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득은 1777년생으로, 어려서부터 가족과 함께 홍어 장사를 해왔다. 좋은 물건을 찾기 위해 배를 타고 서해의 작은 섬을 순례하는 게 일상이었다. 남도의 평범한 상인이었던 그에게 특별한 운명이 찾아온 것은 스물다섯 살 때였다. 여느 때처럼 홍어 매입을 위해 바다에 나갔다가, 큰 풍랑을 만났다. 열하루 동안 바다를 헤맨 끝에 도착한 곳은 류큐. 지금의 오키나와였다.
당시 류큐 왕국에는 이미 문순득 일행과 같은 표류민을 보살피고 본국으로 송환까지 해주는 공식적인 시스템이 있었다. 이는 예부터 바다를 통한 국제무역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던 류큐 왕국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일행과 함께 매일 1인당 쌀 한 되 다섯 홉, 채소 여러 그릇, 하루걸러 돼지고기를 지급받았고, 몸이 아프면 의료 서비스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도착한 지 아홉 달이 되던 1802년 10월, 일행은 류큐 조정의 알선으로 청나라로 돌아가는 사신단에 포함되어 귀국을 위한 여정에 올랐다. 이들을 따라 마카오로 향한 뒤, 육로로 베이징까지 가서 조선 사신단을 만나 고향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운명의 신은 아직 문순득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그를 실은 배는 다시 풍랑을 만나 이번에는 필리핀 루손 섬에 표착한다. 루손에서는 별도로 표류민을 보살펴주는 제도가 없어, 당장 먹고살 걱정을 해야 했다. 놀라운 친화력과 언어 습득력, 그리고 생활력이 뛰어났던 문순득은 중국인 가톨릭교도에게 몸을 의탁하는 한편, 새끼를 꼬아 장에 내다 팔아서 담뱃값과 술값을 벌었다.
1803년 8월, 문순득 일행은 마침내 루손을 출발해 한 달 뒤 광둥의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해 12월 마카오를 출발해 다섯 달 만에 베이징에 도착한 이들은 반년의 기다림 끝에 조선 연행사와 함께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향할 수 있었고, 이듬해인 1805년 1월에야 고향인 우이도에 발을 디뎠다.
어쩌면 외딴섬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그의 기막힌 이야기가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도 운명적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인근 바다의 어족 자원에 대한 기록인 〈자산어보〉를 쓰는 과정에서 문순득을 알게 되고, 그의 이야기를 날짜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에는 남자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젓가락’(포크)으로 먹는 루손 귀족과 현지 성당, 그리고 서구 문물은 물론이고 루손과 류큐의 궁궐, 의복, 선박, 토산물 등에 대한 묘사가 상세히 담겨 있다. 게다가 책 말미엔 112개 단어를 류큐어, 필리핀어로 번역해 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아시아 비교문화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제주에 표류한 루손 사람들이 8년이 지나도록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순득은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내가 나그네로 떠돌기 3년. 여러 나라의 은혜를 입어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는데 이 사람들은 아직도 제주에 있으니 안남(베트남), 여송(루손)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부끄러워서 땀이 솟는다.”
오늘날 각종 연구서 등으로 그가 다시 조명되고 있는 것은, 이국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가득했을지도 모르는 그의 여생에 바치는 때늦은 위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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