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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서커스 예술로 진화한다

서커스가 강력한 문화예술 콘텐츠로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
한국 서커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볼 수 있었던
‘서커스 캬바레’는 영화·뮤지컬 등 다른 대중문화 장르에
밀렸던 서커스가 어떻게 되살아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무대였다.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2019년 05월 23일 목요일 제6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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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잘하면 살 판 못하면 죽을 판, 죽기 살기로 보시라, 눈 깜빡하면 못 보는 재주가 있으니.” 솟대쟁이놀이 보존회 단원들이 무대 한가운데에 솟대를 높이 세우고 양쪽으로 두 가닥씩 줄을 늘여놓고 그 위에서 ‘쌍줄백이’ 놀이를 하고 있다. 막간에 광대가 나와 관객을 한 명 불러내서 달걀이 병아리로 바뀌는 마술을 함께 하며 시간을 번다. 그러고 다시 <솟대쟁이놀이>가 이어진다.

장면 둘, 2대째 서커스를 하는 서커스 곡예사 안재근씨가 하이라이트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가방에서 달걀과 사과 그리고 볼링공을 꺼낸다. 크기와 무게가 다른 이 세 개로 저글링을 하는 것이 안씨의 주특기다. 안씨의 1인 서커스극 <스토리 서커스-근(根)>은 저글링과 외발자전거, 접시돌리기 등 그가 평생 익힌 기예로 구성된다.

장면 셋, ‘차이니즈 폴(곧게 세운 외봉)’과 외줄타기가 주특기인 안재현 봉앤줄 대표가 무대인 외줄 위에 낮잠을 자듯 누워 있다. 안씨의 공연 제목은 <태움 (Burn)>이다. 간호사들이 ‘재가 될 때까지 괴롭힌다’는 의미로 혹독한 수련 과정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인데, 안씨는 이를 자신의 공연 제목으로 썼다.

이 세 장면은 5월4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서커스 캬바레’에서 볼 수 있었던 공연 모습이다. 서커스 캬바레는 전통연희 (전통 서커스)와 근대 서커스 그리고 컨템퍼러리 서커스(현대 서커스), 한국 서커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드문 무대다. <솟대쟁이놀이>는 전통연희에, <스토리 서커스-근(根)>은 근대 서커스에, <태움>은 컨템퍼러리 서커스에 해당한다.

솟대쟁이놀이는 우리식 서커스다. 남사당패나 사당패가 주로 춤과 음악을 중심으로 연희를 했던 데 비해 솟대쟁이패는 곡예를 위주로 공연했다. 1800년대 경남 진주 지역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솟대쟁이패는 1936년 황해도 원산 공연을 끝으로 해산했다. 다행히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2013년 ‘솟대쟁이패 후예 후손 발기모임’을 발족하고 2014년 솟대쟁이놀이 보존회를 구성해 명맥을 이었다.

ⓒ시사IN 이명익
프랑스 갈라피아서커스의 서커스 아티스트 모이즈 베르니에가 <사탕의 숨결> 공연을 위해 외봉 위에 위태롭게 올라서 있다.
서커스 곡예사와 서커스 아티스트

근대 서커스를 하는 안재근씨와 컨템퍼러리 서커스를 하는 안재현씨는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안재근씨가 자신을 ‘서커스 곡예사’라고 소개했는데, 안재현씨는 ‘서커스 아티스트’라고 표현했다. 이 차이는 서커스를 바라보는 둘의 시선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안재근씨의 서커스는 기술에 방점이 찍혔지만, 안재현씨에게 서커스는 예술의 표현 도구다.

안재근씨의 부모는 대전에서 서커스단 활동을 했다. 우리나라 근대 서커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춘서커스를 비롯해 서커스단만 예닐곱이 있었다. 안씨의 부모는 다리 밑 서커스 텐트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도 서커스 무대에 올랐다. 아홉 살에 데뷔해 올해로 서커스 인생 50년이 되었다.

안씨의 공연은 절도 있으면서도 편안했다. 수십 년 서커스 무대에 선 관록이 느껴졌다. 여유와 해학을 갖춘 공연이었지만 문득문득 서글펐다. 볼링공과 달걀과 사과로 저글링을 하던 안씨는 마지막에 사과를 한 입씩 베어 먹으며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습에서 서커스를 하면서 겪었을 설움과 모진 시간이 읽혔다.

