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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범죄’일수록 물어야 할 게 많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09일 목요일 제6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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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할 때마다 듣는 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이 있다. 4월17일 아침, 앵커 목소리는 다급했다. 경남 진주시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어느 남성이 자기 집에 불을 지른 후 대피하는 주민들을 흉기로 살해했다는 내용의 긴급 속보였다. 앵커는 신속하게 현장에 있는 기자를 연결해 사건 정황을 알렸다. 사건이 난 아파트 옆 동 주민 할머니도 인터뷰했다.

그 과정에서 앵커는 이 사건을 “묻지마 테러가 분명해 보인다”라며 확신했다. 사건이 새벽에 발생하여 다른 언론사에서 제대로 된 기사가 나오기 전이었고,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도 사건을 목격한 게 아니어서 제공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묻지마 테러라기보다는 계획적인 거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계획한 것은 맞지만 칼을 아무에게나 휘둘렀다는 점에서 묻지마 테러”라며 재차 강조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마치 ‘묻지마 테러’이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런 사건일수록 신중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단정 지었을까? 비단 이 사건, 그 앵커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언론이 너무 쉽게 ‘묻지마’의 함정에 빠진다.

선택적 증오 범죄가 묻지마 범죄로 둔갑
ⓒ정켈

2016년 5월17일도 마찬가지였다. 30대 남성이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공용 화장실에서 2시간 넘게 잠복한 끝에 20대 여성을 살해했다. 검거된 그는 “여성들로부터 무시당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라며 범행 동기를 밝혔고, 여성을 특정하여 살해한 정황도 드러났다. 그러나 언론과 수사 당국은 기어이 그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결론지었다. 많은 여성들이 여성혐오 범죄로 볼 요건이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그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을 비롯한 어린이나 노약자를 대상으로 한 ‘선택적 증오’ 범죄가 일어났지만 상황은 반복됐다.

이번 사건도 그 연장선에 있다. 앵커의 확신과는 반대로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는 정황이 밝혀졌다. 그의 범행 대상은 정확하게 어린이·여성·노인으로 특정되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마땅히 질문해야 한다. 이런 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가? 막을 수는 없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묻지마 범죄’라는 말은 질문 자체를 멈추게 한다. 논문 <‘묻지마 범죄’가 묻지 않은 것>(2017)에서 저자 김민정은 묻지마라는 말의 효과를 “잠재적 피해자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약자를 선택적으로 증오하는 범죄가 왜 발생하는지, 이를 방지할 방법은 없었는지…. 가해자나 시스템을 향해 질문하게 하는 대신 피해자를 향한 단속으로 귀결된다는 의미다.

생산적인 질문을 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다. 강력범죄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조현병이다. 강남역 사건의 범인도 조현병이었고, 지난해 발생한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범인도 조현병 전력이 있었다. 이번에도 여러 언론이 범인이 과거 5년간 68차례나 조현병 치료를 받아왔다는 사실 등 그의 병력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만약 그가 조현병이 아니었다면 만취 상태나 심신미약 등 또 다른 이유를 찾아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은 어떤 존재 혹은 질병에 관한 편견을 강화하도록 성급하게 프레임을 설정한다. 강력범죄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고자 하는 질문을 막는 가장 강력한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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