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를 동반하는 다른 대중음악과 케이팝이 은근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이 있다. 카메라의 존재다. 케이팝은 공연장 무대보다는 음악방송에서 태어났고, 아이돌들은 방송국 카메라와 효과적으로 대화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레드벨벳의 뮤직비디오에는 지긋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장면이 많은데, 이를 언제나 뚫고 나오는 건 슬기의 시선이다. 다정하거나 호기심 어린 표정일 때도 있고, 단호하고 매서울 때도 있다. ‘Bad Boy’에서 (평양 공연에선 삭제된 것으로도 유명한) 샷건을 쏘는 장면 등을 담당하는 것은 그의 눈빛이 가지는 힘과 무관하지 않다.

슬기는 단단한 완성체다. 약간의 서글픔을 간직한 듯한 음색은 어디서든 자신 있고 풍성하게 청각을 장악한다. 레드벨벳 노래에서 그는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을 곧잘 담당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다른 멤버의 파트에 툭툭 끼어들며 멜로디를 장식하기도 한다.

ⓒ시사IN 양한모

흔한 형식이지만, 슬기의 목소리만큼 단신으로 멜로디의 흐름을 극적으로 흔들어놓는 보컬은 흔치 않다. 날렵하고도 위용 있는 춤선 역시 탁월하다. 거기에 시선을 빨아들이는 눈빛이 결합한다.

팬들은 그것이 슬기의 전부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무대 위를 떠나면 뚱한 표정으로 조금 허술한 듯이 행동하는 그를 팬들은 ‘곰슬기’라고 부른다. 멤버들이 장난을 치거나 놀릴 때면 그는 광대뼈를 끌어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평소 날카로운 형사 같던 얼굴이 곰돌이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런 극단적인 갭 앞에서 우리는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성실하고 의욕적이며 귀여운 매력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 연습생 생활을 거쳐 철두철미한 퍼포머가 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 말이다. 실제로 그는 유난히 길고 험한 연습생 시절을 거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로페셔널한 자신감으로 빛나는 눈빛

케이팝을 기예의 영역으로만 이해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은 극소수의 천재를 상정하고 대다수의 범재를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슬기의 렌즈로 바라보는 케이팝은 하나의 직업이다. 재능과 적성에 따른 효율의 차이는 있어도, 충실히 노력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계다. 굳이 노력주의에 함몰되지는 말자. 노력해온 시간의 길이보다 중요한 건 그 이유다. 케이팝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세계다. 곧잘 외면당하지만 당연한 이 진실을 그와 레드벨벳의 행보는 그간 꾸준히 증명해왔다. 그렇게 성장해온 사람은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다고, 프로페셔널한 자신감으로 빛나는 그의 눈빛이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어떤 이들에게 무대 위 슬기의 존재는 곧 케이팝이란 이름의 꿈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기자명 미묘 (〈아이돌로지〉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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