컨템퍼러리 서커스계의 스타로 꼽히는 안재현씨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하늘로 가는 길:외봉인생>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떨어지다 바닥에 임박해 멈추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관객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는 “프랑스에서 서커스 연수 중 저글링을 하다 실패하는 것까지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것을 보았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의미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커스의 화려함 이면의 것을 말하고 싶었다. 서커스를 하는 사람이 초인처럼 보이지만 당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
솟대쟁이놀이 보존회의 ‘쌍줄백이’ 놀이
ⓒ시사IN 이명익
서커스 아티스트 안재현씨의 <태움>
컨템퍼러리 서커스는 2000년대 들어서 자리를 잡은 개념이다. 계기는 우후죽순으로 생긴 지역축제였다. 안산거리극축제, 고양호수예술축제, 과천마당극축제(지금은 폐지됨) 등 거리예술 축제가 많아지면서 외국 서커스 공연 팀의 내한도 잦아졌다(지난해 포항거리예술축제가 새로 생겼다). 수준 높은 해외 공연팀의 공연과 이를 구현해내는 배우들의 잘 훈련된 몸은 우리 예술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서커스 전문 지원 기관의 등장도 컨템퍼러리 서커스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울문화재단은 2015년 광진구의 구의취수장을 리노베이션해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이하 거리예술센터)를 설립했다. 서커스와 거리예술 공연을 위한 워크숍 공간으로 서커스 사관학교 구실을 톡톡히 했다. 이곳에서 인큐베이팅 과정을 마친 신진 서커스 아티스트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창작 공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봉앤줄의 안 대표도 이곳에서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했다.

거리예술센터는 단순한 서커스 교육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판을 깔았다. 매년 5월 서커스 캬바레를 열고 매 주말 ‘서커스 시즌제’를 진행했다. 서커스 아티스트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서 실력을 입증받은 단체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거리예술축제인 ‘서울거리예술축제’의 무대에도 올렸다. 독립 프로듀서 황혜신씨는 “우리의 서커스 예술은 거리예술센터 설립 이후 공공기관 주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예술계의 자연스러운 흐름보다 속도가 빠르다”라고 말했다.

컨템퍼러리 서커스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와의 활발한 교류도 부흥에 도움이 되었다. 2016년도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교류 사업이 각 방면에서 진행되었는데, 서커스 부문의 교류도 활발했다. 이해에 한국의 서커스 아티스트들이 프랑스에 가서 연수할 기회를 가졌고 프랑스의 서커스 전문가들이 초대되어 국내에서 서커스 워크숍을 여러 번 열었다.

ⓒ창작그룹 노니 제공
창작그룹 노니의 <곡도굿> 공연 모습. 전통연희·무용·비보잉·팝크루 출신들이 모인 노니는 움직임에 관한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서울시의 전폭적인 ‘거리예술’ 지원


프랑스 국립서커스예술센터는 세계 최고의 서커스 교육기관으로 인정받는다. 프랑스에서는 주로 좌파 정부가 들어섰을 때 거리예술이 융성해졌다. 프랑스의 서커스도 이때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현재 13개의 ‘서커스 예술 거점’이 있다. 여기서 양산된 서커스 아티스트들이 전 세계의 거리예술축제 개막 공연과 폐막 공연을 도맡다시피 한다. 시민의 문화 향유를 중요시하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거리예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서울거리예술축제’로 바꾸었다.

