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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전 광주 그날의 기록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9년 05월 22일 수요일 제6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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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77)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당시 광주 대동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5월18일부터 항쟁에 직접 가담해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이 학살되기까지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당시 계엄 당국은 나를 전남대, 조선대 시위 주동 학생들을 의식화시킨 불온 교사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항쟁 지도부로 나서지 않고 시내 골목을 누비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샅샅이 보고 듣고 메모했다.”

5월18일 계엄군인 공수대원들은 시내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학생과 시민을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머리를 가격했다. 공수대원들은 대학생들을 잡아 옷을 벗기고 무자비하게 구타했으며, 추격을 피해 고층건물로 도망치다 뛰어내린 대학생도 보았다. 또 계엄군은 사람이 쓰러지면 즉시 연막탄을 뿌려 상황을 은폐한 뒤 차에 싣고 갔고, 일부 시체에는 페인트를 칠해 시민들이 확인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5월19일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됐다고 현장에서 메모했다.
ⓒ시사IN 이명익


5월27일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는 박석무 이사장을 지명수배했다. 6월5일까지 광주에 숨어 있던 그는 서울로 은신처를 옮겼다. “당시 신군부는 광주항쟁의 배후가 김대중씨라고 짜 맞춰놓고 그와 내통한 비밀 주동자로 나를 점찍었다. 내가 잡히지 않자, 다급해진 신군부는 정동년씨를 주동자로 만들어 5·18에 관한 새 그림을 그렸다.”

도피하던 박 이사장은 어차피 잡히면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죽기 전 광주의 진실을 밝혀두고자 광주에서 겪었던 모든 기억과 현장에서 적었던 메모를 200자 원고지에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1980년 6월15일 원고지 140장 분량의 광주 체험기록이 완성됐다. 그는 ‘5·18 광주의거-시민항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이라는 제목이 달린, 39년 전 빛바랜 원고 뭉치를 기자에게 건넸다.

“이 기록 사본을 5·18재단이 운영하는 기록관에도 전달했다. 광주항쟁 기간 계속 시위에 참여하면서 보고 듣고 만나서 접한 온갖 소식과 상경 후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진실만 기록하려 했다.”

박석무 이사장은 1980년 12월23일 신군부에 붙잡혔다. “애초 1995년에 공개하려고 했지만,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라 정치적 의도로도 여겨질 수 있다는 고민에 지금까지 보관만 하고 있었다.” 박 이사장은 “국회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꾸려져 활동에 들어간다면 빛바랜 이 기록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아래는 박석무 이사장이 1980년 5월 당시 기록한 원고입니다.


5·18 光州義擧
- 市民抗爭의 背景과 展開過程 -



머리말
 
  1980년 5월 18일 새벽, 선잠결에 뉴스를 통해 흘러나온 ‘계엄령 전국 확대’소식은 10·26 이후 가느다란 한국정치의 봄볕에 모진 눈보라를 뿌려주는 슬픈 비보였지만, 여기에 무릎을 꿇고 말면 이 나라 이 민족은 영원히 군부독재의 쇠사슬에 묶이게 되고,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보장의 꿈은 사라지고 말리라는 울분을 뜻있는 국민의 가슴속에 출렁이게 했다. 그리고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온 국민들의 착잡한 심정은 집권층에게 당했던 그 어느 때의 배신감보다도 그 농도가 짙었고, 이럴 수 있느냐 라는 기막힌 탄식을 억누를 수 없게 해주었다.

  3월과 4월의 평화로운 학내토론과 시위를 통해서 학원의 자율화 및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던 대학생들의 논리정연한 주장은 5월에 접어들어서는 학원 내에서 한걸음 나아가 조국이 처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모순을 지적하기 시작하였고, 정치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차근차근 마련하던 영구집권의 음모가 송두리째 폭로당해버려, 최규하와 전두환 일당의 과도정권은 순리적인 방법으로는 자기들의 흑심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의 무자비한 탄압음모가 마련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계엄확대요, 民主人士의 검거요, 북괴를 빙자한 사회소란의 불안제거라는 유신잔당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대학생 및 민주인사들의 너무도 당연한 요구를 깔아뭉개는 폭거였으며, 이 나라 전 민중의 바램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그들 나름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안보, 사회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의 권력 장악일 뿐이었다.

  학내의 주장에서 학원 밖으로 농성시위를 전개하던 전국의 대학생들은 전국 대도시의 시가를 메우기 시작하였고, 계엄 해제, 전두환 사임, 민주정부 수립의 일정단축, 노동권보장, 민주농정 구현, 언론자유 보장, 학원의 자율화 등 구체적인 국민의 바램이 학생들의 구호 속에 타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국민이건 학생이건 어느 누구인들 사회불안과 소요를 명분 없이 원할거며 바라겠는가. 대학생들의 절도있는 행위와 시위를 하기까지의 자제에 대해서 모든 국민들이 찬탄을 마지않았던 것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한다. 국민의 뜻으로 국민이 원하는 바대로 개헌작업을 진행하고 정권이양을 준비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그리고 과도정부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나름대로 자제할 줄 알았었다.

  5월 15일 서울의 수십만 대학생 데모가 평화적으로 끝을 맺고 다시 정상수업으로 들어가며 정부에 적절한 조치를 기다리는 아량을 베풀었고, 5월 16일의 5·16 화형식을 겸한 광주의 횃불데모가 정부 측의 답변을 기다리며 무사히 끝날 때까지도 학생이나 국민 모두는 납득할 수 있는 정부의 답변에 귀를 기울이려는 심정이었다. 그 무렵의 보도나 소식통들도 중대한 조치, 국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발표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라는 식의 청천벽력 같은 계엄확대와 국민 탄압의 가중을 초래한 발표를 하였으니 그게 바로 5·18 광주시민의 의로운 피의 항쟁이 불가피한 역사의 진행이었다.

  결론적으로 10·26 이후 국민적 요망에 따라 유신독재의 가면을 벗기고 박정권하의 반민족, 반민주, 반역사적 과오를 백일하에 공개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롭게 민주, 민족, 통일을 위한 정권이 하루빨리 국민의 힘으로 세워져 박정권과 싸웠던 민주세력과 민중의 정권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무시하고 명분 없는 불법적인 계엄령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유신잔당들의 계속적인 집권연장이 은폐, 엄폐된 채 7개월여를 허위 보도와 기만적 술책으로 감추어오다 그들의 저의가 국민 앞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5·17 계엄확대 조치와 민주인사 및 민주학생들의 검거 선풍이었다면, 이들의 반민주, 반민족, 통일지연의 반역사적 행위에 정면으로 거부하며 총칼 앞에 맨손으로 항거하다 끝내는 죽음에 맞서 자위책으로 총칼로 대항해 피를 흘리며 민주, 민족, 통일을 위한 聖戰에 민중이 봉기한 5천년 민족사에서 일대 장엄한 의거가 바로 5·18광주시민항쟁이다.

  2. 광주라는 곳

  1980년 봄에는 전국 어느 대학에서나 학원의 자율화와 나라의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과도정부의 철면피한 음모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국민도 없었으며, 5월 18일 새벽의 몰염치한 그들의 배신에 분노하지 않은 국민이 없었건만, 오직 광주 80만 시민의 피의 항쟁과 400만 전남도민의 죽음을 무릅쓴 항쟁만이 가능했는가에 대한 고찰을 위해서는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적인 살핌이 필요하다.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 싸움에서의 계백의 죽음을 무릅쓴 패배가 호남의 恨으로 잠겨들기 시작하면서 의로운 투쟁이 끝내 지고 마는 비운의 처절함을 잊을 수 없던 곳이 전라도였다. 왕건과 견훤의 싸움에서 견훤은 졌고, 정여립도 지고 말았으며 녹두 전봉준 장군이 들었던 동학의 횃불도 꺼지고 말았다. 한말 의병투쟁의 피나는 싸움이 전라도에서 주도되었지만 그때도 지고 말았다.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 4·19혁명 등 미완의 의로운 투쟁은 전라도가 함께 싸웠거나 주도한 운동이었음도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로서는 패배하거나 꺼지거나 지고만 의로운 투쟁이었지만, 지고도 또 일어나고 패망하고도 또 살아나고야 마는 투쟁, 말을 바꾸면 호남 땅에는 계백의 목숨을 던진 싸움의 장열한 정신이 늘 살아 있었고 녹두장군의 피끓는 민족정신과 그 투혼이 살아있었으며, 의병들의 의로운 혼들이 가슴가슴에 잊혀지지 않았고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뜨거운 혼이 늘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역사적 전통이 남아있는 곳이다.

