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에 차마 쓸 수 없는 이력만 쌓여갔다. 김우희씨(21)는 초등학생 때 어머니를 잃었다. 지방의 일자리를 떠도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는 아버지와 철없는 오빠를 누군가는 대신해야 했다. 자잘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는 동안 먹고사는 일의 막중함과 무거움은 김씨 몫이 되었다. 지난 3월부터 간호조무사로 근무를 시작한 성형외과는 그의 ‘공식적인’ 세 번째 직장이다. 이곳에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 6일 일하고 월급 160만원을 받는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8300원, 2019년 최저시급에 미치지 못한다. 근로계약서도 4대 보험도 없다. 열악한 처우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준비하느라 모아뒀던 목돈이 떨어진 탓에 취업을 미루기 어려웠다.

김씨는 2015년 3월 공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제조업 분야의 발명과 특허를 중점적으로 육성한다고 선전하는 특성화 고등학교(특성화고)였다. 학비가 지원될 뿐만 아니라 취업도 연계되는 조기취업형 현장실습이 있어서 자립을 꿈꿔온 그에게는 ‘탈출구’처럼 보였다.

현장실습은 기대와 달랐다. 2017년 8월 김씨는 평택에 있는 한 플라스틱 사출 업체에 취업했다. 원료를 녹여 금형으로 플라스틱 부품을 대량 찍어내는 공장이었다. 김씨가 현장에서 맡은 일은 기계와는 동떨어진 부품 분류와 포장, 품질관리 등이었다. 관리자는 “여자가 사출기를 돌리는 것은 힘들다”라며 공장 업무에서 그를 배제했다. “그 기술을 배우려고 거기까지 간 건데, 잡일만 시키더라고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첫 사회생활이라’ ‘실습생이니까’ 같은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다행히 사업장을 바꿀 기회가 있었다. 충북 진천에 있는 의료기기 만드는 업체로 옮겼다. 이곳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는 배식 업체에 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네가 국을 끓이고 밥을 하라”고 지시했다. 연장근무수당과 주휴수당도 따로 지급되지 않던 곳이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학교에 “실습을 그만하고 싶다”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졸업할 때까지만 참아라” “큰일 없으면 좀 더 버텨라”고만 말했다. 2017년 11월19일 현장실습 중이던 이민호군이 제주의 한 음료 공장에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김씨는 졸업하기 전 학교 몰래 일을 그만뒀다. “학교는 취업률만 신경 쓰니까요. 하루빨리 다른 일(간호조무사)을 알아봐야 했죠.”

이민호군 사망 이후 교육부는 후속 대책을 내놓았다. 학생들을 조기 취업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실습 지도와 안전관리 등 학습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실습제도로 수정했다(〈시사IN〉 제585호 ‘언제까지 운에 목숨을 맡길 겁니까’ 기사 참조). 과거에는 기업이 학생을 바로 생산 현장에 투입할 수 있었지만, 이제 직무능력 등급에 맞춰 최장 12주 동안 학생들을 교육한 뒤 채용하도록 바뀌었다. 절차가 까다로워지자 특성화고 학생을 채용하려는 회사가 줄었다. 실제로 2018년 특성화고 학생들의 취업률은 65.1%로 전년보다 9.8%포인트 하락했다. 대학 진학률은 36%로 전년보다 3.2%포인트 상승했다.

현장실습제도가 축소되면서 취업을 못한 채 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노용래씨(20)다. 노씨는 2016년 특성화고인 디자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건축가를 희망해 실무 경험을 일찍 쌓고 싶었다. “인문계 가는 것보다 그 시간에 좀 더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었어요. 안 되면 졸업하고 나서 다시 공부를 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거든요.” 1, 2학년 때 디자인과 건축 관련 자격증 5개를 미리 땄다.

특성화고 졸업 이후 취업은 말 그대로 ‘각자도생’이었다. 노씨와 같은 전공을 하는 60명 중에 현장실습으로 취업한 사람은 5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아르바이트에 매진한다. 본질적인 문제는 구직 시장에 특성화고 졸업생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가 없다는 점이다. 노씨는 일주일에 40개씩 이력서를 넣고 30여 군데서 면접을 봤다. 건축사무소부터 공장의 생산직까지 임금과 위치만 맞으면 넣었다. 지금까지 7곳에서 연락이 왔지만 처우가 모두 좋지 않았다. 도면 제작과 경리 업무를 함께 보는 ‘멀티 업무’를 하면서도 최저시급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주변 친구들도 보면 120만~130만원쯤 받고 일해요. 연봉 협상이 아니라 통보받는 것에 가깝죠.”

