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의 시간이 시작됐다. 4월29일에서 4월30일로 넘어가는 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은 개혁 법안들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하는 데 성공했다. 통상 법안이 제출되면 해당 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를 차례로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트랙에 태운 법안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최종 관문인 본회의에 자동 상정된다. 선거제 개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등 한 발자국 진전도 쉽지 않아 보였던 3대 안건은 이제 330일 안에 표결에 부쳐진다(28쪽 상자 기사 참조). 패스트트랙을 저지하기 위해 자유한국당은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키며 대대적인 육탄 방어에 나섰다. 캐스팅보트를 쥔 바른미래당의 선택도 막판까지 흔들렸다. 〈시사IN〉은 제607호에 이어 패스트트랙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동물국회’라는 양비론 프레임이 아니라, 정확히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서다.
 

ⓒ시사IN 신선영4월26일 사개특위 회의장 앞에 드러누운 자유한국당 의원들로 인해 사개특위 위원들이 회의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4월26일 오후 5시40분
국회 본청 702호 의안과

온라인으로 법안이 제출되는 건 국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안과 앞을 점거했던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더는 이곳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10분 전인 오후 5시30분, 검경 수사권 조정 내용이 담긴 형사소송법과 공수처 설치법이 전자 발의 시스템을 통해 의안과에 제출됐다. 이로써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에 올리고자 했던 법안이 모두 발의됐다. 밤새 격렬한 대치로 훼손된 문짝에는 ‘현장보존. 4월26일 새벽 의안과 진입자가 파손’이라는 문구가 출력된 A4 용지가 붙어 있었다. 자유한국당은 전날인 4월25일부터 의안과 사무실을 원천봉쇄했다. 이은재 의원을 비롯한 일부 자유한국당 의원은 사무실 내부에 진을 쳤다. 이들은 팩스로 접수된 법안을 빼앗고 나중에는 팩스의 전원을 뽑아버렸다. 예상치 못한 전자 발의로 자유한국당은 허를 찔렸다. 남은 관문은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와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뿐이었다.

4월26일 저녁 7시45분
220호 특별위원회 5회의장 앞

사개특위 회의가 저녁 8시 220호에서 소집됐다. 사개특위에서는 공수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할지 결정한다. “지금 대형 갖추고 안 움직일 거니까 인간 사슬을 만들어주세요.” 출입문을 가로막고 앉은 자유한국당 의원 50여 명이 드러눕는 연습을 되풀이했다. 저녁 8시14분께 휠체어에 앉은 이상민 위원장을 필두로 민주당 사개특위 위원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복도를 메운 당직자들은 “헌법 수호” “정의는 이긴다” 따위 구호를 외쳤다. “길을 비켜달라”는 이상민 위원장의 호소는 구호 소리에 묻혔다. 민주당 사개특위 위원의 손에 들린 ‘국회법 제166조(국회 회의 방해죄) 징역 5년’ 피켓을 본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새로운 구호를 제안했다. 전 의원이 “다 잡아”를 선창하자 나머지 의원들이 “가라”를 외쳤다. 30여 분간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민주당 의원들이 220호 앞을 떠났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애국가를 합창했다.

4월26일 밤 9시10분
445호 행안위 회의실 앞

저녁 8시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실(445호)로 예정됐던 정개특위 역시 자유한국당의 저지로 열리지 못했다. 선거제도 개혁 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 여부는 정개특위에서 정해진다. 정개특위 위원장인 심상정 정의당 의원과 간사인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445호 앞에서 대치했다. 장 의원은 “심상정 의원 실망이다. 소수 정당이라서 이런 마음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쩜 이럴 수 있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4월26일 밤 9시33분
506호 문체위 회의실

