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냇저고리 세 벌이 서울 계동 헌법재판소(헌재) 정문에 나란히 걸렸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주위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얌전했다. 아이의 등에는 초음파 사진이 붙은 종이가 나부꼈다. ‘나는 1년 전에 태아였어요.’ 대열 맨 앞줄에서 지루한 듯 몸을 비트는 아이들 몸에도 같은 내용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종이에 쓰인 글씨로 아이들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이었다.

아이들 뒤로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 소속 회원들이 ‘생명 존중’ 손팻말을 들고 섰다. 다른 한 손에는 사진을 들었다. 누군가의 자궁 안에서 둥둥 떠 있는 임신 후기 태아 사진이었다. 전 세계 낙태 반대 진영이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전형적 선전물이다. 이 오래된 사진은 ‘가짜 뉴스’에 가깝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임신 후기에 임신중지 시술이 이뤄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1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지 수술 95.3%가 임신 초기에 이뤄졌다. 이들은 평균 6.4주차에 시술을 받았는데, 이 시기 태아의 모습은 선전물 속 형태라기보다는 세포 모양에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낙태 반대 진영은 좀 더 ‘사람’에 가까운 태아 이미지를 통해 대중을 윤리적으로 자극한다.

ⓒ시사IN 신선영4월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날 낙태죄 폐지 반대를 주장하는 엄마들이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헌법재판소 철문에 매달았다.


4월11일 오후 낙태죄 헌법소원 위헌 결정 소식이 알려진 직후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 회원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열다섯 발자국 사이를 두고 마주선 낙태죄 폐지 찬성 그룹들의 환호와 연이은 기자회견에 “살인이다!”라고 몇 차례 반복해 외쳤을 뿐이다. 서로를 ‘집사님’이라고 부르던 몇몇 무리가 바쁜 걸음으로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일부는 “정권이 바뀌면 다시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라며 사람들을 다독였다.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낙태죄는 폐지 절차를 밟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결정이 정치 지형에 따라 얼마든지 번복될 수 있는 ‘성취’라는 점 역시 염두에 둬야 한다. 임신중지는 도덕과 생물학적 논쟁으로 끌려들어가기 쉽다. ‘태아를 어느 시기부터 사람으로 볼 것인가’라는 오래된 논쟁은 여성의 건강권·자기결정권 문제를 마치 태아의 생명권과 충돌하는 문제처럼 다루게 만든다. 헌재는 이번 결정에서 여성을 ‘가해자’로, 태아를 ‘피해자’로 고정시키는 기존 논의가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앞서 낙태 논란을 겪었던 여러 국가에서 정치는 오히려 이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부추기며 당파적으로 활용하는 쪽을 택했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인 1973년 1월22일, 낙태를 범죄로 간주해온 미국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판례가 나왔다. 미국 연방대법원 재판관들은 ‘로 대 웨이드(Roe vs. Wade)’로 알려진 낙태죄 소송에서 7대 2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미국 내 모든 주에서 임신 중기 이전의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킬 수도 없었다.

 

ⓒAP Photo1월19일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혐오, 인권 차별 발언에 반대하며 조직된 ‘여성행진’ 회원들이 시위하고 있다.


판결문을 작성한 해리 블랙먼은 ‘온건 보수’로 분류되는데 리처드 닉슨 대통령(공화당)이 임명한 네 번째 재판관이었다. ‘로 대 웨이드 결정’ 한 해 전 닉슨 대통령은 재선을 앞두고 ‘고삐 풀린 낙태정책’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앞으로 대법원이 내릴 판결이 엄청난 정치적 이슈가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하지만 이후 ‘낙태 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블랙먼의 견해도 명확했다. 그는 공화당의 ‘전통’에 따라 개인의 자유를 믿고 이를 추구하는 쪽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임신중지가 여성과 담당 의사 사이의 문제라고 봤다. “판사는 윤리원칙이 아닌 헌법원칙을 정립하는 사람이며, 법과 윤리는 중첩될 수 있으나 일치하지 않는다. 윤리교육은 대법원이 아닌 교회와 가족과 학교가 할 일이다.”