졸업생 10명 중 8명은 비정규직

지난 1월부터 인천공항 면세점의 인도장에서 일을 했다. 물류창고에 있는 면세품을 쌓아 올려 면세창고로 옮기는 일이었다. 월급도 200만원이 넘고, 추가수당도 따로 받았다. “몸을 쓰는 일이라 경쟁률이 없는 상시 채용이에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도 대부분 물류 쪽으로 빠지고 있어요.” 노씨는 최근 일을 그만뒀다. 노동강도가 센 탓도 있었지만,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가장 컸다. 전공을 살려 일하거나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부러웠다. 노씨는 다시 구직 사이트를 검색하고 있다.

2019년 경기비정규직지원센터가 특성화고권리연합회와 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과 함께 경기도 지역 특성화고 졸업생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심층면접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은 현재 비정규직, 10명 중 5명은 작업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 실태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통계다. 현재 취업 준비자 56명을 제외한 244명의 특성화고 졸업생 중에서 비정규직은 212명(86.9%)이었다. 이들 중 58.7%가 취업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복수 응답). 고졸이라서 무시와 차별을 받는다고 응답한 학생이 134명으로 가장 많았고, 잡무(125명), 수당 미지급(107명), 근로계약 미작성 및 미준수(103명), 강제노동(89명)이 그 뒤를 이었다.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기회는 적고, 경쟁은 더 치열했다. 2018년 2월에 충북의 한 상업계 고등학교 회계과를 졸업한 이은아씨(21)는 재학 기간에 펀드투자권유대행인, ITQ사무자동화, 한국사, 전산회계운용사 자격증 등 10여 개를 땄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야간 자율학습도 했다. 학교는 취업 준비 학원에 좀 더 가까웠다. 교사들은 “너 다이어트 안 하면 취업 못한다” “은행권 이미지에 맞게 화장을 고치라”는 식으로 학생들의 외모를 ‘관리’했다. 면접이 잡히면 ‘스타킹은 살구색’ ‘빨간색 립스틱 금지’ 등의 규칙도 있었다고 이씨는 말했다.

이씨는 공기업, 공공기관, 은행권 취업을 꿈꿨다. 거의 모든 공기업과 공공기관에 원서를 내고 줄줄이 탈락하기를 반복했다. ‘내 능력이 부족한가’라는 불안과 초조함이 이씨를 짓눌렀다. 능력 문제가 아니었다. 고졸 공채는 일반 공채와 별도로 진행되며 규모 면에서도 많게는 반, 작게는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공공기관 인력운영 추진계획’에 따라 공공기관의 고졸 채용 권고 비율은 20%이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2018년 공공기관 360곳 중 고졸로 정규직을 채용한 인원은 2876명으로 8.5%에 그쳤다. 고졸 사원은 처음부터 무기 계약직으로 뽑거나 인턴직으로 뽑는 공공기관도 있었다.

이씨는 30여 회사에 지원을 했고 어렵사리 한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출산과 육아휴직으로 잠시 비워진 자리였다. 그곳에서 맡은 업무는 기관이 새로 추진하는 사업을 안내하고 전화로 상담하는 일이었다. 그는 같이 들어온 대졸 인턴보다 실적이 좋았다. 하지만 관리자는 대졸 인턴들만 따로 불러 입사 준비에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저도 평소에 여기 오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그냥 ‘열심히 하라’는 식으로만 얘기하더라고요.”

졸업 이후 1년 동안 두 차례 계약직 일자리가 끝났다. 두 군데 모두 ‘체험형 일자리’라며 계약 연장을 제안하지 않았다. 이씨는 일과 일이 끊기는 그 한 달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낮에는 면접 준비를 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취업 준비만으로 시간을 몇 개월씩 보낼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한 달 이상 일을 쉬어본 적이 없어요. 생활비며 방값을 내야 하니까요. 시간은 지나가는데 경력은 쌓이지 않으니까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기자명 인천·수원/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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