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자 친구들이 모두 말렸다. 우리 학년에는 외모, 책임감,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슬램덩크〉의 채치수를 닮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 욕심에 회장 출마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열다섯 살에 처음 구매한 휠체어로 특수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중학교 과정을 마친 후 우여곡절 끝에 2000년 일반 고교에 진학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애가 없는 아이들 990여 명과 교복을 입고 함께 학교생활을 시작하자, 일상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돌파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예 더 어려운 일에 맞서보는 것이다. 나는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슈퍼 장애 청소년’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예상과 달리 채치수의 출마가 어떤 이유로 무산되자 다른 쟁쟁한 후보들이 다수 등장했다. 나는 여전히 열세였지만 채치수도 없어진 마당에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고민 끝에 전교생 앞에서 후보자 연설을 하는 날, ‘일어서서’ 진행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혼자 설 방법은 없었으므로 재활학교(특수학교)의 중학교 동창에게 그녀의 보조기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척수장애를 가진 그 친구가 종종 재활치료를 받을 때 착용하던 장비였다. 금속형 구조물로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를 고정해, 하체가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붙잡는 역할을 했다.

ⓒ한성원


그 보조기는 내 다리보다 길었지만 나는 그것을 적극 이용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둥그렇게 감싸는 부분을 밟고 올라서서 양팔로 단상을 꽉 잡으면, 나는 30㎝ 정도 큰 키로 서는 일이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무릎 부위의 지지대를 밟자 발바닥이 너무나 아팠고, 양팔로 어딘가를 잡아도 도저히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교복 바지를 그 위에 어떻게 입는다는 말인가! 내 어리석은 시도는 금방 물거품이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소아마비가 있어 걷는 것이 어려웠지만, 미국 국민 앞에서 연설을 할 때에는 단상을 잡거나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늘 직립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참모진 앞에서만 휠체어를 썼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낙관적 전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장애인이 로봇 외골격(exoskeleton)을 착용하고 두 발로 서서 감격 어린 눈빛을 가족과 교환하는 모습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를 ‘진보’처럼 보이게 하는 상징적인 국면은 네 발로 기어가던 포유동물이 점차 허리를 곧게 펴고 직립하는 유인원이 되는 때다. 영화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지구로 귀환한 샌드라 불럭은 양서류의 모습으로 물속을 헤엄쳐 올라 진흙탕 바닥을 짚고, 네 발로 땅 냄새를 맡으며 기어간 후 두 발로 당당히 선다. 인간의 직립보행은 중력에 맞서 손의 자유(즉 기술·techne의 세계로 진입)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미래 과학기술의 청사진을 참고할 필요도 없이, 이미 전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로봇 슈트를 입고 ‘보행’하고, 청각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이 소리나 이미지를 전기신호로 바꾸어 뇌를 통해 소리나 빛을 ‘듣고’ ‘보는’ 일이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조만간 장애 여부를 떠나 모든 인간은 자기 신체를 테크놀로지로 개선하거나 테크놀로지를 신체에 결합해 지금껏 자신이 몸으로 하지 못하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테크놀로지로 신체 기능을 증강한 존재(영화 〈어벤져스〉의 캡틴아메리카를 떠올려보자), 또는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존재(아이언맨)로서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자를 우리는 사이보그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면 미래는 사이보그들의 시대가 되는 걸까? 사이보그의 시대가 된다면, 몇몇 과학자들의 낙관처럼 정말 장애인의 장애는 더 이상 사회적 쟁점이 되지 않을까?

첨단 의족을 차고 춤추는 무용수

사실 이미 장애인은 사이보그적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내 신체는 자연적(유전적)으로 콜라겐 합성에 어려움이 있어 밀도가 낮은 뼈로 이뤄져 있고, 이 때문에 뼈가 신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골절되는 일이 많았다. 테크놀로지가 이런 내 몸을 개조했다. 이를테면, 내 다리에는 뼈를 지지하는 핀이 양쪽 종아리와 허벅지에 박혀 있고, 성장기에는 일련의 외과적 수술을 통해 휘어진 다리뼈를 곧게 폈다. 이런 테크놀로지 덕분에 나는 이제 지구의 중력이나 일상적인 외부 자극으로 골절을 겪지 않는다. 물론 이 ‘개조’만으로는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할 정도의 역량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나는 휠체어라고 하는, (아이언맨의 슈트 같은) 외부 테크놀로지를 신체에 장착하기도 한다.  