  박정희 정권 19년 동안 그들의 독재와 싸우고 항거하며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죽어가면서도 민주회복의 뜨거운 열기를 끝까지 견지했던 곳이 바로 광주를 중심한 지역적 특성이기도 했다.

  지방자치제의 폐지로 인해 서울 말고는 제대로 도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던 것이 나라 전체의 실정이었다. 그처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취약성 속에서 서울에 못지않게 박정희 독재정권과 혁혁한 투쟁을 전개해 왔던 곳이 광주였고 서울 말고는 거의 유일하게 在野圈이 형성되어 있던 곳도 광주였다. 호남 푸대접이라는 경제적 영세성 속에서 문화적,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힘든 싸움은 바로 위에서 열거한 전라도라는 전통적 義魂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때문이다.

  김천일 장군, 김덕령 장군, 고경명 장군의 강인한 혼이 무등산을 맴돌고 있고, 광주 학생독립운동 사건에서 흘린 피와 옥사한 선배들의 원혼이 광주천 주변을 휘감고 있지 않은가. 만석보 수세 반대로 시작된 동학혁명의 농민정신을 이어 받은 암태도 소작쟁의의 피나던 투쟁은 유신독재하에서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승리라는 농민운동에 횃불을 넘겨주고 있었고, 4·19와 6·3사태 이후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은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 어느 지방대학에서도 추종을 불허하는 새로운 방향모색에 앞장섬으로써 학생운동의 뿌리가 내려져 있었다. 광주 출신 YH여공 김경숙 열사의 순국에 이어, 도시근로자들의 파업을 통한 힘의 결집이 몇 개의 공장에서 불붙어가고 있었음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지닌 광주는 유신체제 타도의 희망이 있고 민주회복의 실낱같던 바램을 저버린 적이 없는 도시였다. 광주는 피를 무서워하지 않고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는 정신적 기반이 세워져 있었고, 죽음으로써 총칼에 맞서는 숱한 경험을 지닌 민주항쟁의 거룩한 도시이다. 투쟁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어 언제라도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지닌 도시가 바로 광주라는 곳이다.

  3. 광주의거의 직접적인 원인

  3월 새학기의 개학과 함께 전남대는 어용교수 백서를 발표하여 어느 대학에서도 시도한 바 없는 체계적인 학생운동을 전개하여, 학원자율화의 본질적 작업을 철두철미하게 진행해 왔고, 조선대학 역시 대학의 족벌체제 규탄을 위한 학생들의 학내운동이 질서 있게 전개되어 왔다. 의식에 선행하는 행동적 운동이 본래 어렵듯이 대다수 학생들이 학원 자유화의 본질에 근본적 타당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전남대와 조선대의 복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전체의 의식화 운동은 바로 어용교수 문제를 둘러싼 전남대의 학원 내 농성과 토론회 그리고 학생시위를 통해 절대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조선대에서도 총장퇴진을 주장하는 족벌체제 규탄의 운동을 통해 모든 학생들의 의식저변화 운동에 빈틈없는 효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4월에 들어서는 비폭력 성토대회에서 발전하여 전남대생들이 어용교수들의 연구실 출입문을 봉해버리는 정침식(釘針式)을 거행함과 동시에 어용교수들의 화형식 및 장례식을 치루는 온건한 실력행사로 발전하기에 이르자, 전남대의 분위기는 고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발맞춰 조선대생들도 총장실을 점거하는 등의 실력행사가 나타났고, 학교당국이 깡패를 동원함으로서 유혈이 낭자한 폭력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여 학내 기물이 파괴되는 불상사가 나타났다.

  학원의 자율화를 외치고 외치던 대학생들은 어용교수 문제와 학원 족벌체제 타도의 문제가 그것이 유신체제의 체제적 소산인 이상 유신체제 타파라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고는 학원 내 자체 운동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마침내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 무렵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전두환 일당의 군사독재의 면밀한 계획과 음모를 꿰뚫어 보게 되면서 학원 내에서의 농성과 시위가 사건의 해결에 무용함을 판단, 5월 14일 오후에는 만여 명의 전남대생 거의 전원이 전투경찰대와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최루탄 페퍼포그의 세례를 뚫고 학교에서 4㎞ 이상 떨어진 전남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도청 앞 분수대(이 때 이후 5월 26일까지 이곳은 민주주의와 정의, 진리의 광장으로 역사적인 광장의 자리를 굳혔다)에 확성기를 장치한 연단을 꾸민 후 노도와 같은 함성과 만세소리, 우렁찬 정의가와 통일을 바라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속에 시민들도 연좌한 학생들 둘레에 수만 명이 홍수같이 몰려들어 유신 이후 모처럼의 체증을 풀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불법적인 계엄령 즉각 해제”, “전두환 모든 공직 사퇴”, “노동삼권 보장”, “언론자유 실현”, “정부 주도의 개헌 반대”, “구속자 석방”, “민주인사 복권” 등의 프랭카드를 걸어놓고 과도정부의 음모와 비민주적 처사, 유신잔당들의 조속한 퇴진을 위한 성명서, 선언문, 결의문 등을 낭독하고 이상의 내용을 요약한 수많은 구호를 외쳐 온 시민을 열광케 하였다. 광주에 도청 앞 광장이 생긴 이래 최대의 인파가 모여 최대의 뜻깊은 행사를 치루었던 것이다. 이날 전남대생들이 완전한 비폭력 행사를 치룬 점은 여러 가지로 여운을 남겼지만, 해산하면서 만약에 오늘 밤 휴교령이 내려지면 전원 등교하여 싸우자는 강력투쟁의 시사를 남겼고, 내일 또다시 도청 앞에 모여 광주시내 전체 대학생들의 확대시위를 가질 것이라는 시위예고를 했던 점은 발전적인 측면이기도 하였다.

  다음날인 5월 15일 오전에는 조선대생들 5천여 명이 투석전 끝에 도청 앞 공장에서 연좌하여 전날의 전남대생과 유사한 시위가 재연되었다. 이들은 전남대생들이 집결키로 된 오후 2시전까지 전 시가지를 누비며 과격한 구호를 제창하며 광주시 전체를 소용돌이치게 하였다. 오후 2시 만여 명의 전남대생과 만여 명의 조선대생, 천여 명의 교대생, 수천수백여 명씩의 시내 전문대 학생들, 얼마간의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하여 광장에는 3만여 학생이 운집하여 연좌하자, 학생의 주위를 둘러싼 4∼5만의 시민이 모여 광장이 생긴 이래 초유의 성대한 집회가 또다시 있었다. 마침 쏟아지는 소낙비를 무릅쓰고 단 한 사람의 동요도 없이 광주시내 및 도내 7개 대학생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시국선언문이 낭독되고 뿌려졌다. 여기에서 단합된 학생운동 지도부가 형성되어 체계적인 학생운동의 면모를 보이면서, 시민들도 안도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유신체제 타도와 전두환 흉계를 성토하는 문안들이 낭독되어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결의문과 구호를 제창한 뒤 우중임에도 일대 시가행진을 벌였으니 참가한 인원과 그 열기는 아마 광주 초유의 행사였고, 온 시민은 또 한 번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승리에 가까운 쾌감을 느꼈으리라. 온 시가를 구호와 환호로 휩쓸고 누비는 행진을 한 뒤에 다시 광장에 모여, 내일의 시위 예고와 일정을 발표하고 완전무결한 평화적인 시위로 끝냈다.

  5월 16일 이날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는 어제의 3만여 대학생에 수많은 남녀 고등학생, 중학생까지 합쳐 4만여 명을 넘었고 주위의 시민은 5∼6만을 넘어 모두 10만을 넘는 대장관을 이루었다. 과연 5·16 20주년 답게 모였다고나 할까. 각 대학생 대표의 성토와 고등학생들의 성토까지 이어졌고 이들의 전체가 시가행진을 마치고 다시 광장에 집결, 민족사를 비극의 야만국가로 천리쯤 후퇴시킨 5·16폭거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였다. 10만여 인파가 외치는 환호와 함성은 무등산도 잠을 깨우는 우렁찬 외침이었다.