이상민 사개특위 위원장은 장소를 220호에서 5층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506호)로 변경해 사개특위 회의를 열었다. 채이배 의원 자리에 앉은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이 발언권을 달라고 거칠게 항의했다. 바른정당 출신인 유승민·지상욱·하태경·이혜훈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오 의원의 뒤에 서 있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 원내대표가 4월22일 패스트트랙 합의에 도달한 이후 바른미래당 내 갈등은 격화됐다. 바른정당계 의원들은 3대 안건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반대했다. 사개특위 위원이었던 오신환 의원은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예고했다. 패스트트랙 지정에는 재적 위원 5분의 3 동의가 필요하다. 바른미래당 몫 위원 2명의 이탈이 없어야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태울 수 있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4월25일 사개특위 위원 오신환·권은희 의원을 채이배·임재훈 의원으로 교체했다. 다음 날 바른정당계 의원들은 크게 반발하며 지도부 불신임을 들고 나왔다. 내홍이 정리되지 않자 채이배 의원은 사개특위에 불참했다. 정개특위 위원인 김성식·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도 이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회는 패스트트랙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주말 동안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4월29일 오후 5시, 소강상태였던 패스트트랙 지정 움직임이 급물살을 탔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당내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권은희 의원의 공수처 신설 법안을 별도로 발의하겠다며 승부수를 띄웠다. 이미 여야 4당 합의로 발의된 공수처 법안과 함께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해달라는 요구였다. 오후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홍영표 원내대표는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사개특위와 정개특위에 각각 2명인 바른미래당 표가 이탈할 위험은 사라졌다.

 

 

ⓒ사진공동취재단4월29일 열린 사개특위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이상민 위원장(왼쪽 앉은 이)에게 소리치고 있다.

4월29일 저녁 7시30분
445호 행안위 회의실 앞

정개특위와 사개특위 회의가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220호와 445호 앞에서 자유한국당은 ‘현안별 비상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바른미래당 표가 확실해진 만큼 개회는 곧 패스트트랙 지정을 의미했다. 자유한국당은 다시 한번 원천봉쇄 전략에 돌입했다. 445호 출입구는 프린터, 사물함 등으로 가로막혔다. 비상 의원총회에 참석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헌법이 무너지느냐 마느냐 절체절명의 밤이다. 저부터 앞장서서 끝까지 투쟁하겠다”라고 말했다.

 

 

 

 

ⓒ사진공동취재단장제원 자유한국당 간사(오른쪽)가 정개특위 회의에서 김종민 민주당 간사에게 항의하고 있다.

4월29일 밤 9시30분
국회 3층 제2회의장

국회 중앙의 로텐더홀과 맞닿아 있는 대형 강당인 제2회의장에 민주당 의원들이 집결했다. 회의를 앞두고 있는 사개특위·정개특위 위원들도 이곳으로 모였다. 홍영표 원내대표가 의원들 앞에 섰다. “한 시간 전에 국회를 한 바퀴 돌았다. 자유한국당이 더 이상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여전히 사개특위 회의장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국회가 왜 이렇게 무법지대가 됐는지 모르겠다. 국민의 명령을 결코 저지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겠다.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의원님들께서 도와달라.” 의원총회가 비공개로 전환될 무렵 정동영 대표를 비롯한 민주평화당 의원들이 제2회의장을 방문했다. 정동영 대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과 민주당의 이해찬 대표, 홍영표 원내대표가 악수를 나누었다. 바른미래당 사개특위 위원인 채이배·임재훈 의원도 이곳에서 대기했다.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이 찾아와 “우리 당 사개특위 위원이 여기 숨었다. 창피하니까 나오라고 해달라”고 했으나 소득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4월29일 밤 10시17분
220호 특별위원회 5회의실 앞

복도를 꽉 메운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당직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민주당) 의총 20분에 끝나니 스탠바이!” 곧이어 사개특위 민주당 간사인 백혜련 의원이 220호 앞에 등장했다. 나머지 위원들은 없었다. 혼자 서 있던 백 의원은 나경원 원내대표와 대화를 시도하다 잠시 뒤 돌아갔다. 곧이어 사개특위 회의 장소가 506호로 변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4월29일 밤 10시45분
506호 문체위 회의실 앞

국회의원, 보좌진, 당직자, 기자, 유튜버가 갑자기 몰려들어 506호 복도는 아수라장이 됐다. 사방에서 “어어어!” “밀지 마요. 밀지 마”라는 비명이 터졌다. 나경원 원내대표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회의실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을 나라답게 만들 수 있어? 나오세요!”