 

ⓒAP Photo2012 런던 패럴림픽에서 피스토리우스(남아프리카공화국)가 결승선을 통과하며 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사이보그적 존재라고 명명할 만큼, 내 신체와 긴밀히 연결된 몇몇 테크놀로지가 장애로 인해 경험하는 나의 문제들을 정말로 해결하고 있는가? 보청기나 휠체어 같은 보조기기들은 분명 장애인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우리가 SF에서 만나는 사이보그의 놀라운 능력, 때로는 높은 수준의 매력에 비춰보면 휠체어나 보청기와 결합한 장애인의 모습은 여전히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이 초라함이란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할 수도 있다. 10년 정도만 흐르면 더 이상 턱이나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제한적인 테크놀로지인 우리 시대의 휠체어는 존재하지 않고, 영화 〈엑스맨〉의 자비에 교수가 이용하는 디자인과, 계단은 물론 물 위에서도 쉽게 움직이는 휠체어를 상용화하는 공학적 해법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문제는 현실 테크놀로지의 초라함이 아니다. 장애인의 ‘문제’가 진정 무엇인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슈퍼 장애인’을 꿈꾸던 나의 터무니없는 고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보자. 학생회장 선거에서 내 문제는 무엇이었나? 내가 직립보행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 문제였나? 만약 그것이 핵심적 과제였다면 이는 약간의 비용을 더 들인다면 현대 기술로 쉽게 해결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고교 시절 내가 맞닥뜨린 문제는 내가 설 수 없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 바닥으로, 그러니까 필요하다면 휠체어 바닥으로까지 내려앉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이 미래의 테크놀로지가 장애인의 생물학적 손상 그 자체로 인한 제약을 해소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아마 실제로 그럴 것이고, 나도 그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다. 양쪽 무릎 아래를 모두 절단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생체공학연구실의 휴 허 교수는 2014년 첨단 생체공학 의족을 직접 착용하고 TED 무대에 올라, 자신의 연구가 장애를 제거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휴는 자신의 연구진이 개발한 의족을 보스턴 마라톤 테러로 다리를 잃은 여성 무용수에게 제공했고, 그녀는 휴의 강연 마지막에 무대 위에 올라 첨단 의족을 착용하고 테러 이후 처음으로 춤을 춘다. 이 극적인 장면에서,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이 무용수는 생물학적 손상을 극복한 사이보그의 상징이 된다.

더 바닥으로 내려가서 연설했더라면

머지않아 휴가 개발한 생체공학 의족 이상으로 성능이 뛰어난 제품들이 더 저렴한 가격에 다수의 사람에게 제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장애인들은 분명 기능적 제약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이들이 동등한 존재로 대우받고, 장애가 사회적 쟁점에서 정말로 사라질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와 인간이 결합한 ‘하이브리드적’ 존재보다는 ‘순수한’ 인간을 더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각자의 테크놀로지 성능 격차가 개개인의 경제·사회적 지위에 따라 무척 클 것이기 때문이다.

2012년 런던에서 세라믹 의족을 착용하고 패럴림픽과 올림픽에 모두 출전했던 육상선수 피스토리우스는, 훌륭한 의족 덕분에 비장애인 선수들과 함께 뛰기는 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미래에 더 탁월한 의족이 개발된다면 어떨까? 만약 장애인 선수가 의족의 기술적 우수성 덕분에 올림픽에서 비장애인 선수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곧바로 공정성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실제 피스토리우스의 올림픽 출전을 두고 공정성 시비가 붙었다). 그 결과 다른 선수들도 그와 같은 첨단 장비를 다리에 착용하고 뛰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와 같은 테크놀로지를 활용할 수 있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절단 장애인 피스토리우스가, 미국의 비장애인 육상 선수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요컨대, 기술 발달은 신체 기능의 제약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신체에 따른 사회적 차별, 위계, 탁월성의 격차를 좁히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첨단 보조기나 의족을 차고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 연설하고, 올림픽에 출전하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추더라도, 언제나 의족을 찬 손상된 다리보다 더 나은 다리가 존재할 것이다. 보조기를 짚고 일어선 ‘슈퍼 장애인’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채치수 같은 친구는 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떠한 생물학적 ‘손상’을 가진 당신과 내가, 가끔은 휠체어보다 더 바닥으로 내려가서 연설하기를 선택하고, 세라믹 의족을 떼어버리고 트랙을 달리며, 한쪽 다리가 없이도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로 결심한다면 어떨까? 손상된 신체를 가진 모든 인간이 지향하는 사이보그가 반드시 그 손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유기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손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 그 자체를 테크놀로지의 일부로 삼는 유기체도, 사이보그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존재가 어떤 모습일지 지금으로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 그 윤곽 정도는 살펴볼 것이다.

기자명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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