  해가 서산에 지자 이들 학생들은 수백 개의 횃불을 준비하여 나누어 들고 금남로에서 양동상가를 거치는 A코스, 노동청에서 산수5거리를 거치는 B코스의 두 코스로 나뉘어 야간 횃불시위를 감행하였으니 이날의 감격과 이날의 위용은 광주시가 생긴 이래, 아니 이 나라가 생긴 이래 가장 멋진 행렬이었고 우렁찬 외침이었으리라. 이 훌륭한 행사와 이 많은 군중시위가 다시 집결한 후에는 그야말로 평화적인 행동으로 끝을 맺었다.

  기만적인 신문과 방송의 보도와 전두환 일당의 거짓 흉계에 말려들어 학생지도부는 판단잘못의 우를 범했고, 이 절호의 기회에 한걸음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시위가 비폭력으로 일관된 채, 끝내는 정부의 조치를 바라고 내일부터는 정상적인 수업에 임한다고 끝을 맺고 말았던 것이다.

  정부의 중대발표니, 최규하의 귀국에 따른 중대조치, 군 내부의 동요니, 미국에서 전두환 반대니 등의 헛소문에 현혹된 학생 및 일반시민의 잘못된 판단이 가져온 일대의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싸움의 연속 속에서 얻어지는 승리가 아닌, 적이 승리를 거저 주리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아직도 학생운동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횃불데모로 열기를 받은 10만여 인파가 투쟁을 바로 시작하여 5월 17일로 이어가고 농성을 계속할 수만 있었다면, 5월 17일의 반역사적인 계엄확대 조치는 내릴 수 없었을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 집회의 해산 때 만약 대학에 휴교령이 내린다면 모든 대학생은 등교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다음 단계의 운동 예고는 바람직하였으며 이 예고가 바로 전에 없었던 5·18 광주의거의 역사를 창조했으니, 수업하며 정부의 하회를 기다린다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 결과가 어떤 역사를 창조했을지 자못 궁금한 일이다.

  4. 광주의거의 발단

  운동차원의 결정적인 잘못, 계속되는 투쟁 속에서 얻어내는 승리가 아닌 투쟁의 중단으로 적이 내려주는 결과를 받겠다는 오판을 저질렀지만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의 광주 학생데모는 광주 80만 시민의 뇌리 속에 유신잔당들의 음흉함과 전두환 일당의 음모를 속속들이 일깨워주었고, 투쟁 속에서 민권은 확대되고 무지가 깨우쳐진다는 천금 같은 교훈을 얻었으며, 언론의 오도 속에 잠든 광주시민의 정의감을 일깨우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음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게도 엉터리만 전해주는 신문과 방송의 주장이 틀렸고 학생들의 주장이 옳다는 판단을 심어주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이후의 학생들의 시위와 행위에 전폭적인 성원과 합세가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의거기간 동안 총을 들어도 학생들만 총을 들어야 한다고 시민들이 주장할 정도로 학생들에 대한 신뢰의 기틀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증명할 수 있는 일이다. 의식의 저변확대가 절대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원칙적인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적 전통과 시민정신의 뒷받침,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전통, 16일까지 전 광주시내 대학생들의 불타던 열기 등이 하나의 힘으로 합해져 마침내 전남대생들의 가슴속에서 힘으로 고양되었고, 산천초목이 떨 수밖에 없는 5·17조치의 폭탄 속에서도 노호한 전남대생들이 5월 18일 9시경부터 일대 궐기를 감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5·18 광주의거의 발단이었다.

  5. 광주의거의 경위

  계엄확대라는 엄청난 배신에 격노한 시민의 표정, 5월 17일 자정을 기한 민주인사 및 학생운동 주동학생의 검거소식이 전해졌고 대학마다 계엄군의 엄습으로 학교에 있던 학생들의 가혹한 폭행, 구타, 상해, 연행 등의 폭거와 야만적인 살륙소식이 들리자,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듯 전남대생 500여 명은 5월 18일 오전 9시경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서 학교를 장악한 계엄군과의 투석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하던 학생들에게 가해진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폭력과 천인공노할 살육행위에 격노한 학생들은 데모 시작부터 바로 돌을 들고 싸우기 시작했으니, 바로 이 점에서 광주의거의 전개과정은 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은 일요일, 계엄확대라는 엄포를 놓고 전국을 공포와 위협의 분위기로 몰아넣어 이제는 안심이라는 듯 그날따라 전투경찰대 등은 편히 쉬려는 듯 시내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전남대생들은 계엄군과의 교문 앞 투석전에 어려움을 느끼고 바로 시내로 향해 구호를 외치며 도청까지 제지 없이 진출할 수 있었다. 도청 앞에 이를 무렵, 소식을 들은 전경대들이 도청방어에 나서게 되자 바로 학생들은 과격한 투석전을 전개하여 금남로 일대는 전운이 휩쓸기 시작하였다. 도청 앞 진출이 불가능해지자 전남대생들은 최루탄에 밀려 여러 갈래로 흩어지며 계속 항쟁하였다. 이러자 골목골목에서 여타의 대학생들이나 아직 참여치 못한 전남대생들이 합세하기 시작, 이날 오전에 충장로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동명동의 법원 앞 파출소도 파괴되었으며, 대학생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시내 곳곳에서 투석전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막강한 경찰력으로 학생들을 분산시키고 중심가 진출을 막았을 뿐이었다. 분산된 대학생들은 점점 과감해지면서 과격한 데모를 하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계엄사측은 바로 그날 오후 3시경 아침밥과 점심을 굶기고 대기중이던 공수부대 병력에 소주와 환각제를 섞여 먹인 후 – 당시 생포된 병사들이 실토한 사실이다 – 광주시내에 투입시켜 학생 살륙작전에 돌입하였다.

  18일 오후 학생들과 대치하여 데모를 제지하던 계엄군의 모습은 삼척동자가 보더라도 이 나라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유지되는 국군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M16이라는 현대무기로 중무장한 군인에게 기껏해야 돌멩이나 던지는 학생들을 붙잡히는 대로 총에 꽂은 대검으로 찌르거나 신체의 어느 부분인가를 가리지 않고 총대로 치고받으며 박살을 냈고, 학생을 붙잡으면 옷을 벗긴 뒤 그 옷을 찢어 팔목을 등 뒤로 꽁꽁 묶었으며, 또한 길거리에 눕히고 치고 밟는 만행을 저질렀다. 계엄군의 공격에 밀려 쫓겨 가는 학생들을 피할 수 있는 막바지인 고층건물이면 최고층까지, 가정집의 옥상까지, 막다른 골목까지 추적하여 잡아내서는 박살을 내어 군용차에 짐짝 던지듯 실어내곤 하였다. 겁에 질린 학생들은 더러는 옥상에서 그냥 땅으로 뛰어내리고,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다가 즉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목격자들은 이야기 했다.