4월29일 밤 10시52분
506호 문체위 회의실

“성원이 됐으므로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제11차 회의를 개회하겠습니다.” 이상민 사개특위 위원장이 의사봉을 세 번 내리쳤다. 회의실에 들어온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좌파독재” “독재타도”를 외치고 위원장석을 에워쌌다. 소란이 이어지자 이 위원장이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회의 방해가 의무입니까. 왜 회의 장소를 막았어? 그걸 부끄러워해야죠. 질서유지권 발동했으니 조용히 하세요.” 밤 11시45분 투표가 시작됐다. 자유한국당 위원 7명은 참여하지 않았다. 재적 위원 18명 중 11명의 찬성으로 공수처 신설법(여야 4당 안, 바른미래당 독자 안)과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이 패스트트랙에 올랐다.

4월29일 밤 11시
604호 정무위 회의실

제9차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역시 본래 예정됐던 행안위 회의실(445호)이 아닌 정무위원회 회의실(604호)에서 열렸다. 445호 앞에 대기하며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진두지휘하던 장제원 의원이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간사인 장제원 의원이 특유의 목청을 높이며 의사 진행 발언을 요구했다. 심상정 위원장이 이를 허락했다. 자유한국당 김재원 위원은 “숫자가 많다고 해서,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게임 룰을 만들어 표심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에서 분명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라고 여야 4당을 비난했다. 민주당 기동민 위원은 “자유한국당은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어놓고 불법, 폭력을 사주하는 사태에 이르게 했다. 당직자, 보좌진들 인생에 빨간 줄이 그어지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하냐”라고 응수했다. 자정을 10분 앞두고 심 위원장은 차수를 변경하기 위해 산회를 선포했다. 민주당 위원 한 명이 “사개특위는 방금 다 끝났다”라고 말하자 심 위원장은 “우리는 정개특위니까 인내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진공동취재단5월2일 패스트트랙 법안 철회를 요구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당협위원장 5명이 국회 본관 계단 앞에서 삭발식을 했다.

4월30일 자정
604호 정무위 회의실

정개특위 회의가 속개되고 신속처리 안건 지정을 결정할 투표가 시작됐다. 사개특위가 끝나자 합류한 자유한국당 의원과 당직자들이 외치는 “독재좌파” 구호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다. 위원들이 투표를 위해 줄을 선 가운데 기표소에 들어간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나오지 않았다. 심상정 위원장이 “회의 방해로 규정하겠다”라고 했지만 김 의원은 “아직 결정을 못했다”라며 버텼다. 결국 김 의원을 개표소 안에 둔 채로 투표를 종료했다. 개표 결과 찬성 12표로 패스트트랙 지정이 통과되었다. 심 위원장은 가결을 선포하며 “방금 전 제가 두드린 의사봉은 개혁의 망치”라고 말했다. 이어 심 위원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은 신이 영역이지만 가능한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정치인의 소명이다.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되면 최장 330일이 걸리지만 선거 일정을 감안해 연내에 처리될 수 있도록 여야 의원들과 함께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4월30일 0시38분
604호 정무위 회의실 앞

정개특위 회의가 끝났다. 2020년 21대 총선의 룰을 바꿀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입법이라는 목적지에 한 걸음 다가섰다. 정개특위 위원들이 회의실에서 퇴장했다. 자유한국당 의원 수십 명이 “밟고 지나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복도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날 오후 2시에 자유한국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박대출 의원이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오늘 자정부로 20대 국회는 죽었다. 민주주의도 죽었다. 사그라진 민주주의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 작은 저항의 표시로 머리카락을 깎았다”라고 말했다. 5월2일 ‘문재인 좌파 독재 정부의 의회민주주의 파괴 규탄 삭발식’에서 김태흠 의원을 비롯한 의원 4명이 머리카락을 밀었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이날 청와대 앞에서 옥외 최고위원회를 열고 장외 투쟁을 선포했다. 의회 정치를 마비시켰던 육탄 방어가 이제 막 국회 담벼락을 넘어섰다.

 

 

기자명 김연희·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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