미국 공화당이 지명한 ‘낙태 판사’

후폭풍은 거셌다. 이 판결 이후 수많은 여성의 삶이 달라졌듯, 블랙먼 판사의 삶 역시 판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연방대법원은 수천 통의 항의 편지를 분류하기 위해 지하실에 임시 분류장을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해리 블랙먼은 자신 앞으로 온 편지를 모두 검토했다. 개중에는 “당신 어머니가 당신만 낙태했더라면…”으로 시작되는 내용도 있었다. 일상적인 살해 협박은 현실로 이어지기도 했다. 1985년에는 아파트 창문이 산산이 부서지는 총기 사고를 겪었다. 블랙먼을 겨냥한 것이 아닌 무작위 발사였다는 경찰 발표와 무관하게 블랙먼과 연방대법원은 이를 ‘반(反)낙태 테러운동’으로 잠정 결론짓는다.

임기 중에도, 퇴임 후에도 사람들은 여러 차례 그에게 물었다. ‘무덤까지 따라올’ 판결문을 작성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같은 질문을 수년간 거듭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그 임무를 맡은 것은 행운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완전한 여성해방을 향해 전진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입니다(〈블랙먼, 판사가 되다〉 2005, 〈지혜의 아홉 기둥〉 2008).”

 

 

 

ⓒ연합뉴스1985년 열린 ‘인구증가율 1% 조기 달성을 위한 범국민운동’ 캠페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균열이 발생하면 전선도 다시 그어진다. 낙태가 합법이 되는 것과 임신중지가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문화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여성들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수술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기 어렵거나(프랑스), 지정 병원에서만 수술이 가능하거나(네덜란드) 하는 식으로 재생산권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은 임신중지가 합법인 나라에서도 여전하다. 이 때문에 프랑스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플로랑스 몽테르노는 “낙태권이 제대로 보장된 나라는 아직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단언한다(〈유럽 낙태 여행〉 2018).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3년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현재까지도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판결 직후 그해에만 판결의 효과를 제한하기 위한 법안이 50여 개나 앞다퉈 올라왔다. 이후에도 수백 건이 넘는 ‘입법 작전’이 펼쳐졌다. 결국 1992년 연방대법원이 손을 들었다. 판결 내에서 임신중지를 규제할 수 있다는 결정이 나오면서 기존 판결의 모양새는 유지했지만, 숙려제·동의서 등 임신중지에 대한 각종 규제가 가능해졌다. 2010년대 이후로만 좁혀도 현재까지 미국 각 주에서 300건이 넘는 규제법이 통과되었고 이는 임신중지를 점점 더 까다롭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효과적인 낙태 반대 운동을 위해 언어를 적극적으로 오염시키기도 했다. ‘태아’라는 단어 대신 ‘태어나지 못한 아이’라는 표현을 쓰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아기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반박했다.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이용’당했으며, 임신중지를 한 여성들을 ‘피해자’로 규정했다.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전략이었고 이는 일정 부분 주효했다(〈백래시〉 2017).

‘무력’도 동원됐다. “여성의 몸이야말로 전쟁터”라는 구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건 19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종교에 기반한 낙태 반대 운동 단체들이었다.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은 방화와 폭탄과 총기 공격의 주요 표적이 되고, 이 과정에서 의사와 환자가 사망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행동대와 자신들을 ‘세련되게’ 구분해냈다. 직접적인 타격은 수많은 임신중지 시술 병원을 문 닫게 하는 ‘성과’도 올렸지만, 그만큼 반대 여론도 감수해야 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사학을 소유한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을 자극한 판결이 있었다. 밥 존스 사립대학은 백인만 다닐 수 있는 학교였다. 하지만 인종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조직은 세금 면제를 받을 수 없다는 주 법원 판결을 받은 이후 이들은 진보적 판결을 내리곤 하는 ‘대법관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려면 정치와 손잡아야 했다.