  이를 바라본 시민들은 가슴을 태우며 분노를 참지 못했고, 어쩌면 군인이 저렇게 무자비할 수 있느냐고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남녀 대학생들을 붙잡는 대로 옷을 벗기고 꿇어앉게 해놓고 등을 짓밟고 걸어 다니고 줄줄이 눕혀 놓고 짓이겨 밟는 등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옷을 벗겨 줄줄이 묶어 놓고 후려 때리기도 하고, 전봇대에 옷을 벗긴 채 달아 메어 놓기도 하고, 보도블럭 옆 철주에 짐승처럼 묶어놓았다가 차가 오면 짐작처럼 던져서 실어가기도 했다. 야밤을 무서워했거나 시민의 합세를 두려워했는지 계엄당국은 갑작스레 광주권의 통금시간을 단축하여 밤 9시부터 익일 4시까지로 발표하였지만, 신문 방송 TV 어느 것 하나 이날의 잔학무도한 계엄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숫자적으로 열세이고 힘에 있어 부족한 학생들, 가진 거라고는 정의감뿐 하루내 외쳐댄 “불법계엄 해제”, “연행학생 석방”, “휴교령 철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로 목이 메이고 힘이 빠진 학생들은 변두리 곳곳에서 흩어져 싸우다가 십중팔구는 붙들려갔고, 그나마도 날이 어둡자 귀가해버려 18일의 싸움은 잦아지는 듯 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학생들이 집단으로 흩어져간 산수동과 지산동 쪽에서는 밤새도록 집집마다 가가호호를 안방까지 짓밟고 들어가 수색하며 젊은 사람은 모두 구타해서 연행해가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비극의 날, 천인공노할 백성 살륙극은 19일을 절정으로 하는 듯 또 한 판의 승부싸움이 전개되었다. 18일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19일에 다시 일어난 광주학생들의 끈질긴 투쟁, 눈물겹고 기막힌 의기, 죽음으로써 항거한 혈투가 민족의 저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19일 아침 날이 밝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떼를 지어 몰려오던 대학생들! 그들은 어제 그처럼 많은 수가 연행되고 붙잡혀 실려 갔음에도 쉬지 않고 숫자가 불어 또다시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으로 변해 갔고, 발악을 하듯 계엄군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구경하던 시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찌르고 차고 총으로 치고 박아 광주 시가는 온통 유혈이 낭자하였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했다. 이때의 계엄군이야말로 언어 그대로의 폭도였고 흡혈귀였으며 굶주린 이리떼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데모의 주력부대인 학생들은 시위 중 고충건물의 사무실에서 구경만 하는 시민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우리는 죽어 가는데 구경만 하기냐고 외쳐대며 시민의 합세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분노한 데모대는 CBS 앞 차량을 불지르고 MBC 앞 차량도 불질렀다. 도망간 학생을 쫓아온 계엄군은 사무실이나 건물마다 들어가 박살을 내는 등 미친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곳저곳에서 학생들의 희생자는 늘어만 갔고 육탄으로 총칼 앞에 혈투를 감행하여 목불인견의 비참상이었다. 적십자병원 앞과 중앙극장 앞에서 여학생 유방을 도려낸 만행, 임동에서 임부의 배를 찌러 태아가 튀어나온 사실, 법원 앞에서 4세의 어린이를 죽여서 새끼줄로 목에 걸고 끌고 다니던 만행을 시민들은 목격하였고, 학생을 실어다 준다는 이유만으로 택시운전사들이 계엄군의 대검과 총개머리에 찔리거나 박이 터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만행을 보다 못해 혀를 차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에게도 무차별 찌르고 후려치는 폭악상을 보였다.

  식당이나 다방, 사무실이나 관공서까지 쳐들어가 젊게 보이거나 학생 모습이면 무차별 치고 박고 끌어내어 차에 싣고 연행해가자 보다 못한 시민들, 참다못한 시민들이 분노와 악에 북받쳐 이날 오후부터 중심가에서는 학생들과 함께 돌을 던지며 구호를 외치고 악을 쓰며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금남로 일대는 인산인해의 인파 속에서 계엄군과 밀리고 닥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공용터미널 부근이나 신역 근처에서도 운집한 시민이 함께 합세하여 노도와 같은 기세를 이루었고, 시민의 맨주먹과 무장계엄군의 총칼이 맞부딛치는 싸움이 치열하였다.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에서는 계엄군이 인파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 (이때의 발포가 그들의 첫 발포임을 광주시민은 모두 알고 있는데, 당국은 계속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시민과 합세한 학생들은 발화가 가능한 오토바이나 타이어 등을 불태우며 “계엄령 해제”, “전두환 찢어 죽이자”, “민주인사 석방” 등을 무등산이 흔들리도록 외쳐대었다. 피를 보면 군중은 두려움이 없어진다고 하던가? 격분한 군중 사이에서는 식칼, 낫, 몽둥이 등을 든 시민도 다수 보였다.

  이날 시내 고등학교는 학교마다 수업이 되지 않은 학교가 많았다. 우리 형이나 누나인 대학생들이 죽어 가는데 우리만 어떻게 수업하겠느냐고 수업을 거부하거나 운동장에 모여 성토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고 외쳐대기도 하였다.  고등학생들의 구호나 외침은 시중의 대학생 구호와 똑같았다. 이날 오후 광주시내 34개의 남녀 고등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어떤 학교는 무기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시내애서 참혹한 학살만행을 구경한 시민들은 자기자녀의 학교로 쫓아가 휴교하도록 요구하기도 했고, 만약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다가는 모두 죽는다고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못나오도록 교문을 육탄으로 막아서는 학부모의 모습들은 시내 계엄군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증명해주는 일이다.

  이날 사망자가 여기저기에서 나왔지만 사람이 쓰러지면 곧장 연막탄을 뿌려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차를 대고 실어가 버리곤 했으며 죽은 시체에는 확인을 못하도록 페인트를 칠해버렸으니, “인간백정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라는 것이 그때 그 현장의 가장 실감나는 구호였다. 저녁 때 현대극장 앞과 광주천 가에서는 학생을 쫓아 총칼을 겨누고 군중 속으로 달려들던 두 사람의 계엄군이 군중에 휩싸여 쓰러져 짓밟힘을 당하기도 했다. 국민을 적으로 간주한 국군과 군중 간에 육박전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궁동의 청산학원 앞쪽에서는 경찰장갑차가 학생들에게 에워싸여 오히려 경찰이 포로가 되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경찰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 사실도 있지만 이걸 알고 달려든 계엄군은 무자비한 폭행과 비인도적인 만행으로 학생을 짓이긴 사실에 대하여 목격자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까지도 그랬지만 18일부터 20일까지 경찰과 계엄군이 합동으로 시민과 대치했었는데 계엄군의 만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경찰은 그들 자신이 오히려 격노하여 데모를 막는 시늉만 하였고, 이 때문에 많은 경찰 고위간부들까지 수없이 계엄군에게 폭행과 구타를 당했음도 부언해 둘 일이다.

  19일의 특기할 몇 가지 사실은 데모에 가담치 않고 역사적 기록을 남기려던 시민이나 학생이 계엄군과 학생간의 대치 현장이나 계엄군의 만행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가 카메라를 빼앗기고 붙들려 작살이 나던 모습이 가공할 일이었고, 사진기자들 역시 맥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18일 오후의 광주시내 참상을 사진과 함께 19일자 석간에 게재하려던 전남매일 신문은 검열과정에서 전면이 삭제당하자 기자 43명 일동은 “시체가 개 끌려가듯하는 현장을 보고도 단 한 줄 보도할 수 없는 우리는 붓을 놓는다.”라는 내용의 단체 사표를 신문사 사장 앞으로 제출하고 신문제작을 그 날짜로 거부해버렸으며 출근조차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에 전남일보도 신문을 제작하지 않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19년에 닳을 대로 닳은 신문기자들의 얌체성에도 불구하고, 이들마저 보다 못해 분노를 터뜨렸으니, 이 사실만 보더라도 계엄군의 무자비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전남매일 기자들의 용감성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이날 밤에는 임동 파출소가 불탔고, 다른 여러 곳의 파출소가 파괴되었으며, 살륙의 만행도 계속되었지만, 야심해지자 데모대는 흩어져 광주시는 다시 고요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20일 아침이 밝자 휴교중인 고등학생들도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였고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민까지 합세하여 또다시 시가는 온통 군중으로 메워졌다. 곳곳에서 계엄군과의 대치로 살육전은 계속되었다. 대학생들 쪽에서는 지도부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듯 “시민회보”라는 전단이 나오기 시작, 신문 없는 거리에 신문구실을 하였으며, 목격한대로의 비참상을 기록한 내용과 시민들의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 내용들이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뿌려졌다.

