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6일 한국은행이 올해 1분기의 실질 국내총생산 속보치를 발표했다. 1분기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4분기 대비 -0.3%를 기록했는데, 이 추세라면 올해 성장률도 1.8%에 머무를 전망이다. 필수적 정치 개혁을 온몸으로 막아내던 보수 야당과 언론, 그리고 전직 경제관료, 나아가 젊은 학자들이 단비를 만난 듯 일제히 정부의 무능을 성토했다.

건설투자는 0.1%(작년 동기 대비 7.4%) 줄었고, 설비투자는 무려 -10.8%(작년 동기 대비 -16.1%)를 기록했다. 반도체와 자동차 모두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올해 경제성장률은 1%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애초 이 정부의 출범을 축복했던 2017년의 경제성장도 투자가 이끌었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붐 정책은 건설투자를 7.6% 증가시켰고, 2016년부터 반도체 수출이 급증하자 설비투자도 14.6% 늘어났다. 이 두 항목만으로도 성장률이 2%가량 올라갔다. 이러한 반도체 요인을 뺀다면 2015년 중반 이후 경제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국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빈약한 까닭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이 산업을 공부한 1990년대에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가 발표한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은 이 진단의 4차 혁명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삼성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디램은 단순한 기억장치이고,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명령과 실행이 담겨 있는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이다. 말하자면 반도체에 특정한 명령과 실행을 장착한 시스템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옛날의 손톱만 한 지식에 기대어 거칠게 요약하면, 디램의 생명은 집적이고 비메모리의 생명은 프로그램이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집중적 투자를 통해 가장 빨리 고집적 칩을 생산해내야 성공한다. 한국의 재벌이 성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어떤 산업에서 어떤 용도로 필요한지에 따라 각양각색이므로 설계 기능(보고서의 ‘팹리스· fabless’)이 생명이다. 대량생산을 할 수 없으므로 소규모 기업이 고가의 반도체 생산설비를 모두 갖춘 파운드리(공장)를 만들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타이완의 중소기업 네트워크가 클러스터의 공동 설비를 이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이 미루고 미루던 시스템 반도체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유는 여러 가지다. 중국에는 화웨이처럼 세계 10대 기업에 드는 전기·전자 대기업(하류 부문)이 존재하지만, 생산요소를 공급하는 상류의 반도체 기업은 그동안 값싼 제품만 생산해왔다. 하지만 현재 미·중 무역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인 ‘제조 2025’에는 메모리 분야도 포함돼 있으며, 계획대로라면 몇 년 내에 삼성을 바짝 추격할 것이다. 특히 실리콘밸리에 흔전만전인 중국인 기술자와 타이완의 중소기업들, 그리고 칭화유니그룹의 공격적인 M&A는 그동안 뒤처졌던 메모리 분야를 단기간에 성장시킬 전략적 자원들이다. 중국 국영기업은 메모리 분야에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4차 혁명, 그중에서도 사물인터넷에 집중하고 있는 삼성에 다종다양한 고품질 시스템 반도체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는 빈약하기 그지없으며 삼성이라는 공룡의 존재도 그 원인 중 하나다. 과연 삼성은 1970년대 실리콘밸리의 휴렛팩커드처럼 혁신 중소기업들에 기술과 공동 장비라는 공공재를 공급할까, 아니면 그들의 혁신 성과를 그동안 그랬듯이 약탈할 것인가? 정부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도 자동차건 반도체건, 정부가 산업정책을 활용해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찬성한다. 그 정책은 탈중심적 실험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재벌 등 기득권의 이해를 뛰어넘는 ‘자율적 발전국가’의 성격을 회복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이 산업의 특징 중 하나인 표준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 제휴가 미·중 기업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외교도 일정한 몫을 해야 한다. 현재의 보고서에 존재하지 않는 이런 ‘비전과 전략’을 과연 현 정부가 주도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기자명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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