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김삼웅은 〈3·1 혁명과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뿌리〉(두레, 2019)에서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3·1 혁명’이라 불렀다면서 이렇게 개탄하고 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초안에서는 전문에 ‘3·1 혁명’으로 명시했다. 그러던 것을 지주계급 출신의 한민당 계열 일부 제헌의원들이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신생 정부를 뒤엎는 과격한 용어라고 진언해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용어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3·1 혁명의 의의와 성과는 여러 가지겠지만, 김삼웅은 그것을 단 하나로 압축한다. “3·1 혁명의 가장 큰 성과의 하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다.
3·1 혁명 과정에서 자주독립을 선언했으니, 이를 실행할 주체가 필요했다.” 실제로 3·1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는 조선민국임시정부·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 모두 8개 임시정부가 수립·선포되었다.

ⓒ이지영

대한민국 헌법은 구체적인 총강과 조항 앞에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문(前文)이 따로 있다. 1948년에 제정된 헌법 제1호(제헌헌법) 전문은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시작하는데, 이 문장은 1987년에 전면 개정된 현행 헌법(헌법 제10호)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는 표현으로 좀 더 정밀한 구체성을 얻었다.

헌법 전문에 명시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11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수립·선포된 임시정부를 가리킨다(이 임시정부만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썼다). 상하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정)는 이후 같은 해에 선포된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3월17일)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4월23일)를 통합했다. 앞서 나열된 다섯 개의 임시정부는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면,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정은 구성원의 명망과 조직 면에서 당시의 조선을 대표할 만한 기반을 갖추었다.

이승만 얼굴에 챔 뱉는 우파 인사들

2017년 8월15일,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다가오는 2019년 4월11일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하자고 제안하자,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우파 인사들은 ‘역사 논쟁을 통해 국론 분열을 획책한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이명박 정권 시절부터 ‘건국절 논란’을 불지펴온 장본인 아닌가. 이들은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을 추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일을 남한 단독정부가 선포된 1948년 8월15일로 변경하려고 한다. 8월15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칭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이승만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그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제헌헌법 전문에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문장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1925년 3월23일, 탄핵을 당하여 대통령직에서 면직되기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이용하여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기반을 닦았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임정은 현 정부 형태로 환국한 뒤, 국내 각계 대표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 임정은 그 과정 동안만 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과도정부가 수립되면 임정을 해산하려 했다. 하지만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은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김삼웅은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보다 친미 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크게 우대했다”라고 말하고 있고, 김병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사〉(이학사, 2019)에 이렇게 썼다. “미국은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와 정권을 장악하면 친중국 정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남한에는 오직 미군정만 있으며, 그 외에 어떠한 형태의 정부도 용납할 수 없다고 선포하였다.”

이해영 지음, 글항아리 펴냄
미군정은 임정을 의도적으로 고사시켰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책이 이해영의 〈임정, 거절당한 정부〉(글항아리, 2019)이다. 임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된 여러 신간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이 책은 미군정이 임정을 무시하게 된 바탕에 서양이 동양을 미성숙한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오리엔탈리즘이 깔려 있다고 본다. 1930년대 주조선 미국 영사를 지냈고, 미군정기에 군정 정치고문을 지낸 미국 국무부 극동국 소속 윌리엄 랭던이 1942년 2월20일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인은 정치적 경험 부족과 무방비 때문에 우선 그들의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고 재침략으로부터 보호할 것인지에 대해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런 인식이 임정을 무시할 뿐 아니라,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구상한 기반이다.

지은이는 미국이 임정을 무시했던 인식론적 배경으로 오리엔탈리즘을 적시하는 동시에, 전후 미국의 헤게모니 전략을 본질적 요인으로 꼽는다. 영국에 망명정부를 설치한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연합군을 통틀어 네 번째 군사 규모(130만명)를 갖고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남프랑스 침공 작전은 물론 대독일 본토 공략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유프랑스를 인정하지 않고 전쟁이 끝나면 프랑스에 군정을 실시하려고 했다. 이런 음모를 간파한 드골은 미군과 영국군의 견제를 뿌리치고 제일 먼저 파리 입성을 달성했다. 그러자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는 미국과 영국은 마지못해 드골의 망명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했다.

임정은 26년 동안 전 세계의 어느 나라로부터도 승인받지 못했다. 지은이는 임정과 프랑스의 경험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임정 승인 문제는 국제‘법’적이라기보다, 국제‘정치’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내적 요인만을 보자면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임정의 실력, 특히 군사적 실력에서 찾는 게 맞을 것이다.” 예상보다 빠른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김구 주석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통탄한 까닭도 바로 임정이 군사적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군의 국내(한반도) 침투가 허사로 돌아가자 〈백범일지〉 (돌베개, 2002)에 이렇게 적었다. “그런 계획을 한번 실행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했으니, 진실로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걱정했던 일이 6·25 동란과 74년째 분단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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