  중심가에는 이날부터 외신기자들이 보이기 시작,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취재와 촬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날따라 무고한 시민과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부상자들의 상처를 아파하는 하늘의 눈물인 듯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쯤엔 개이기 시작, 거리는 다시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으로 휩싸였고 밀려든 군중에 힘겨워 계엄군은 점점 도청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주요 기관과 관공서를 제외한 기타 지역은 군중들이 장악하기 시작, 본격적인 승리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대학생을 실어 나른다는 가당찮은 이유로 영업중인 택시기사들이 무차별 자상이나 폭행을 당해 시내에서는 4∼5명의 기사가 죽었음이 확인되자, 연락된 기사들이 공설운동장에 모여 학생들에게만 미룰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가세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자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운행중이던 시내버스 기사들도 너무 많은 참상을 목격해서 분노에 치민 탓인지 시내버스를 계엄군 쪽으로 밀어붙여 대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날 해질 무렵부터는 시민이면 모두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도청 앞 계엄군과 대치하던 금남로 1가부터 5가까지의 8차선 도로엔 입추의 여지없이 시민으로 들어찼고, 신역에서 공용터미널을 거쳐 시민관, 전남여고, MBC, 노동청까지의 길도 완전히 메워졌다. 3∼40만 인파가 몰려 손에는 식칼과 낫, 삽, 괭이, 쇠파이프, 몽둥이 각목, 장대, 깨진 유리병, 빼앗은 실탄 없는 총 등을 든 채 노호한 함성을 지르고 만세와 구호를 외치며 성난 파도를 이루었다. 여기에 가세한 80여 대의 택시가 라이트를 켠 채 크락숀을 누르며 도청을 향해 내닫기 시작하였으며, 시내버스도 합세하여 물밀 듯 도청 앞 광장을 향했다. 그래서 도청 사수를 끝까지 하던 계엄군과 일대 전투가 전개되었다. 밀치고 닥치고 밀리고 밀려가는 살육전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계엄군이 생포되고 무기를 빼앗기거나 밟힘을 당했으며, 인해전술에 의해 시 전체가 군중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태로 40만 시민은 20일 밤을 꼬박 철야했다. 이날 밤에는 광주MBC, KBS, 광주세무서, 노동청 광주사무소 등이 불에 타고 있었고 경찰이나 군용차량은 물론 관용차량은 빼앗는 대로 불을 질러 광주 시내는 불길과 연기와 성난 군중의 우렁찬 함성으로 천지를 동요시키고 있었다. 특히 대학생 주력부대에서 사용한 화염병은 그 효과가 백발되어 시내가 불바다를 이루어 성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날 밤 특기할 일은 장칼을 든 대학생 특공대의 죽음을 무릅쓴 싸움이었다. 도청을 사이에 둔 계엄군과의 대치현장에서 장칼을 든 대학생들은 조를 편성하여 계엄군 쪽으로 진격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치열한 검무를 시도, 그곳에 모인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용기백배의 신념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21일 새벽이 되면서 무수한 총성이 울려 곳곳에서 발포가 있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아무리 극악한 계엄군의 탄압에도 한 치의 양보 없이 모인 군중은 날을 새며 싸움은 계속되었으니, 이날 밤의 사상자 수는 도저히 그 숫자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 새벽녘 신역 앞에서는 시민들에 의해 포위된 계엄군 한 무리를 육박전으로 시민들이 이겨내어 이들이 소지한 M16총 10자루를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도청을 제외한 시 전체가 군경의 손에서 시민의 손으로 완전히 장악되었다.

  21일 아침, 광주시가는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마냥 아스팔트 위엔 유혈이 낭자해 있었고 차량의 잔해가 타고 있는 모습, 파손된 유리창, 흩어진 보도블럭, 눕혀진 시체가 병원으로 옮겨지던 모습, 핏발선 눈빛으로 대치한 시민 중 아직 해산치 않고 있던 군중, 연기와 끄으름, 타버린 파출소나 파괴된 파출소, 정말로 잔인한 5월의 아침이었다.

  그러나 20일에서 21일 새벽까지의 40만 인파의 군중데모, 모인 군중 모두가 한뜻으로 이겨낸 밤, 한 뜻으로 이겨낸 시민의 힘, 이 힘이 바로 그날 오후 도청까지 장악해낼 수 있던 혁명적 힘으로 발전해 갔다.

  21일 아침을 먹은 수많은 데모군중은 빼앗은 20여 정의 M16 무기의 힘으로 광주고속, 아세아자동차공장, 기타 여객회사의 차량을 무한정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드디어 버스, 화물트럭, 승용차, 택시, 아세아자동차공장의 군용차량 등에 분승, 손에는 낫, 칼, 쇠파이프, 각목, 장대, 몽둥이 등을 쥔 채 시내를 질주하기 시작, 시가는 온통 해방거리로 변해 도로 연변에 늘어선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차체를 두들기며 “계엄령 해제”, “전두환 찢어죽이자”, “연행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쳐대며 “전투가”,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정의가” 등을 부르며 장단에 맞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들 차량의 일부는 아침부터 시외로 빠져나가기 시작, 무장군인과의 대결에는 시민이 무장할 수밖에 없다는 듯, 화순과 나주 등지로 무기를 구하러 나갔고, 시내 곳곳 예비군 중대에 달려가 무기고에서 있는 대로의 무기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이날에도 종일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과 시민이 탄 장갑차, 경찰장갑차 등이 대치하여 계속 육박전을 벌였다. 이날 12시 30분쯤에는 무장군인의 저지선을 차량으로 뚫으려던 시민과 접전이 벌어져 무차별 발포한 계엄군의 총탄에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은 흩어지지 않은 채 끝까지 쓰러진 시체를 넘으며 시체를 어깨에 메고 앞으로 앞으로 진격의 자세만을 취하고 있었다. 죽어간 시체를 차량에 싣고 시가를 누비며 시민들을 분격케 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자를 꺼내 병원으로 옮겼다. 군중 중에서 누군가 헌혈을 외치자 시민들은 벌떼처럼 나서서 헌혈에 앞장서기도 했다. 부상자가 몰려들던 그날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직접 수혈을 하였으니 이 일만 보아도 80만 광주시민은 모처럼 언어 그대로의 총화를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시민들은 차량을 탄 데모대에게 물과 음료수, 김밥과 음식을 날라주기 시작하였고 주유소는 무제한 급유를 제공하며 시민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3시경부터 화순과 나주 방향으로부터 밀려오기 시작한 무기를 실은 차량들! M1, 칼빈, 수류탄, 권총, TNT 등 무기를 보자 환호하던 시민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제 살았다라는 안도의 숨길이 들리는 듯 무기를 보고 밝은 표정을 짓는 시민의 모습은 조난당한 바다위에서 구조선의 깃폭을 보고 반기던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맨주먹 싸움에서 이제는 드디어 무장한 시민군의 모습으로 바뀌어 싸움다운 싸움의 한 판 승부가 예고되는 상황이 되었다.

  전남대 부속병원 옥상에 LMG기관총이 설치되어 도청을 향해 발사되고, 금남로쪽에서 무장한 시민군의 진격이 개시되자, 군은 헬리콥터를 타고 경찰은 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저녁이 채 못 된 시간에 도청을 비우고 완전히 철수하였다.

  18일부터 4일간의 시산혈해의 끈질긴 투쟁 끝에 광주시는 드디어 통째로 해방의 기쁨을 맛보는 순간이 되었다. 각 경찰서가 비워지자 유치장에 억류중이던 미결수는 모두 석방, 그야말로 광주의 거리는 해방의 물결로 넘치게 되었다. 이날 도창이 점령되는 순간, 마지막 떠나던 군인들은 경찰에까지 발포하여 경찰이 수십 명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모습도 있었으니, 군인은 경찰까지를 적으로 간주하고 만 것이었다.

  광주 상공에는 수없이 군용 헬리콥터가 날며 시민들의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을 하였고 수만 장의 선무공작용 전단을 뿌렸지만 거짓에 찬 그런 내용에 누구하나 속아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며 지독한 욕을 퍼붓기만 했으니 시민의 심정을 알만도 했다.

