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의 풍경
김정선 지음, 포도밭 펴냄

“가끔, 아니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내게 삶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고 흘려보낸 10초의 연속이라고.”

타이완의 한 밀크티 브랜드는 ‘3시15분’이다. 첫눈에 잘 지은 이름 같았다. 〈오후 네 시의 풍경〉이라는 제목을 보고 그 밀크티가 떠올랐다. 그리고 금세 이 책 제목의 지지자가 되었다.
왜 오후 네 시인가? 저자의 말은 이렇다. “오후 네 시는 뭐랄까, 이 세상 시간 같지 않은 시간, 누구의 시간도 아닌 시간 같달까. 하루를 마감하기엔 이르고, 그렇다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인 데다, 출근 전과 한창 일하는 시간은 물론 퇴근 후의 풍경까지 머릿속에 그려보면, 의외로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인 것도 같다.” 외주 교정자로 오랫동안 일해온 저자가 이런 오후 네 시에 어울리는 짧은 에세이를 묶었다. 그 풍경의 여운이 담백하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천천히 읽고 싶은 책.

불가능한 누드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박석 옮김, 들녘 펴냄

“중국의 문인화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쓴다.”

서양 미술에서 누드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온 시대를 관통해 조각에서 회화까지 온 장르를 통틀어 미술 전반을 하나로 이어주는 ‘고리’다. 하지만 중국 미술(한국과 일본도)에서 누드는 전 시대를 통틀어 ‘실종’되었다. 저자는 중국 미술에서 누드가 불가능했던 조건이 서양 미술에서 누드가 가능했던 조건과 맞닿아 있다며 이를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서양에서 누드가 육신과 발가벗음 사이, 욕망과 수치심 사이를 중재하며 아슬아슬하게 미의 기준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누드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럽 아레나
최나욱 지음, 에이도스 펴냄

“기왕 클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적나라하게 제 욕망을 투사하는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버닝썬이 유명해졌지만, 강남의 대표적인 클럽은 따로 있다. 아레나는 강남 유흥구역에서 몇 년째 매상 1위를 독차지하는 클럽이다. 한적한 새벽 강남대로 어귀 클럽 아레나 입구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선다. 저자는 월간 〈스페이스〉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세속적 가치가 극대화된 장소로서 클럽이 지금 이 시대를 다양하게 증명한다고 본다. 외모를 따져 입장을 허가하고, 테이블 가격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룰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공간을 세세하게 뜯어보았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목이 여럿 있지만 홍대·이태원과 강남 클럽의 차이, 아레나 앞 쌀국숫집이 성업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이 궁금하다면 읽어볼 만하다.



사람의 자리
전치형 지음, 이음 펴냄

“과학은 공동체의 삶 속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학창 시절부터 ‘과포자(과학을 포기한 사람)’였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조적인 소릴 해댔다. 취재를 하면서 과학이 우리 삶과 죽음에 얼마나 밀접한지 깨달았다. 인터넷 통신망 화재 사건에서 설비를 이해하는 데, 세월호의 블랙박스 데이터를 파헤치고 6825t의 배를 뭍으로 꺼내는 과정에도 과학적 이해가 필요했다. 과학 잡지 〈에피〉 편집위원이자 카이스트 교수인 저자는 로봇이 대체할 직업을 말하기에 앞서, 박수받으며 한국에 들어온 인공지능 로봇 소피아와 난민 인정 절차를 기다리며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묻는다. 제대로 된 이동권이 없는 장애인과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소피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는 과학을 통해 한국 사회를 되묻는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히틀러는 ‘유대인이 하느님의 살해자’라는 교리를 믿고 있었다.”

사람들은 히틀러가 성적으로 불구였으며 그것이 그를 전쟁광으로 만든 이유 중 하나라고 쑥덕거린다. 젠체하는 지식인들은 히틀러에 대해 파괴적 야심을 대중 선동으로 감춘 기회주의자라고 가르친다. 이에 비해 저자는 ‘발로 뛰어 만든’ 기록만이 특정 인물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실천적으로 가르쳐준다. 저자는 방대한 문서 자료는 물론 청년 히틀러의 하숙집 주인, 노숙자 시절 동료, 그의 장군과 부하 직원, 당대의 외교관과 국가 정상 등 수백명을 인터뷰하고 교차 검증까지 거쳐 히틀러와 그의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출판사 측은 “일부 정치인은 히틀러를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라고 발간 취지를 밝혔다.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하금철 외 지음, 오월의봄 펴냄

“우린 하나의 그림자처럼 같은 시간에 밥 먹고 일하고 잠들고 처맞았다.”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들은 대부분 1950년대에 태어났다. 그리고 열 살 전후로 선감학원에 끌려가 납치·노역·학대에 시달렸다. 군사 쿠데타 이후 정권은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거리의 아이들을 선감학원으로 쓸어담았다. 거리의 ‘부랑자’는 시대가 만든 희생양이었다. 오랫동안 감춰졌던 이야기는 60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세상에 드러났다. 1950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되어서야 기억의 상자를 열었다. 장애·빈곤·소수자 이슈를 당사자 관점에서 다루는 언론 〈비마이너〉가 구술기록집 형태로 기획했다. 피해 생존자들의 삶에 선감학원은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그들은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을까. 국가가 도시 빈민에게 남긴 폭력의 참상이 날것의 언어로 드러난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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