서커스를 부활시키기 위해 거리예술센터는 2016년 ‘거리예술 비평 아카데미’를 열었다. 서커스 아티스트들의 수준은 높아지는데 이들을 알아봐줄 비평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거리예술센터의 이런 꾸준한 노력으로 서커스가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난해까지 거리예술센터 센터장을 맡았던 조동희 ‘서커스 캬바레’ 예술감독은 “서커스와 거리예술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동시에 발전해야 부흥한다. 아티스트들이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더 발전된 무대를 원해서 올해는 무대미술 관련 워크숍도 진행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인큐베이팅 과정을 거친 ‘서커스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단체 중 하나가 바로 창작그룹 노니다. 서커스 캬바레 때 노니는 문화비축기지 T4 공연장에서 <지 라운드> 전시를 열었다. <지 라운드>는 서커스를 주제로 한 전시다. 관객들이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는 것에 전시장이 반응해 조명을 켜거나 저글링하는 것처럼 공을 내뿜는다. 이런 인터랙티브한 전시를 통해 서커스가 관객의 예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노니는 T6 에코라운지에서 <리서치:서커스/연희>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서커스와 전통연희에 관한 조사 자료를 전시했다. 서커스 관계자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두루 인터뷰했는데 흥미로운 자료가 많았다. 노니의 김경희 디렉터는 “프랑스의 서커스 아티스트들과 인터뷰를 하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프랑스에는 우리의 널뛰기·그네타기와 비슷한 기술이 있는데 둘 다 그 기술에 ‘꼬레앙’이라는 말이 붙는다는 점이다. 북한의 ‘교예’가 러시아 등을 거쳐 프랑스의 서커스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지 추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5월7일 서울 대학로 공공그라운드에서는 서커스 캬바레의 부속 행사로 ‘서커스-왜? 어떻게? 어디로?’라는 오픈 포럼이 열렸다. 영화와 뮤지컬 등 다른 대중문화 장르에 밀렸던 서커스가 어떻게 부활하고 있는지 각국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행사였다. 그중 일본의 사례가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양의 서커스를 받아들인 방식이 일본을 통한 수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마상 기예가 있는 서커스를 받아들이면서 ‘곡마단’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를 우리도 고스란히 사용했다.

ⓒ시사IN 이명익
‘서커스 캬바레’ 기간 중 거리예술센터는 문화비축기지 앞마당에 ‘서커스 예술놀이터’(아래)를 열었다.
미치코 다나카 세토우치 서커스팩토리 대표는 일본 컨템퍼러리 서커스의 현재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대기업에 다니다 프랑스 서커스팀 초청을 담당했던 그는 컨템퍼러리 서커스에 반해 회사를 그만두고 프로덕션을 차렸다. 초기에 주로 프랑스 서커스팀 초청을 맡았던 이 프로덕션은 이후 일본에서 직접 컨템퍼러리 서커스 작품을 제작했다.

일본 컨템퍼러리 서커스의 베이스캠프는 가가와현이다. 폐교를 개조해 만든 ‘시오노어 에어’라는 서커스 레지던스가 있고 인근의 고토히라에서는 서커스 페스티벌이 열린다. 중앙정부의 문화예술 예산이 적은 일본에서는 민간이 서커스단을 이끌기가 쉽지 않다. 미치코 다나카 씨는 건설회사와 크레인 회사를 적극 설득해서 이들이 이동 무대를 제작해주도록 했다. 세토우치 서커스팩토리는 창단 초기부터 프랑스 서커스단과 적극적으로 교류해오며, 지금은 프랑스에서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커스오즈는 서커스가 타 장르와 어떤 식으로 융합하는지를 보여주는 서커스단이다. 서커스오즈는 서커스 텐트가 아니라 오페라하우스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거나 피보나치 수열을 작품화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클래식이나 학문과 만나도 서커스가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서커스의 확장성을 증명했다. 서커스오즈의 활동무대인 멜버른에는 국립 서커스 아카데미가 있는데, 4년제 서커스 학위 과정도 운영한다.

컨템퍼러리 서커스는 인문적이다. 늘 부상의 위험을 안고 공연하며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내비치기 때문에 서커스 아티스트는 자연스럽게 철학자가 된다. 이번 서커스 캬바레에서 공연한 타이완 포모사서커스아트의 <찰나의 빛:지금 이 순간은 얼마나 길까?>는 바로 이런 철학적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연출가 바부 리아오는 “일부러 서커스 용품이 아니라 일상 용품을 활용했다. 사물이 우리의 움직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줘 사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즉 사물에 조종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 이 작업을 해보면서 서커스는 창조를 창작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연을 보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 연출가의 역할인데 서커스는 강력한 표현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상상력의 제약을 없애주듯 서커스도 제약을 벗어나게 해준다. 프랑스 갈라피아서커스의 아티스트인 모이즈 베르니에는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을 때 관객들은 그것을 유치하다고 했다. 그런데 광대로 분장하고 같은 얘기를 했더니 관객들이 내 얘기를 다른 시선으로 받아주었다. 그 후로 서커스라는 형식이 나에게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기예를 중심으로 한 근대 서커스는 저물었지만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컨템퍼러리 서커스는 이제 막 태동하고 있다. 프랑스의 컨템퍼러리 서커스 프로듀서 줄리앙 쿠지는 “리투아니아에서 처음 컨템퍼러리 서커스를 했을 때 사람들이 생소하게 여겼다. 하지만 관심을 보였고 배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지금은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에서 서커스 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성장했다.”

