화를 피하기 위해 지구화·정보화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전임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국가경제의 붕괴를,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에 한국을 더 깊이 편입(=개방)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내세운 미국 등 서방 선진국의 요구이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전엔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도 국내 대기업의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없었다. 재벌 일가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한국 대기업 주식의 매매에 대한 규제를 철폐(자본시장 자유화 및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미국 등 선진국 금융자본에 한국 대기업 주식 거래를 통한 금융수익 추구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한국의 자본시장 관련 제도가 글로벌 표준과 비슷해지면서, 그만큼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한국 경제의 편입 정도가 심화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요구를 받아들여 건국 이후 가장 파격적인 시장자유화와 개방 조치를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그 자유화와 개방은 자본시장뿐 아니라 서비스와 노동까지 포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진보 진영은 김대중 대통령을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한다.

다만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흐름 가운데 어떤 측면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통적 의제와 일맥상통한다. IMF가 요구한 자본시장 개혁은 결과적으로 재벌 일가의 영향력을 줄이게 된다. 마침 한국 민주화운동 역시 재벌 일가를 정경유착의 원흉이자 민주화의 적으로 공격해왔다. 적어도 당시의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손잡을 수 있는 경제적·정서적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지구화는 양극화의 심화를 의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각종 복지제도의 강화와 신설로 지구화를 보완했다. 극빈층을 위한 국민기초생활법을 제정하고 4대 보험의 적용 대상을 넓혔다.

노무현 “개방을 통해 경쟁력 키워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의 길’을 따라갔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유화와 개방은 외세로부터 강요받은 측면이 있었다. 구제금융을 받아 국가부도를 피하려면 개방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노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개방해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그에 따르면,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우리 시장은 닫아놓고 남의 시장만 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칠레·싱가포르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데 이어 아세안(ASEAN)·캐나다·중국·유럽연합(EU), 나아가 미국과 FTA 협상을 추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개방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고도화, 즉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제조업에 이어 금융산업, 교육, 의료 같은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을 발전시키는 전략이기도 했다. 2007년 신년 특별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금융·물류 허브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상품 수출 국가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본투자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금융 같은 첨단 서비스업을 국내에서 발전시키려면 “개방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또한 개방을 통한 국가발전 노선을 성공시키려면 국내 시장을 글로벌 표준에 맞춰 더욱 공정하고 자유롭게 바꿔야 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미 FTA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노무현 경제의 지향점’(〈한국경제포럼〉 제5권 제1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를 세계사의 흐름에서 균형자 이론으로 접근했다. 조선 세종 때 우리는 대륙 세력인 중국과 함께 해양 세력에게 문을 닫았다. 결과는 임진왜란과 일본의 식민지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를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의 균형자 입장에서 파악하고 추진했다.”

‘노무현의 경제 파탄’을 주장했던 세력은 지금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좌파 반시장주의’ ‘반미 종북’ 같은 딱지를 붙인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 건국 이후 가장 강력한 수준의 시장 자유화와 개방, 심지어 대륙 세력(중국)으로 경사되기 쉬운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말과 선동이 아니라 정책으로 승부한 것은 재임 시절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을 통한 경제발전만으로는 ‘민생(양극화 문제 해결)’을 챙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듭해서 “경제만 좋아진다고 민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구화된 경제의 발전 자체는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것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만 발전시키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양극화도 해결된다’는 당시와 지금의 ‘경제주의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다만 양극화를 피하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을 수는 없다. 지구화와 정보화에서 이탈할 수도 없다.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는 복지제도가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다. 복지는 사회적 자원의 낭비가 아니라 ‘사회투자’였다. 그의 말처럼, 집이 없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건강하지 않으며 안정된 직장도 없고 직업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 연수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나라의 경제가 경쟁력이 있을 수는 없다. 더욱이 그가 한국의 미래 전략산업으로 꿈꾼 첨단 서비스업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제조업에서보다 훨씬 중요하다.

복지 분야 예산 연간 20%씩 늘려

 

ⓒ연합뉴스노무현 대통령(가운데)이 2006년 8월30일 ‘비전 2030 보고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복지 분야 예산을 연간 20%씩 늘렸다. 기초생활보장 관련 지출이 2002년 2조8000억원에서 2007년에는 7조3000억원까지 증가한다. 특히 보육 예산이 5배로 늘어났다는 것은 ‘사람(해당 아동과 그 부모)에 대한 투자’를 늘려 생산성을 키운다는 사회투자라는 용어와 상응한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이 2002년 4.8%에서 2007년 7.12%로 껑충 뛴다. 재정 중 복지지출 비율은 2002년 20%에서 2006년 28%로 높아졌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복지의 난점’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보육 복지가 생산성 증대로 이어지려면 해당 아동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연금 보험료를 납부하는 사람들은 수십 년 뒤에야 그 혜택(연금급여)을 받는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 조치도 마찬가지다. 그 기간에 어떤 정치세력은 ‘세금을 낭비한다’며 복지제도를 파탄시키려 들 것이다. 혹은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해 재정 문제를 도외시하며 복지 혜택만 늘리겠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공적 지위에 있는 자가 자신의 사적 이익(정치적 인기)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배신하는 ‘대리인 문제’다. 결국 복지와 그 재정은 장기적 관점에서 계획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기묘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한다. 당시로부터 머나먼 미래인 2030년까지의 장기 국가발전 전략을 짜서 제시한 것이다. 2006년에 발표된 ‘비전 2030’이다. 목표는 2030년까지 GDP 4만9000달러, 국가경쟁력 10위(당시는 29위), 삶의 질 10위(당시 41위),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21% 등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개방과 시장자유화, 복지, 재정지출 계획을 ‘비전 2030’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노무현 경제의 지향점〉에서 “비전 2030은 당시 ‘저주받은 걸작’처럼 외면당하고 조롱받았다”라고 썼다. 비전 2030의 운명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제안한 대연정의 운명과 같았다. 한국 정치인들은 ‘비전 2030’에 포함된 대통령의 선의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특히 ‘경제 파탄’ 프레임을 내세운 이들은 비전 2030이 공공사회지출의 증가를 제시한다는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을 포퓰리스트로 몰았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정치적 인기 폭락을 무릅쓰면서까지 복지 재정 문제에 덤벼든 것은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예컨대 국민연금은 1988년 ‘보험료율 3%-소득대체율 70%’ 체제로 시작했을 때부터 ‘재정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입자 소득의 3%를 받는 대신 그 70%를 연금급여로 지급’하는 시스템이라면, 결국 세금이나 후세대가 부담해야 하는 몫이 커지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인들은 보험료율을 높이자거나 소득대체율을 낮추자고 말하지 못한다. 인기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정작 굵직한 국민연금 재정 개혁을 시도한 대통령은 둘밖에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소득대체율을 60%로, 노무현 대통령은 40%로 내렸다. 물론 인기는 폭락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든, 적어도 사적 이익을 위해 공공 이익을 배신하는 ‘대리인 문제’에서는 자유로웠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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