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2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신문에 ‘파도를 타는 남자, 이목을 집중시키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베니스 비치의 파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는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바다를 누볐다. 그가 모래사장에 도착한 이후에나 나무판자 위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챘다. 조지 프리스. 하와이 출신의 24세 청년은, 지난 100년간 명맥이 끊겼던 ‘일어서서 물살을 가르는’ 파도타기 기술을 보여주었다.

파도타기는 하와이 사람들이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즐기던 유희였다. 물론 계급에 따라 서핑보드의 형태와 크기, 이용할 수 있는 해변의 구역이 달랐다. 하지만 바다에 몸을 맡기고 파도와 한 몸이 되는 것에 본질적인 차별은 없었다. 하와이 사람들은 바다가 요동칠 때 신들이 노닐고 있다고 해석했고, 잔잔해지면 자신들에게도 그 놀이터가 허락되었다고 보았다. 이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나무를 베어 서핑보드를 만들었고, 바다로 향했다. 성황이던 하와이의 서핑 문화는 19세기 들어 쇠퇴하기 시작한다. 서양인들이 기독교를 전파하며 알몸을 드러내고 즐기던 서핑을 죄악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서핑은 어떻게 거대한 사업이 되었나

ⓒAP Photo파도타기는 하와이 사람들의 유희였다.

하와이의 전통 서핑 기술은 미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서핑을 미국 본토에 전파하겠다는 열망으로 편도 승선권을 끊고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온 파도타기의 영웅, 조지 프리스 덕분이었다. 그 화려한 기술은 젊은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이내 해변의 대형 호텔에 스카우트되어 주말마다 방문객들 앞에서 파도타기 기술을 선보였다. 그의 기술을 배우고 흉내 내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음은 물론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릴 때, 서핑은 이미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프리스의 뒤를 이은 하와이 출신 서퍼들의 활약으로, 미국은 물론 북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928년에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세계 최초의 서핑 경기대회까지 열렸다. 기술은 날로 발전해갔고, 보드 제작 기술 역시 하루가 다르게 개선되었다. 초창기 나무 널빤지에서 합성수지와 유리섬유로 소재가 변화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폴리우레탄 보드가 대세를 이루었다. 1960년대 들어 비치보이스의 ‘서핑 USA’ 같은, 서핑을 찬양하는 노래와 영화가 잇따라 발표되는 등 파도타기는 미국 서부의 젊은이들에게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서핑은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어갔다. 고가의 장비들이 속속 개발되고, 화려한 기술이 넘쳐났으며, 서핑 산업에서 얻어지는 이권을 둘러싼 미디어와 사업체들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바다만 있다면 누구나 공평하게 즐길 수 있는’ 유희로서의 서핑 정신까지 희미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될 법도 했다.

‘서핑 정신’은, 미국 서해안에 새롭게 둥지를 튼 사업체들에게 이어졌다. 젊은 시절 한국에서 미군의 일원으로 근무하며 인수봉 일대에 자기 이름을 딴 코스를 남기기도 했던 이본 취나드. 어린 시절부터 암벽등반과 서핑을 섭렵했고 손재주가 남달라 자신에게 필요한 산악용 장비를 직접 제작하는 재주꾼이기도 했다. 1970년 그는 직접 제작한 장비의 호평에 힘입어 ‘파타고니아’라는 아웃도어 브랜드를 창업한다. 창업하면서 그는 ‘직원들이 서핑을 할 수 있는 회사’를 모토로 내건다. 날씨와 파도가 좋아지면 일하다가도 곧장 바다에 뛰어들 수 있는 업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그는 바다가 가까운 곳에 사무실을 얻었다. 세계 최초로 유연근무제를 실시했다. 고정된 출퇴근 시간 대신에, 자신이 가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간대를 선택해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쓰도록 한 것이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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