이들은 영리하게도 인종 이슈로는 폭넓은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낙태’가 발견됐다. 임신중지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사람을 구하고, 세례를 받게 하며, 등록해서 투표하게 한다는 구호가 만들어졌다. 공화당은 표를 수확할 수 있는 이 새로운 ‘시장’을 놓치지 않았다. 1980년 도널드 레이건은 “임신중지가 살인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으로 종교계 표를 긁어모았다.

이를 목격한 정치인들은 대변신을 시도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전폭 지지해서 동료 의원들 사이에 ‘콘돔’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던 아버지 부시는 대선에 도전하며 정반대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1999년에만 해도 언론 인터뷰에서 임신중지에 찬성 의견을 밝혔지만, 대선 레이스에 돌입하며 견해를 뒤집었다. “힐러리 말대로라면 출산일에도 엄마 자궁에서 아이를 끌어내 죽일 수 있다. 나는 이게 괜찮지 않다.”

2018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은 낙태 반대 진영이 매년 개최하는 대규모 집회인 ‘생명대행진’에 참석하며 낙태 반대 운동에 더욱더 힘을 실었다. 권력을 잡은 공화당은 연방대법관이 죽거나 은퇴할 때마다 ‘낙태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로 연방대법원을 채워나갔다. 현재 연방대법원 구성상 1973년 판결이 번복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다큐멘터리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2018).

‘낙태’는 보수 개신교계의 새 무기?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기독교 근본주의 국가가 아니며, 경제발전을 이유로 가족계획을 실시하는 등 국가가 임신중지를 적극 권장했던 역사를 가진 나라다. 한국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을 다룬 영화 〈자, 이제 댄스타임〉(2014)은 웃음소리로 시작된다. 헤어스타일이며 풍채가 비슷한 중년 여성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을 털어놓는다. 나는 4번, 너는 2번, 건넛집 아무개는 10번 이상…. 1970~1980년대 가임기 여성에게 자신이 지난날 낙태했던 태아는 함께 모여 명복을 비는 천도재를 열 만큼 ‘일상적’인 일이다. 임신중지는 기성세대 여성에게 국가적 경험이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는 저출생 원인으로 인공임신중지를 지목하며 오랜 기간 내팽개쳤던 낙태죄를 재발견했고,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 등장 이후 이른바 ‘낙태 고발 정국’이 벌어졌지만 그만큼 한국의 낙태 논쟁은 그 역사가 일천하다. 압축적 근대를 경험한 나라답게,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접근하는 속도도 재빠르다.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을 비롯한 종교계가 즉각 반발 성명을 내긴 했지만, 직접 행동의 움직임은 아직 감지되지 않는다. 4월15일 오후 7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낙태죄 헌법 불합치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긴급 토론회를 열어 앞으로 입법 과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논의했다.

격렬한 찬반 토론이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패널들은 헌재 결정을 ‘아쉽지만 이미 정해진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보였다. 교회가 국가를 대신해 여성의 ‘원하지 않는 출산’을 어떤 방식으로든 감당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감대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중지 이슈가 사학 개혁 이슈와 만난다면 어떨까. 미국의 밥 존스 사립대학 사건이 그러했듯 새로운 폭발점을 만들 가능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계 처지에서 사립학교 문제는 도덕적 우위와 정당성을 논하기 어려운 이슈다. 한국에서 최초로 개신교 집단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계기는 노무현 정부 당시 ‘4대 개혁입법’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사립학교법이었다. 개신교계의 막강한 ‘돈줄’인 사립학교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다른 쟁점에 불을 붙이는 전략으로 저지될 가능성이 높다. 개신교계가 학교에서의 종교의 자유,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 것을 내용으로 한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강하게 반발한 것이 그 예다. 동성애처럼 임신중지 이슈가 보수 개신교계의 새 무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한국적 상황은 헌재가 일정 부분 앞장서 결론 내린 임신중지 이슈를 어디로 끌고 갈까. 임신중지를 둘러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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