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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사이보그’로 살아가는 이야기

김원영 변호사와 연재하면서 나는 미래로 가는 길을 모색해보고 싶다. 미래를 살아갈 사이보그들의 과거와
지금 이 삶, 그리고 인간 대신 세계를 재설계하는 것까지.

김초엽 (SF 작가)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09일 목요일 제6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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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들 안경 많이 끼시잖아요? 보청기도 안경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속상해하실 필요 없어요.” 처음으로 보청기를 맞추러 간 날 청능사는 내게 말했다. 중학생 나이에 난청 진단을 받게 된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말을 꺼냈는지는 몰라도, 보청기센터는 정말로 여느 안경점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었다. 청능사는 카탈로그를 펼쳐 보청기의 종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격을 듣고 충격받았다. 보청기는 안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비쌌는데, 복잡한 첨단기술이 적용된 초소형 기계이다 보니 별수 없어 보였다. 나중에 아빠는 우리 딸이 기계 귀를 단 사이보그가 됐다면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방영된 <600만 불의 사나이> 이야기를 했다.

보청기가 안경과 가장 다른 점은 가격이 아니라 최대한 겉에서 보이지 않게 설계된 기계라는 것이었다. 나는 청능사가 추천하는 대로 귀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종류의 보청기를 골랐다. 귀 모양에 맞춘 몰드를 제작하고 다음 방문 때 완성된 제품을 받았다. 청능사가 책상 위의 거울을 내 앞으로 옮겼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보청기를 귀에 넣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청능사는 친절하게 물었다. “전혀 티가 안 나죠?”

그랬다. 거울 앞의 나는 완벽하게 평범해 보였다. 귀를 답답하게 채운 이물감이 없다면 보청기는 마치 없는 것 같았다. 청능사는 거듭 강조했다. 여학생들은 머리를 기르니까 겉에서 보면 거의 모른다고. 머리를 뒤로 넘기며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 모든 것이 어울리는 안경테를 고르는 일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열여섯 살 나이에 보청기를 하게 되었고 원한다면 그 사실을 계속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권장될 터였다.

ⓒ한성원 그림
보청기는 생각보다 큰 이득을 주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스피커 소리를 못 들어서 영어 듣기평가를 망치거나 친구들의 말을 자주 놓쳤다. 청능사는 언어 재활훈련을 권했는데, 정보를 찾다 가본 곳은 보청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였다. 카페 회원들은 보청기를 조율해가며 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전화를 하며 살아가는 법을 공유했다. 가끔 장애인 등록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글이 올라왔다. 답은 반반이었다. 등록을 하는 게 뭐 어때서 그러냐는 반응과, 굳이 장애인 꼬리표를 달 필요가 있을까 하는 반응이었다. 나는 장애인 등록을 하는 대신 발음 연습을 했고 잘 들리지 않는 말소리를 편법으로라도 알아듣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곳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서로 격려하며 미래를 기약했다. 더 좋은 성능의 보청기가, 새로운 난청 치료제가, 완벽한 기술의 인공와우가 개발될 그날을 기다리면서.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내가 보통의 삶을 흉내 내는 일이, 언젠가 정상성을 ‘회복’할 날을 기다리는 일이 당연한 것인 줄로 믿고 살았다. 아빠의 말대로 나는 수백만원짜리 기계를 착용한 사이보그였지만 뛰어난 성능의 사이보그 요원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간이 되지 못한 불완전한 사이보그에 가까웠다.

완벽한 보청기를 차고 폐 끼치지 않기

기술은 늘 정상성의 회복을 약속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아주 뜬금없는 계기로 상기하곤 하는데, 작가 활동을 시작하고 신문에 실렸던 한 인터뷰도 그런 계기 중 하나였다. 인터뷰의 도입부에는 내가 후천적 청각장애인이어서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었다는 언급이 짧고 극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기사는 주로 내 작품과 SF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전체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불쌍해. 그래도 언젠가 청력 회복할 기술이 나올 것임.’

약간 떨떠름한 정도로 넘겼지만 어쨌든 그런 기술의 이미지는 강력한 모양이다. 기술은 낙관적인 미래를 말한다. SF를 쓰고 테크 리뷰를 찾아 읽고 과학 잡지를 종류별로 구독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더 자주 착각에 빠진다. 언젠가는 질병도 장애도 사라진 세계가 올 것이라고. 사이보그들은 이미 이 시대에 도착해 있지 않느냐고. 텔레비전 광고를, 유튜브를, MIT 미디어랩의 홍보 영상을 보라고. 인류는 정말로 한계투성이 신체로부터 해방된 포스트휴먼으로 가는 첫걸음에 이미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술이 나에게 회복을 약속할 때 나는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되는 나를 본다. 나는 최대한 장애인 ‘티’를 내지 않으며 정상성을 수행하는 존재로 살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을, 그것을 벗어나는 순간 나에게 향하는 싸늘한 시선들을 생각한다. 세계는 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설계되었다. 기술은 그 전제를 공고히 한다. 기술이 약속하는 미래는 내가 완벽한 보청기로 도움을 받고 청신경을 회복해서 무사히 소리를 듣는 미래다. 그럼으로써 내가 더 이상 말을 되묻지 않고 대화를 끊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미래다.

기술이 모든 사람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 가능할까. 길 가는 소설가를 붙잡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유토피아적인 기술을 제시해보라. 그는 그 기술로부터 손쉽게 디스토피아를 고안해낼 것이다. 발전한 기술을 가진 사회라 해도 반드시 누군가는 그 기술과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된다. 아무리 미래를 앞당겨도 누군가는 여전히 엉터리 사이보그로 이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삐거덕거리는, 기계와 불화하는, 정상성을 수행하려고 수없이 시도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러니 인간을 재설계하는 대신 세계를 재설계하는 것은 어떨까. 나는 장애를 부정하지 않는 기술을 상상해본다. 독립적이고 완전한 정상 인간에 맞추어 모든 인간을 향상하는 대신,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 의존하며 함께 살아가도록 돕는 기술을 생각해본다. 그런 기술과 미래는 멀리 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한편 기술만으로 그 미래를 실현하는 것은 어렵기에 이 상상에는 다양한 관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번 연재에서 그 미래로 가는 길을 모색해보고 싶다. ‘엉터리 사이보그’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계와 기술 문명이 장애를 가진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이보그들은 어떤 계기로 정상 인간 밖의 정체성을 수용하는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이보그가 되기를 선언하고 탐구할 때, 장애인 사이보그인 우리는 정말로 정상성을 해체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통해 언젠가 미래를 살아갈 사이보그들의 과거와 지금 이 삶을 말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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