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방콕을 밥 먹듯 드나들던 시절이 있었다. 첫 방콕 여행을 할 때가 바로 타이의 전 왕인 푸미폰의 생일 즈음이었다. 민주기념탑이 있는 도로는 반짝이로 장식되어 있었고, 시민들에게 무료로 밥을 나눠주는 모습을 본 게 타이 여행 첫날 아침 풍경이었다. 21세기가 내일모레인 판국에 왕이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은 안 갔다. 국왕의 젊은 시절 사진을 아이돌 보듯 하는 고교생들이나, 집마다 모셔진 왕의 초상. 사진을 향해 손가락질이라도 하면 불경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10대 후반부터 반정부 성향이 짙었던 나로선 늘 거슬렸다.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절대왕정 비슷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 개그감이 있다고 느낀 건 방콕 국제공항에 있는 ‘킹파워(King Power)’라는 면세점 이름뿐이었다. 왕의 힘으로 세금을 감면해주는구나!

동남아까지 ‘인도제국’에 편입하려는 움직임

천만년 살 것 같던 푸미폰 국왕은 2016년 사망했다. 조선 왕조만 해도 국상은 5개월이면 끝났지만 타이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년간의 국상을 선포했다. 국상 기간 음주가무가 제한되며 관광업이 타격을 받았지만, 입도 뻥끗하는 사람이 없었다. 신임 국왕 와치랄롱꼰은 2017년 12월1일 즉위했지만 애도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대관식은 2019년 5월4일에야 거행됐다. 무려 69년 만의 대관식인지라 언론은 대관식 직전 기습적으로 거행된 왕의 네 번째 결혼 소식부터 7.3㎏에 달한다는 황금 왕관, 365억원이 들었다는 대관식 행사 비용까지 꽤 상세하게 보도했다.

ⓒEPA타이 신임 국왕 와치랄롱꼰(라마 10세)의
대관식이 5월4일 방콕 왕궁에서 열렸다.

타이 왕가의 대관식을 비롯한 국가 행사는 힌두교와 불교가 뒤섞인 의례를 진행한다. 이번 대관식에서도 국왕의 공식 이름이 적힌 황금 명판과 왕실 휘장을 수여한 주체는 타이의 힌두교 ‘브로민’들이었다(인도의 사제계급인 브라만을 타이에서는 브로민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들 의아해하는 지점이 발생한다. 타이는 불교 국가 아니었나?

한국으로선 중국이 아시아의 주류일 수밖에 없지만, 지리적으로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힌두교와 인도의 광범위한 영향 아래 있다. 타이만 해도 그들의 건국 서사시 격인 라마끼안은 누가 봐도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와 비슷하다. 라마야나의 주인공인 라마는 힌두교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의 아바타이기도 한데, 현 타이 왕의 공식 호칭인 라마 10세도 라마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이번 대관식에서 라마 10세 와치랄롱꼰의 취임 일성은 “국민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위한 정의로움의 통치”였다. 이것도 신화 속에서 라마가 했던 말이다. 즉 통치의 근간, 왕국의 정통성을 힌두교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말이 나온 김에 추가하자면 중국과 더 가까운 베트남만 해도 17세기까지 존재했던 참파 왕국의 경우 힌두교 왕조였다. 우리에게 힌두교는 멀고 먼 존재지만, 동남아에서 힌두교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요즘 인도는 극우 정권이 집권하며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하는 중이다. 이런 문화적 영향력하의 동남아를 ‘인도 제국(India Empire)’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포획하자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제국의 영향력이 넓을수록 좋은 와중에 극동의 어떤 나라가 스스로 부마국을 자처한다는 것도 ‘웃픈 일’이긴 하다. 물론 그 나라에서는 인도의 이런 의도를 전혀 모르는 듯하니 더 슬픈 코미디랄까.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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