  21일의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날 아침부터 쏟아져 나온 “시민회보”나 전남대생들이 뿌린 80만 시민의 궐기를 호소하는 호소문, 조선대생 명의로 나온 격문들이었다. 성난 군중들의 방향감각과 투쟁목표를 제시하는데 귀중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6. 해방된 광주

  21일 오후를 고비로 계엄군은 시내에서 모두 철수, 광주의 외각을 에워싸고 있을 뿐 시내로의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21일 저녁 광주공원에 무장시민의 집결처가 되어 암호를 정해 놓고 군과의 야간전을 준비했으며 일부 무장시민들은 도청에 본부를 정해 작전을 짜기도 했다. 밤새 시내를 총성으로 휩쓴 가운데 22일의 날이 밝자, 광주시는 비로소 살인마, 인간백정들인 계엄군으로부터 해방도시로 변해 “시민군”의 지배와 자율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전남대생과 조선대생들을 중심으로 도청 내에 작전본부가 설치되고, 대학생 일부는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권기대회를 이끌어 나갔다. 분수대를 연단으로 하여 확성기를 장치한 후, 홍보반에서는 시가지 청소와 주변 정리부터 당부하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일하는 시민들의 도움에 의해 정돈된 시가의 모습으로 바꾸어 평화를 찾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자칭 수습대책위가 자천으로 시민대표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어 수습과는 거리가 먼 어용적 발언을 하자, 모인 군중의 질타를 받으며 하단해버리는 넌센스가 나오기도 했다. 이날의 궐기대회에서는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통일을 위한 정권이 수립되고, 전두환 일당을 찢어죽이고, 연행자들의 무조건 석방과 노동3권이 보장되는 순간까지 죽음으로써 광주시민은 끝까지 싸우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광주사태를 정확히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대한 신랄한 공격도 있었다.

  언론탄압과 정보정치의 마수에 재갈을 물려 시민의 진실한 바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아오다가, 폭포처럼 쏟아진 해방의 물결을 만끽하는 자유스러움 속에 시민의 진정한 바램은 시민궐기대회에서 외쳐진 구호와 결의문에 나타났다. 그것을 종합해 보면 반민주, 반민족, 반민중적 통일지연 정권은 물러가고 민주, 민족, 통일을 앞당기는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결집된 의사가 나타났다고 보면 되겠다.

  무장한 시민군은 도시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여 야간의 계엄군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날 소문으로는 목포를 비롯한 화순, 나주, 완도 등 전남의 거개의 시군지역에 광주소식이 전해져 곳곳에서 군중봉기가 있었고 전주, 정읍, 고창 등 전북지방에서도 군중의 동요가 있었음을 듣게 되었다.

  이날도 “시민회보”는 계속 뿌려졌고 도청 주면의 건물 벽에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신문, 방송, 외부의 전화까지 완전 두절된 시민의 귀와 눈은 대자보나 시민회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22일 밤에는 도시외곽의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시체와 부상자가 계속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23일 날이 밝자 학생들은 가두방송을 통해 일용 필수품 상점들은 문을 열 것을 홍보하였고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민궐기대회에 참여할 것을 알려주었다. 시체를 확인하고 부상자들을 확인하려는 시민의 대열은 도청 앞 길을 가득 메우는 지경이었고 여기저기서 곡성이 터져 시민과 시내는 울음바다에 젖기도 했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체는 확인을 기다렸고, 밝혀진 시체는 입관하여 도청 앞 상무관에 영안소를 설치하여 분향할 수 있게 하자. 분향대열에 선 시민으로 길을 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미확인된 시체가 계속 썩기 시작, 처절한 모습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날 오후에는 수만의 시민이 모여 장대한 성토대회를 열었고 시민군과 시민의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호흡이 맞아가고 있었다. 계엄당국은 순전한 거짓으로 선무공작이랍시고 공중에서 전단을 뿌리고 방송을 했으나, 시민들은 팔을 내저으며 사기치지 말라고 소리소리 외쳐댔다. 이날도 역시 “시민회보”와 대자보가 무수히 나붙어 시민들에게 승리의 확신과 방향제시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한 계엄당국에 대해 시민군은 폭도가 아니라는 논리정연한 항변으로 시민 모두가 안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24일 도청 내의 시민군 본부는 계획적인 전투와 지도부를 형성, 하나씩 분담하여 장기전에 대비하는 작업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날 오후 수십만이 모인 “살인마 전두환 화형식”은 가장 극적인 성난 군중의 장면을 보여주었고 시민의 함성은 시가가 떠나가는 듯 천지를 진동시켰다. 성토와 화형식을 마친 후 시가행진에 나섰다. “최규하 정부 하야”, “전두환 찢어죽이자” 등의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진행된 행진은 온 시가를 승리의 물결로 휩싸이게 하였다.

  25일 비오는 광주거리에서 수십만의 군중이 도청으로 향하였다. 도청 앞 광장에 집결된 군중은 하늘을 찌르는 함성으로 군부독재의 음모를 규탄하였고 군부독재의 퇴진과 조속한 민간정부 수립을 요구, 통일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었다. “봉선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정의가” 등의 노래소리가 무등산을 뒤흔들 정도로 힘찼다. 성토대회 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시가를 행진하였고 연도의 시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집회시에는 시민군 돕기 모금운동이 벌어져 일시에 기십 만원의 거금이 모이기도 했다.

  “시민회보”와 “대자보”에서는 계속 승전고를 울렸고 승전소식만이 시민을 기쁘게 해주었다. 시민군 차량 이외에 모든 교통수단이 끊겼고 관공서 일반 사무실이 닫혔으나 상가는 점점 문을 열기 시작하여 축제분위기 같은 모습과 슬프고 아픈 모습, 희비가 엇갈리는 광주의 표정이었다.

  26일 아침부터 계엄군의 침입이라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와, 반은 공포 반은 의아심으로 시민들을 도청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부터 성토대회와 궐기대회가 열렸다. 지금까지의 관주도 및 어용인사들의 수습대책위에 해결의 실마리를 기대할 수 없어, 이날부터 명실상부한 수습대책위를 재구성키로 하고 본격적인 수습을 위한 작업을 하기로 하여 민주인사 쪽의 활동이 개시되어 갔으며, 광주시민이 폭도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민주인사나 목사, 신부, 교수들이 무장을 해서 항용 쓰는 유신잔당들의 상투적인 수법에 역습을 하자는 안이 대두되기도 했고, 도청 앞에 온 시민이 집결하여 연좌토록 하자는 방법 등이 강구되기도 했다. 도청 내 시민군 본부에서도 대학생 중심의 통일된 조직이 완료되어 장기전을 대비한 준비가 착착 이루어졌다.

  오후에도 시민 궐기대회가 열려 다시 한 번 새롭게 시민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날의 결의는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이 상태에서 물러설 수는 없으며, 무장해제하여 협상하자는 논리는 입도 열수 없게 되었다. 사실 협상하자는 안은 22일 이후 어용성을 띤 관주도적인 입장에서 흘러 나왔으나 대다수 시민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계속 일축하고 있었다. 결국 전 시민이 옥쇄하는 방향으로 굳은 결의를 하게 되었다. 특히 대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의혹을 품었던 시민들도 안도감을 갖게 되었고 대학생들에 대한 굳은 신뢰로 인해 일치된 모습으로 투쟁이 진전되는 상황이었다.

  검정 리본이 여학생 쪽에서 준비되어 모든 시민이 패용하고 모든 가정에서는 희생자를 애도하는 뜻에서 조기가 달아져 일체감은 더욱 뚜렷이 보였다. 계엄당국이 하는 소리나 주장에는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형편이었다.

  이런 가운데 계엄군은 26일 야심과 27일 새벽을 통해 시내전화를 두절시키고, 개스탄과 마취탄을 사용함과 동시에 지상과 공중의 양면작전에 의한 시민살륙작전을 전개하여 광주시내 침입을 감행하였다. 27일 새벽, 수백 명의 시민군을 죽이거나 생포하면서 잠든 시가를 엄습, 광주의거의 불길을 힘으로 짓누르고 말았다.

  27일 아침, 살벌한 시내에서는 무장 계엄군이 시민이라면 닥치는 대로 수색검문하고 공포와 전율의 도시가 되었다. 18일부터 26일 저녁까지 만 9일간의 광주의거는 시민의 가슴 속에 분노와 앙심을 안으로 숨긴 채 외형적인 투쟁의 모습은 끝을 맺고 만 것이다. 27일 이후 검거의 선풍에 민주주의를 생각만 하고 있던 시민은 거개 연행감금되어 생사를 헤매고 있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7. 광주항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무력에 의해 시민의 외형적 투쟁이 끝이 난 듯 보이나, 광주의 투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수밖에 없다. 민간인 사망자 숫자를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지만 당시의 목격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대략 천여 명에서 천오백 명에 이르고 부상자도 수천 명에 이른다고 광주시민은 믿고 있다.

