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추천한 한 문학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이 거의 비슷비슷해요. 함께 모여서 매일 세미나를 하는 것처럼. 심보선 시인의 시집을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시적 상상력이 굉장히 남달라요.”
심보선 시인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황동규 시인과 문학평론가 김주연씨는 이 시에 대해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과도 무관하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곧잘 사용하는 상투어들이나 빈말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이 시인에게 ‘독창성’이라는 낱말은 데뷔 때부터 친화력을 가진 단어였다. ‘풍경’의 1연을 잠시 읽어보자.

‘비가 갠 거리.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신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집의 마지막 대목은 오랫동안 입속에 남는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올해 심보선 시인은 데뷔 이후에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펴냈다.

첫 시집이 나오는 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예술사회학을 공부하기 위해 8년 동안 유학을 한 것도 한 이유이리라. 심보선 시인은 “이른 나이(24세)에 등단하고 고민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나만 만나면 ‘풍경’ ‘풍경’ 했다. 그 시를 읽은 유하 시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21세기 전망’ 동인이 되었는데도, 정작 나는 시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했다. 쟁쟁한 선배 시인들을 보고 ‘나는 시인이 아닌가 보다’ 싶었다(웃음).” 그에게 시는 시인 네루다의 말처럼 ‘시인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시가 시인에게 오는 것’이었다.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문장이 ‘시적 순간’을 열고, 그 순간에 몰입하고, 거기서 하나의 공간이 열리는 것. “데뷔작 ‘풍경’도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약국이 있고, 공업사가 있고, 비가 오면 고인물에 기름이 뜨는 우리 동네. 소시민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어떤 순간, 일상인데 비일상적인 순간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는 시가 올 때마다 시를 썼다. 그래서 과작이 편했단다.

그에게 시는 ‘누구에게 보이지 않는, 나 혼자만의 비밀’ 같은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시를 쓰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입대할 때 습작 노트를 맡기고 갔던 친구 한 명 말고는. 홀로 시를 썼다. ‘상상력이 독특하다’는 말을 듣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심보선의 시집을 추천한 평론가들의 약평은 이렇다. “심보선의 언어는 집단의 고통이면서 개인의 고통인 현실을 무미건조하게, 그러나 묘하게도 비극적으로 드러낸다. 현재 한국시의 언어가 점점 상실하고 있는 자본주의 비판도 있고, 상징적 권력인 아버지 이야기도 있다. 그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과 집단의 이중주이다(박수연).” “한 권의 시집을 통해 1990년대를 거쳐 2008년에 이르는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94년에 등단해 14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낸 더딘 걸음이 이 시인에게는 복일 수도 있으리라. 그는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시대를 담아내고,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성찰의 알갱이들을 곳곳에 박아놓았다(오창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어찌할 수 없음”

심보선 시인은 “시가 만들어내는 공감, 시가 수용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과 다양한 여백을 만들어낸 것이니까. 그는 자신의 시를 ‘어찌할 수 없음’이라고 말했다. “이 세계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고. 그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어찌할 수 없음. 이런 것을 멍에로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고 관계를 맺을 때 생기는 파열, 갈등, 체념. 그런 정서가 나에게 있는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그는 망설이다가 표제작을 꼽는다.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략)’ 이 시를 읽다가 여러 번 눈길이 멈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편지를 읽을 때처럼.

추천에 참여해주신 분 : 고영직(문학 평론가) 박수연(문학 평론가) 신형철(문학 평론가) 오창은(문학 평론가) 이명원(문학 평론가) 이문재(시인) 임규찬(문학 평론가) 최성실(문학 평론가).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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