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헌법재판소(헌재) 선고 목록은 모두 38건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 번호 ‘2016헌바127’은 16번째 차례였다. 사건명은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 소원’으로 이른바 낙태죄 헌법소원 심판사건이다. 선고가 시작되고 40여 분이 지난 오후 2시44분, 지난 66년간 끈질기게 존재해온 낙태죄 존속 여부가 드디어 가려졌다.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 제270조 제1항(의사낙태죄)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위 조항들은 2020년 12월31일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

‘헌법 불합치’ 결정이었다. 현행 낙태죄는 위헌이지만 즉각 무효에 따르는 법적 공백을 피하기 위해 개선 입법이 이뤄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현행법을 존속시키겠다는 의미다. 재판관 9명 중 4명(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이 헌법 불합치를, 3명(이석태·이은애·김기영)이 당장 법의 효력을 중지해야 한다는 ‘단순 위헌’ 의견을 냈다. 폐지를 반대하는 합헌 의견은 조용호·이종석 재판관이었다. 이로써 7대 2로 낙태죄가 폐지 순서를 밟게 되었다. 4월18일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조용호·서기석 재판관은 각각 합헌과 헌법 불합치로 견해를 달리했다. 두 재판관은 모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했다.

재판관 9명은 선고 당일 오전까지도 결정문을 확정하지 못하고 문구를 수정하며 의견을 회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보관실에 결정문이 도착한 시각은 선고를 두 시간 앞둔 낮 12시께였다. 헌재 선고 내용에 따라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논의가 시작되는 만큼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정으로 국회가 법을 개정하기 전까지 낙태죄 관련 검찰 수사와 기소는 보류되고, 재판 진행 중인 사건은 선고를 미루게 된다. 또 헌재가 정한 시기까지 입법부가 관련 입법을 하지 않을 경우 낙태죄는 2021년 1월1일부로 효력을 상실한다.
 

ⓒ시사IN 신선영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4월11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와 시민들 사이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헌재, 여성의 자기결정권 폭넓게 해석

관련 소식이 전해지자 법정 밖의 초조한 공기도 일순 뒤집혔다. 헌재 정문 앞에서 이날 오전 9시부터 릴레이로 기자회견을 이어가던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 활동가와 시민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얼싸안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역시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이 병원이 찾아와도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이제는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돕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와서 정말 기쁘다.”

위헌 소송 법률대리인 단장을 맡은 김수정 변호사 역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김 변호사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번 결정문에 앞으로 입법을 어떤 관점에서 해야 할지 잘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 임신중지를 처벌함으로써 출산을 강제하지 말라는 점, 임신의 1차적 주체는 여성인 만큼 여성의 목소리를 존중하라는 점 등 앞으로 이에 걸맞은 입법이 이뤄지는지 지켜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A4 용지 총 64쪽에 달하는 결정문에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7명은 김 변호사의 말처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폭넓게 해석했다. 다만 이 같은 헌재 의견이 낙태 허용 여부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 ‘헌법에서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지 여부만을 심사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으로는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을 ‘가해자’로, 태아를 ‘피해자’로 고정시키는 기존 논의가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태아의 안위와 깊은 관계가 있고,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해 임신한 여성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태아의 생명 보호는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입법 가이드라인도 제시됐다. 헌법 불합치 의견을 낸 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 재판관은 “생명의 전체적 과정에 대해 법질서가 언제나 동일한 법적 보호 내지 효과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생명 발달 단계에 따라 보호 정도나 수준을 달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재판관들은 세계보건기구(WHO)가 태아의 독자적 생존이 가능한 시기를 임신 22주로 잡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는 헌재가 낙태 가능 기간을 22주로 판단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이 임신중지 여부를 숙고하고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시간을 고려해 구체적 허용 기간을 정하라고 권고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들은 임신중지 허용 결정가능 기간을 어떻게 정할지,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대한 확인을 요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상담이나 숙려기간 등 절차적 요건을 추가할 것인지 여부를 ‘입법재량’으로 남겼다.

반면 단순 위헌 의견을 낸 이석태·이은애·김기영 재판관은 헌법 불합치 의견과 견해를 함께하면서도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적어도 임신 14주 무렵까지는 어떠한 사유를 요구함 없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임신 9주 이내에는 약물을 통한 낙태도 가능하다며 유산 유도약 도입의 필요성도 언급한다.

낙태죄 조항 유지로 인한 의료 서비스 공백 문제도 지적했다. 낙태의 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의료인의 숙련도, 의료 환경, 낙태 이후의 돌봄과 관리, 낙태에 대한 정보 제공 여부 등을 꼽으며 불법화로 인해 관련 의료 서비스가 부재함을 짚어냈다. 낙태죄가 여성 건강권 문제와도 직결됨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재판관 3인은 특히 낙태 비용 문제를 언급하면서 소득이 없거나 낮은 여성들이 ‘적절한 시기’를 놓치게 되는 점을 꼽으며 현행법의 불평등함 역시 적시했다.

이들은 법적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헌법 불합치 의견을 반박하기도 했다. “형벌이라는 제재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불이익의 정도가 그 어떤 경우보다 크므로 해당 법률의 효력을 상실시킴으로써 야기할 법적 공백이 크다고 하더라도 위헌인 법률로 인한 피해를 규율 대상자에게 부담시키는 것보다는 국가가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 헌법적 이념에 부합한다.”

 

 

ⓒ사진공동취재단4월11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자기낙태죄와 의사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제269조와 270조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선고가 열리고 있다.

‘표’ 가르는 주요 선거 이슈 될 수도

헌법 불합치와 단순 위헌 의견 모두 기존 형법적 제재의 한계를 적시한 점도 눈에 띈다. 이들 재판관은 자기낙태죄 조항이 본래 목적과 무관하게 헤어진 상대 남성의 복수나 괴롭힘의 수단, 가사·민사 분쟁의 압박 수단으로 악용되는 점을 지적했다. 또 학업 중단, 경력 단절, 미성년 임신 등 원치 않는 임신의 다양한 사례를 살펴 고민한 흔적도 엿보인다. “성차별적 관습, 가부장적 문화, 열악한 보육 여건 등”을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꼽아 결정문에 적시하기도 했다. “임신한 여성이 처해 있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대하여 형법적 제재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지 않음으로 (중략) 이를 위반하여 낙태한 경우 형사처벌하고 있는 것은 그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도를 넘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기여하는 실효성은 크지 않지만,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제한되는 정도는 매우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공은 입법부로 넘어왔다. 헌재가 정한 입법 시한 전인 2020년 4월15일 21대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 임신중지 이슈가 앞으로 선거에서 ‘표’를 가르는 주요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입법부에서는 ‘낙태’라는 예민한 이슈를 되도록 건드리지 않고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는 ‘뭉개는’ 방법도 주요 전략으로 고려된다. 한 여성 의원은 “시민사회 의견을 반영해 입법안을 만들면 야당에서 절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법 통과를 위해 야당과 조율하는 과정에서 모자보건법상 낙태 사유 추가나 주수 제한을 두는 식으로 누더기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 과정에서 더 개악될 가능성이 있다. 차라리 시간을 끌어 아예 법을 폐기하는 방법이 나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2010년 낙태 의사 고발 운동을 벌인 ‘프로라이프 의사회’ 등장 이전에는 낙태죄 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됐던 만큼, 헌재 결정에 따라 시간을 끌어 관련 조항의 효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