  계엄군이 시내를 다시 침입한 이후 하수구에서 나온 시체, 시내 야산이나 변두리 전답에서 발견된 시체, 중심가의 신축중인 건물의 지하실에서 발견된 수십 구의 시체, 그 후로 나타난 각 가정 자녀의 행방불명된 숫자 등을 종합해보고, 26일까지 도청 시민군 본부에서 신원이 확인된 시체 70여구, 신원불명으로 도청과 각 종합병원에 있던 시체 100여구 등과 27일 새벽 도청 폭격 때의 사망자 등을 고려해보고 18일 19일 20일 군부대에 끌어다 둔 시체 등을 짐작해보면 위의 숫자는 거의 정확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계엄군의 발사에서 죽어간 전투경찰, 계엄군 자체의 교신 잘못으로 인한 전투에서의 사망, 계엄군과 일반군과의 충돌로 인한 사망자도 수없이 많을 것이 뻔한 일이다.

  이러한 수많은 희생자가 원혼으로 남아 있는데, 광주의 싸움이 어찌 끝날 수 있으며, 18∼20일의 술 취한 계엄군의 살륙작전을 80만 시민이 목격했는데도 계엄군은 자기들은 성인군자 노릇을 했는데 폭도, 불순분자들이 무기를 들고 계엄군을 쏘아죽였다고 발표하는 군 당국의 뻔뻔스러움이 남아 있는데 어찌 광주의거가 끝이 나겠는가.

  80만 시민이 보다보다 못해, 참다참다 못해 일어난 민중항쟁을 고정간첩들이 배후조정했느니, 김대중씨 계열에서 배후조정 했다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자발적으로 일어난 대다수 시민이 지금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있는데 그것을 어느 누가 믿어주겠는가. 광주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꺼져서도 아니 된다. 프랑스의 르몽드 신문은 광주의거를 20세기 최대의 살륙작전이었고 가장 잔인한 인권탄압행위였다고 보도하였다. 20세기라면 히틀러도 있고 크메르, 칠레 등의 비참상이 모두 들어가는데 그런 모든 것보다 더 혹독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을 죽이고 죽은 시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페인트를 칠하고 암장하던 모습이 외국신문에 보도되어 있다. 찌르고 밟고 두들겨 패던 모습, 유방이 도려진 처녀의 시체를 그리고 목이 달아난 시체를 시민은 목격했고 외국신문에 상세히 게재되어 있는데도 이런 모든 것이 유언비어라고 허위선전만 하고 있는 계엄당국이다. 광주시민 어느 누가 오늘의 신문이나 방송보도를 믿으며, 광주시민 어느 누가 광주시민이 잘못한 일이라고 느끼고 있겠는가. 수천의 양민을 연행해다가 상상을 불허하는 고문과 폭행을 가해, 거짓 조작으로 광주사태의 배후조종이라 꾸며대고 있는 원시적 통치방법에 광주시민 누가 수긍하겠는가.

  광주는 죽을 수도 싸움을 그만둘 수도 없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통일을 바라고 노동자 농민의 권리들을 바래서 일으킨 시민데모를 폭도로 몰아 국민을 적으로 알고 현대식 무기로 무참히 사살하는 정부가 어떻게 현대 민주사회의 정부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기관이겠는가. 80만 광주시민이 한데 어울려 의롭고 정당방위적 투쟁을 수행했는데, 왜 그러한 죽음을 불사한 시민항쟁이 일어났느냐의 자기네 잘못을 생각하려들지 않고, 책임을 딴 곳에 전가하는가. 선동과 배후조종이라는 당국의 억지논리에 꼭 한마디 해둘 것이 있다.

  흑인 혁명지도자 말콤엑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어디가나 늘 답변을 요구받던 “흑인을 선동한다”, “폭력을 선동한다”라는 말에 “이미 빈민가에 만연되어 있는 열악한 교육, 조악한 주택 그리고 실업으로 인해 생기는 사회학적인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는 데는 누구의 선동도 필요치 않다. 이 폭발적인 범죄 상태는 너무도 오랫동안 존재해왔기 때문에 도화선조차 필요 없다. 그것은 저절로 도화되고 자체 내부로부터 자연 연소한다.”라고 답하였다.

  19년 유신체제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고 자유와 복지로부터 소외당한 시민들이 10·26 이후 희망을 가졌던 민주회복의 열망에 5·17이라는 날강도 사건을 당하자 아무런 기대도 포기한 채 그들은 도화선 없이, 배후조종 없이, 선동 없이, 저절로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 광주의거였다.

  광주시민 누가 국민 누가 5·17 조치가 있을 것을 알았고, 계엄군이 그처럼 만행을 저지를지를 예견하고 있어 선동과 배후조종을 했단 말인가. 의로운 광주시민의 역사적 의거를 선동 배후조종의 결과라고 한다면 역사를 왜곡시켜도 너무 지나친 일이다.

  피의 보상은 역사가 해주는 수밖에 없다. 어떤 금전적 보상도, 구호품도, 구호금까지도 광주시민은 받기를 거절하였다. 역사적 보상, 정치적, 사회적 보상만이 죽어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길이요, 시민은 그것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민주회복, 통일에 이르는 통치, 광주의거의 정당성과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만이 광주시민의 궁극적인 목표요 그것의 성취만이 80만 광주시민을 위로해 주는 길이다.

  이 길을 위해 광주시민은 이번의 혁혁한 경험을 통해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이제부터 목적달성을 위해 새로 시작하는 용기를 지니는 일뿐이다. 진실이란 아무리 깊게 두껍게 파묻어도 절대로 숨겨지거나 사라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당국은 더 이상 광주의거를 왜곡하여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 끝내는 진실이 허위를 누르고 세기적 승리를 거두었던 저 유명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작가 에밀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의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번 광주사태에 대한 당국의 기만을 규탄하고, 역사는 반드시 사필귀정의 진리에 도달하는 확신을 우리 모두가 지니기를 바란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가장 먼 곳까지 재앙을 미치게 할 지뢰를 매설했는지 아닌지를….”

  전 세계의 매스컴이 진실에 가까운 보도를 하였고 현장에서 보고 듣고 실제로 행동한 수십만 광주시민이 살아 있는데, 그처럼 명명백백한 정의롭고 민주적인 시민항거를 불순분자, 정치인의 선동과 배후조종이었고 극소수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우겨댄다면 승리의 길이 누구에게 열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당국은 생각할 일이다. 폭도가 광주시 전체를 무장한 채 장악하고도 열흘 가까이 지내면서 은행 하나 손대지 않고 그냥 놔두었던 그런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폭도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도 광주시민은 또다시 궐기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하자.

  8. 광주의거의 교훈 : 광주시민과 모든 한국인을 위해

  작건 크건 싸움이란 이겨내는 승리가 아닌 한, 어떤 전리품도 유리한 전리품이 되지 못한다. 5월 15일 또는 16일경 모든 국내 보도에는 정부가 중대결단을 내려 학생시위대의 요구에 응분의 해결을 주리라는 위장보도가 나돌고 있었음은 모든 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투쟁에 임한 학생 시위대가 이걸 믿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은 너무도 큰 돌이킬 수 없는 5·17 확대계엄 이후의 민족적 수난을 감수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5월 15일 서울역 학생데모가 자진 해산하였고 5월 16일 광주의 야간 횃불데모가 자진 해산하였던 점, 이와 같은 투쟁의 중단에서 엄청나게도 반역사적 조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5·18 투쟁은 5·16의 야간 횃불데모의 열기를 받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생 500여명이 맨주먹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점, 비록 비조직적이긴 했지만 이 힘이 바로 광주의거의 성격규명에 여러 가지 작용을 해준다.

  이날 새벽 전남대 학생회의 학생운동 집행부는 완전히 박살나 일망타진되었거나 은신해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5·18의거는 우발적인 비조직 군중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도부 없는 다수의 성난 학생들이 끈질긴 투석전을 감행해준 시위를 화약으로 보면, 이 화약에 무자비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불을 붙여주었으니, 압력은 계엄군의 만행이요 불이 붙음은 보다보다 못해 합세한 시민이었다. 20일의 철야 시민데모는 비무장 투쟁이었고 여기서 열을 받아 21일에는 마침내 시민이 무장하는 지극히 넘기 어려운 운동의 고비를 껑충 뛰어오르는 역사적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와 운동 및 민중의 힘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요구한다. 용수철의 원리는 누르는 힘이 강해질수록 튕기는 힘이 배가되는 것이니, 탄압이 강할수록 촉발하는 민중봉기의 위세는 무서울 수밖에 없다.

