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된 것을 계기로 ‘연금사회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지난 3월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 직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배상근 전무 명의로 여섯 문장으로 구성된 입장문을 발표했다. 전경련은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 주주들의 이익과 주주 가치를 감안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대한항공의 사내이사 연임은 참석 의결권의 3분의 2(66.6%) 찬성이 필요한 특별결의사항이었는데, 35.9%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2대 주주로 11.56%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의 반대표 행사가 결정적이었다.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를 연금사회주의로 지목하며 비판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국민연금공단이 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 같은 펀드가 ‘주인(국민연금의 경우엔 시민 가입자들)의 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집사(스튜어드)’처럼 주인의 재산을 충실하고 선량하게 관리하기 위한 자율지침이다. 지침에는 해당 펀드가 투자한 기업의 경영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포함된다.

ⓒ연합뉴스3월29일 열린 제3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이번은 국민연금공단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이후 처음으로 맞는 정기주총 시즌이었다.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재임 건이 참석 의결권 3분의 2 찬성을 얻어야 통과되는 ‘특별결의사항’이었지만, 국민연금공단의 결정이 무소불위 재벌의 경영권을 훼손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 국민연금공단의 주주권 행사를 둘러싼 논란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연금사회주의라는 용어는,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의 1976년 저서 〈보이지 않는 혁명:어떻게 연금기금 사회주의가 미국에 도래했는가(The Unseen Revolution:How Pension Fund Socialism Came to America)〉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1950년 10월 GM의 최고경영자 찰스 윌슨이 ‘GM 노동자를 위한 투자신탁형 연금기금’의 설립을 제안한 지 1년 만에 미국에서 무려 8000개의 유사한 연금기금이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노동자들이 이 나라 전체 기업의 주식 가운데 최소한 25% 정도를 연금기금을 통해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드러커는 〈보이지 않는 혁명〉 출간 9년 뒤인 1985년에 이르면, 미국 전체 기업의 주식 중 50~70%가 노동자들 소유가 되리라 전망했다.

드러커가 이 책에서 던지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정통적인 사회주의를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로 정의하는 경우, 미국이야말로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이며, 이러한 ‘혁명적 사건’이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도래해버렸다! 또한 드러커는 미국 사회의 인구구조 변화를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보면서 그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함의를 추적한다.

이런 측면에서,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를 드러커의 연금사회주의와 비교하는 행태는 언어도단이다. 드러커는 ‘연금기금 사회주의’의 도래를 긍정적으로 본 사람이다. 더욱이 한국 국민연금 가입자는 노동자뿐 아니라 전체 국민이다. 다만 굳이 연결시키고 싶다면, 1988년에 출범한 한국 국민연금 역시 가입자가 늘고 적립금이 쌓이면서, 국민이 노후보장체계인 국민연금을 통해 대다수 기업의 주식 가운데 상당 부분을 지배하는 시기가 왔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드러커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연금기금이 미국 기업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밝힌 것처럼 말이다.

ⓒ연합뉴스3월27일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주주권 행사 시민행동’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민연금에 대한 그동안의 관심은 대체로 ‘보장성(가입자의 평생소득 가운데 어느 정도를 연금급여로 받을 수 있는가)’과 ‘지속가능성(연금 고갈 여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국 국민연금의 기금은 규모 측면에서 세계 3대 연기금(1위는 일본 후생연금펀드, 2위는 노르웨이 정부연기금) 수준으로 거대해진 상태다. 국민연금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국민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안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담대한 ‘스튜어드십 코드’ 실행해야

2019년 1월 말 현재 국민연금기금의 규모는 660조원이다. 어디에 운용되고 있을까? 국내 채권에 투자된 규모가 311조원 정도로 절반에 약간 못 미친다. 국내 주식에 투자된 기금은 119조원 정도로 전체의 18.1%에 불과하다. 해외 주식에는 122조원을 운용하고 있는데 국내 주식보다 투자 규모가 크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엔가이드의 분석에 따르면, 국민연금공단은 국내 상장사 중 90개 기업에서 10% 이상의 지분을 보유했다.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도 294개에 이른다. 삼성전자의 전체 주식 가운데 10.0%를 보유했으며, LG화학(9.99%), SK하이닉스(9.10%), 현대차(8.70%) 등 국내 4대 그룹 주력사의 2대 주주가 바로 국민연금공단이다. KB금융지주(9.50%), 신한금융지주(9.38%), 하나금융지주(9.68%)의 최대 주주이기도 하다.

국민연금공단이 주주권 행사를 통해 “탈법과 위법을 한 대기업 대주주에게 책임을 묻는(문재인 대통령의 말)” 것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분명히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담대한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행이 필요하다.

왜 그런가? 대기업의 대주주(예컨대 재벌 총수 일가)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외부 비경제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주주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만 다른 경제나 사회에 손실을 끼치며, 이에 대한 보상도 하지 않는 경우다. 기업 측의 불공정한 대량 해고, 공해 유발, 중소기업 기술 탈취 등이 대표 사례다. 국민연금공단은 그렇지 않다. 기업의 주요 주주인 동시에 국민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바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주식시장을 비롯한 자본시장 전체의 발전은 한국 경제에 좋은 일인 동시에 국민연금에도 좋은 일이다.

앞으로 국민연금공단은 주요 주주로서의 임무를 피해서는 안 된다. 국민경제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대기업 이사회에 국민연금공단 측의 인사를 사외이사로 파견해서 해당 기업의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다. 국민연금공단의 사외이사들은 총수 일가 등 최고 경영진의 보수 수준,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 등이 합리적인지 감시해야 한다. 예컨대 현대차는 1996년 이후에는 국내에 공장을 증설하지 않았으며 품질보다는 가격 중심의 경쟁 전략을 펼쳤다. 삼성전자 경영진은 베트남에 투자하면서 ‘국내에서 질 낮은 일자리를 줄이는 대신 고급 연구개발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공단은 대기업 경영진의 이런 이야기들이 지금도 유효한지 따져볼 만큼 관여 수준을 높여야 한다.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퇴직금이 과연 600억원에 달해야 하는지도, 이 회사의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 정당하게 감시하고 따져야 할 사안이다.

기자명 김용기 (아주대 국제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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