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렬 제공손병휘씨는 촛불집회 때와 달리, 정권 교체 이후
민중음악가들에겐 어떤 공연 제안도 없다고 말했다.

1970~1980년대에 20대를 통과한 많은 청춘들이 음악을 소비하던 방식과 지금 20대의 소비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음악의 장르와 재생 매체는 늘 달라지는 것이고, 그걸 제외하면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음악의 사회적 목적성 유무일 터이다. 음악이 한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도달해 위로해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을 테지만, 그 시대에는 지금과는 다른 음악의 형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독재정권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항거하는 각종 집회에서 불리던 이른바 ‘민중가요’이다. 많을 때는 수십만명의 시민이 거리에서, 술집에서, 학교에서, 공장에서 수시로 불렀던 음악이다. 손병휘는 1997년 대학생 노래패 ‘조국과 청춘’을 시작으로 솔로 활동을 포함해 지금까지 정규 앨범 7장을 발표한 대표적 민중가수이다. 들국화를 좋아하고 비틀스를 카피하며 아트록에 심취했던 고등학생 손병휘는 어떻게 민중가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세계 민중음악 페스티벌’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민중가수라는 말이 생소할 것 같다. 비틀스와 아트록에 심취하던 고등학생이 어쩌다 민중음악을 하게 되었나?

결국에는 광주다. 대학 1학년 말 황석영 선생이 집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읽으면서 밤새 많이 울었다. 그전까지는 광주 민중항쟁이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TK(대구·경북) 출신 육군 중령 아버지 밑에서 충실한 모범생이던 나는 광주를 알게 되고 선배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이전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됐다. 원래 나는 운동권 노래는 따라 부르지도 않았다. 그 노래들은 음악적이지 않았고 과격하고 이상했다. 당시까지 김민기의 노래 외에는 이렇다 하게 음악적으로 나를 설득한 운동권 노래가 없던 터였다. 그러다 ‘그날이 오면’이나 ‘사계’ 같은 노래가 수록된, 노래패 ‘새벽’의 음반을 들으면서 운동권 노래에도 음악적인 품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독서토론과 ‘새벽’의 노래로부터 시작해 어느덧 운동권으로서 민중음악가의 길로 가게 됐다.

노래패에 가입해 본격적인 노래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군에 가기 전에는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NL(민족해방)’ 계열 운동권의 ‘주체사상’ 같은 이론에 회의가 있었다. 그러다 군 제대 무렵에 사회주의마저 몰락하고 운동의 지형도 바뀌어서 당시의 나는 무력감이 심했다. 제대 후 1년간은 거의 폐인처럼 살았다. 그걸 구원해준 게 음악이었다. 당시 술집에서 대통령 선거 중계방송을 보는데 우리가 지지하던 후보가 패배했다. 그때 ‘서총련’ 산하 대학생 노래패 ‘조국과 청춘’ 후배들이 내게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조국과 청춘’, 그리고 그 후에 ‘노래마을’이라는 전문 노래패에 참여하게 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 안치환 빼고는 민중음악가로서 가장 많은 정규 앨범(총 7장)을 발표했다.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갈망이다. 주로 파업이나 투쟁 현장 등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음악 분위기가 따로 있는 민중음악의 특성상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있더라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은 내 음악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내 음악을 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 순수하게 내 음악을 기록하고 싶다는 갈망 때문에 앨범을 여러 장 내게 됐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교체되었다. 민중음악가로서 느끼는 요즘은 어떤가?

정상적인 사회라면 보수나 우파가 해야 할 의제들도 우리나라는 진보 진영에서 해결해야 할 경우가 많다. 경제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사회의 전반적인 성숙도, 특히 문화에 관한 인식이 저절로 올라가는 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성장 촉진 주사를 맞아 덩치가 커졌지만 내면까지 성숙해지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현장이나 운동권 문화에서조차 민중음악가들이 너무 수단시되는 경향이 있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또 촛불집회 때 여기저기서 민중음악가들이 참 많이 불려 다녔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후로는 오히려 불가촉천민이 된 것처럼 어떤 공연 제안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민중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민중음악가들이 설 자리가 없다. 여전히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고 단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되며, 비정규직 젊은이가 무참히 죽고 재벌이나 권력자들이 특혜 속에 석방되는 한 저항 문화는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서울민예총 이사장이 되었다.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원래 1970~1980년대부터 독재정권과 싸웠던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문화단체이다. 음악·춤·미술 등 여러 예술 분야를 포함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서 임기 2년의 무보수 명예직으로 일한다. 음악가로서, 또 서울민예총 이사장으로서 꼭 하고 싶은 일은 민주주의의 성지인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민중음악 페스티벌을 여는 것이다. 나는 사랑 노래만 부르는 포크 말고, 때로는 시대와 불화하며 시대에 대해서 노래해온 포크 음악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 오랜 민중음악의 뜨거운 역사를 무대에 올리고 싶다. 올해 1회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내년에는 전 세계의 저항 뮤지션, 포크 뮤지션들을 초청해 세계 저항음악 페스티벌을 열 계획이다.

남북 음악인교류협의회 창립에도 관여하고 있는데 남북의 음악인이 민간 차원에서 교류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그걸 목표로 한 걸음씩 가려고 한다. 한반도에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민간 차원의 교류가 공고히 되는 것이다. 문학인들이 그러하다. 남북이 민간 차원에서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 남북위원회’인데 문학 분야에서는 지난 엄혹한 시절에도 수십 년간 쌓아온 교류를 바탕으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아직 음악 분야는 그렇지 못하다. 이번에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남북 음악인이 함께 통일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자 한다. 우선 내년에 있을 도쿄 올림픽의 공동응원가를 만드는 일이나 북한의 음악을 남한이 편곡하고 반대로 남한의 음악을 북측에서 편곡하는 일, 또는 남북의 악기를 서로 연구하는 작업들을 해보려고 한다.


음악을 즐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하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쉼 없이 이어지던 독재의 시대에 어떤 청춘들은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시대의 요청에 응했고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택했다. 나는 그와 인터뷰하는 내내 50대의 민중가수 손병휘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꿈과 욕망에 들뜨고 좌절하고 기뻐했을 청년 손병휘가 보였다.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음악인으로서 그가 느꼈을 기쁨과 슬픔에 공감이 갔다. 그는 올가을 그의 여덟 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다.

※ 이번 호로 ‘허클베리핀 이기용이 만난 뮤지션’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이기용 (밴드 허클베리핀 리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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