컨템퍼러리 서커스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하는데, 캐나다는 서커스가 산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몬트리올 북동부의 토후 서커스지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서커스 단체인 태양의서커스 본부와 몬트리올 국립 서커스학교 그리고 가장 큰 서커스 전용극장 중 하나인 원형극장이 있다. 이 서커스지구가 있는 생미셸은 원래 몬트리올의 대표적 변두리 지역으로 이민자와 저학력자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 컨템퍼러리 서커스의 성지가 되었다. 태양의서커스의 대표작인 <퀴담>이나 <쿠자>는 국내에서도 공연되었다. 지난해 전체 매출이 1조원을 넘어섰다.

컨템퍼러리 서커스, 모든 장르 빨아들여


컨템퍼러리 서커스는 모든 장르를 빨아들이고 있다. 토후의 스테판 라부아 프로듀서는 “토후는 모든 형태의 서커스가 가능한 곳이다. 이곳의 키워드는 서커스, 지구, 공동체, 이 세 가지다. 서커스는 모든 장르와 모든 언어를 통합할 수 있다. 서커스를 다른 문화예술 장르에 감염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라고 말했다.

서커스가 산업적으로 각광받는 것과 함께 주목할 부분은 서커스 기예가 무대 위에 서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개인기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서커스 기예 실력은 공연계의 반도체칩과 같다. 예술의 융복합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 더 높은 수준의 기예 실력이 예술적 성취를 위한 밑바탕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개그 팀으로 출발한 옹알스가 해외 페스티벌 무대에서 각광받은 것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했기 때문이고,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 계기는 바로 저글링 실력이었다. 이런 기예 실력을 바탕으로 옹알스는 단순한 슬랩스틱 코미디 이상을 구사할 수 있는 팀이 되었다.

컨템퍼러리 서커스 아티스트들에게 기예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핵심 도구다. 창작그룹 노니의 김경희 디렉터는 “팝크루 하는 청년들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자신들이 예술을 한다는 생각도 예술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프랑스 서커스 아티스트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그들에게 자극이 되길 기대했다.” 흥미로운 점은 서커스를 단순히 수단으로 생각해 시작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서커스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안재현 봉앤줄 대표는 “처음에는 서커스의 그로테스크함과 광대스러움을 연극에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서커스 자체의 표현력에 빠져들었다. 기예의 수준이 가장 중요하다. 나도 아직 목표한 것의 60% 정도밖에 오지 못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무용 안무가에서 컨템퍼러리 서커스 창작자로 변신한 정성태 화이트큐브프로젝트 대표도 비슷한 사례다.

서커스가 여전히 강력한 문화예술 콘텐츠라는 것은 서커스 캬바레의 인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커스 캬바레가 열릴 때 문화비축기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문화비축기지라는 훌륭한 공간 플랫폼을 만들었지만 채울 수 있는 콘텐츠가 없어서 전전긍긍했는데 서커스 캬바레가 훌륭한 솔루션이 되어주었다.

짧은 시간에 빨리 성장했지만 한국의 컨템퍼러리 서커스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아직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정성태 대표는 “무용에서 출발해 서커스에 정착했는데 선행 모델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작품을 하려고 해도 한계가 많았다. 서커스를 할 줄 아는 무용가가 필요한데, 작품을 구현해줄 배우 캐스팅하기가 쉽지 않다. 연극이나 체육, 무용 등 신체를 이용하는 전공 학생들에게 기예를 교양 과목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아직 컨템퍼러리 서커스에 대한 인식은 높지 않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안산거리극축제 예술감독 선임 과정에서 있었다. 서커스와 거리예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비전문가 탤런트를 시장이 독단으로 선임하자 현장 예술가들이 크게 반발했다. 한 서커스 아티스트는 “역설적으로 안산거리극축제 예술감독 선임 문제 때문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우리가 왜 목소리를 내고 싶은가 생각해보니 우리는 단순히 축제에 참여하는 이벤트 업자가 아니라 아티스트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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