  분명한 사실은 오합지졸과 같은 20일 저녁의 시민데모 속에도 이론적으로나마 상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던 대중운동의 방향에 대해 대단히 단련된 대학생이나 시민이 산재해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시민속에는 실천적 행위를 여유있게 해낼 수 있던 용감한 시민들도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운동방향은 역시 대학생들의 아이디어 속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최종적인 투쟁은 시민이 무장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대한 인식을 대학생들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광주시내 대학생들의 이론적 무장에는 그런 정도는 충분히 흐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나라의 학생운동이나 기타의 시민투쟁의 경험상으로 실제 무장을 하고 싸운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경험의 부족과 이론과 실제사이에 나타나는 괴리현상에서 오는 당황함을 극복치 못했으니 무장을 한 직후의 무장시민 통솔문제, 집행부 구성문제 등에 혼선과 무질서를 면할 수 없었던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무장군에 대항키 위해서는 무장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음을 알지만, 무장한 시민의 통솔 및 지도적 기능문제와 전투기술상의 숙달문제에 대해서도 면밀히 준비하고 검토해 두어야 하는 점이 부족했었다.

  한편, 21일 오전 전남대나 조선대의 시민 총궐기 호소문이나 격문은 대중들의 운동방향 정립에 지대한 작용을 하였으니 이런 점은 학생운동의 차원에서는 훌륭했던 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21일 오후 도청이 점령된 후부터 숫적으로는 열세였으나 노련한 학생운동의 경력을 가진 복학생 및 학생운동 출신들이 운동본부의 중심부에 하나씩 자리를 뚫고 들어가서 무장시민군의 지도적 기능을 할 수 있었던 점이 바로 초기의 무질서와 혼란을 질서와 기율 속으로 끌고 가게 된 중요한 원동력이었고 또 그 싸움이 6일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다. 무장해제 후 협상할 것이냐 아니면 끝까지 무장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 라는 끈질긴 불협화음속에서 학생들 쪽의 주장이 무장해제 반대쪽으로 우세했던 점은 바로 학생들 다수가 이론적인 면에서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무장시민군 쪽에서 대학생들이 지도적 기능을 발휘하고 시민 전체의 방향과 운동열기의 계속적 유지를 위한 시민궐기대회 쪽에 방향감각을 지닌 학생의 참여가 대단히 중요했다면, 다만 지도급 학생들이 대다수 체포된 탓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몸을 도사리고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 운동의 장기화와 대중들의 역기지속에 치명적인 결과를 주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 시민 궐기대회를 주도하던 학생 쪽에 연사의 부족과 호소력의 미숙 등은 안타까운 모습일 때도 있었다.

  평소에 그렇게도 바라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는데도 후환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리는 학생운동 지도부가 있었다면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많은 무장해제주의자들을 배격하고 학생들의 주도로 끝까지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투쟁이 장기화된 점도 학생운동의 높은 발전단계로 여겨야 한다.

  가장 큰 패인의 하나가 군사작전술에 어두운 탓인데 6천여 정에 이르는 무기와 수류탄, TNT 등 다량의 무기를 제대로 활용치 못하고 진압되었던 점은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학생운동의 방향이다. 다만 제공권이 계엄군에게 있었고 시 전체가 포위되어 있었으며 가스탄과 마취탄 등의 현대식 고급무기를 계엄군이 사용했던 점을 고려해보면 불가항력인 듯 싶으나, 시가전의 구체적 준비와 시민동원의 계획 같은 전술적 차원이 개발되지 못한 점은 앞으로의 반성점이 될 것이다.

  통탄을 금하지 못하는 점은 10일간 광주에서 그처럼 혈투를 벌여 투쟁하고 있었으나 광주 이외의 도시에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못함이었다. 그러한 시도가 다소는 있었으리라 믿으나 사전계획의 미비와 수행과정에서 제대로 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광주가 그러하고 있음을 국내 보도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남의 집 불인 듯 잠자코 있어야만 했던 여타 도시민들의 비굴성은 민족 전체의 문제로서도 수치스럽지 않을 수 없다.

  투쟁과정에서 시민회보, 격문, 대자보 등이 적시에 뿌려지고 게시되었던 기민성도 광주의 민주역량과 학생들의 단련된 점이다. 민주화 투쟁에서 학생운도의 촉발제 역할을 해주었지만 이 학생들의 촉발을 받아 한 단계 높은 민중운동으로의 전개과정에서 이를 담당할 성인층의 운동권형성결여는 이 나라 민중운동의 방향에서 전체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무기가 출현하기 전까지의 학생들의 희생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투쟁이었는데 바로 이를 이어받아 시민적 항쟁의 차원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학생운동 이상의 기성인들의 운동권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거나 운동방향 설정을 위한 지도적 그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끝으로, 광주의거의 의의는 너무도 크다. 역사를 얼마만큼 앞당겼으며 민중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선을 그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뚜럿한 점 하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궐기한 시민들에게 독재정권의 옹호를 위해 주한미군 사령부가 일선 군부대(경기도 양평주둔 20사단)를 투입시켜 진압해도 좋다는 허가를 했음이 공식보도를 통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파수병을 자처했고 인권과 인도주의를 입만 벌리면 부르짖던 미국이 양민 살육작전인 폭악한 탄압행위에 정식으로 도와주고 협조해 준 사실이 온 세계에 정식으로 폭로되었고 한국인도 최초로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한미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광주의거는 정말로 명확한 증거자료를 제공해 주었고 광주시민은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의 기조가 무엇이냐 라는 점을 이제야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점이다.

  이 나라의 맹방이라 자처하는 미국의 정체가 이 민족사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나 금후의 통일,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몫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토론해야 하는 여지를 남겼음이 이 나라 민주발전, 민족통일, 민중사 전개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음을 가장 큰 수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최소한 80만 광주시민들은 이제 미국의 입장이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광주의거에서는 광주가 지닌 전통적 유산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의거의 중심적 역할은 학생이었지만 농민, 공장 근로자들이 앞장서서 과감한 투쟁을 전개한 점이나 YWCA같은 여성단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을 보면 그동안의 광주가 지닌 민주역량 내지 투쟁에서 얻은 이론을 유감없이 발휘한 점으로 보면 평소의 의식화 작업이 운동에 미치는 영향이 그렇게 크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광주의거는 이 민족사에 큰 디딤돌이 될 것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아직 시작인 싸움을 위해 광주시민은 전국민과 함께 일어나 싸움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1980년 6월 15일 )



<15년 뒤, 필자의 변>

  이 글은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항쟁에 고등학교 교사로서 직접 가담하여 5월 27일 전남도청의 시민군이 살육되기 까지를 지켜보았던 견해이다.

  5월 27일 검거령이 내려져 필자는 수배되었고, 6월 5일까지는 광주의 이곳저곳에 은신하다가 당시의 무서운 공포 분위기 하에서 장기간 은신하지 않고는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상경, 6월 13일까지의 보도들을 살피고 운동권 후배들과 긴밀한 상의 끝에, 죽기 전에 광주의 진실을 밝혀 두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서울의 숨어 있던 방에서 6월 14일과 15일 사이에 기록해 두었던 초고가 이글이다.

  9일간의 광주항쟁 기간 중 시위현장에 계속 참여하며 만난 여러 사람의 정보를 종합한 내용이고, 5월 27일 이후 6월 5일까지 광주에서 접했던 온갖 소식과 상경 후 10여 일 동안 얻어들은 정보를 합하여 얻은 결론을 토대로 하여 작성한 것이다. 당시 기록할 때에도 가장 객관적인 진실만 기록하려 했는데, 15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보더라도 사망자 숫자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이 진실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제 광주시민항쟁의 전모가 밝혀지려고 하고 있는 요즘, 이글이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정리되지 않은 기록을, 분노와 억울함 때문에 논리적인 기록은 아니었지만, 우선 세상에 공개함을 양해하기 바란다.

  필자는 1980년 12월 23일 검거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1995년 11월 29일

국회의원 박 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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