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반이 뜨거웠기에 협상의 결과가 더 좋아졌을 것입니다. 반대하신 분들의 주장이 우리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007년 4월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날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회적 자본’으로 유명한 로버트 퍼트넘은 1988년 〈외교와 국내정치:양면게임(two-level games)의 논리〉라는 논문을 썼다. 모든 국제 협상은 대내 협상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이 구조에서 독특한 논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동질적이고 강한 반대 세력은 협상에 두 가지 영향을 미친다. 당장 협상팀이 활용할 수 있는 ‘타결 집합(win set)’은 줄어들지만 바로 그만큼 상대에 대한 협상력은 강해진다. 양국 타결 집합의 교집합이 얼마나 큰지가 협상의 성공 가능성을 좌우한다.
협상력 강해졌지만, 타결 집합 잃은 트럼프
예컨대 한국에서 투자자·국가 중재제도(ISDS)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 강하고 치밀하면 정부 협상팀은 그만큼 힘들겠지만 이제 ISDS는 대미 협상의 레버리지가 될 수 있다. 미국 쪽은 더 확실하다. 미국 대통령은 법안 하나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서 전화기를 붙들고 반대 의원 한 명, 한 명과 협상한다. 한·미 FTA와 같은 어마어마한 법안의 경우 농업이나 자동차, 의약품 등 핵심 쟁점 분야의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이들 의원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다. 그만큼 미국 협상팀의 타결 집합은 줄어든다.
지난 2월28일 북·미 정상회담은 점심까지 취소할 정도의 파장 분위기로 끝났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북한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미국 정치권과 언론의 ‘초당적’ 혐오는 신기할 정도다. 그 어떤 합의를 한다 해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퍼주기”라는 비난이 쏟아질 상황이다. 그만큼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력은 강해졌을 테지만 그의 타결 집합은 사실상 공집합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의 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라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말도 이해가 간다. 북한은 영변의 핵시설 폐기는 앞으로의 지난한 협상에서 훌륭한 출발점이 되리라 믿었다. 이 정도면 2006년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강화된 제재 일부, 민간경제에 타격을 주는 조항이 어느 정도 포함될 것인가가 협상의 대상이 될 만했다. 그런데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가 난데없이 협상의 전제로 둔갑했다.
회담 결렬의 진정한 원인은 ‘핵 및 대량살상무기 폐기 대 제재 철회’라는 미국의 교환 조건에 북한의 안전보장이 빠졌다는 데 있다. 핵개발 포기 후 최고 지도자가 처형된 리비아, 주변 강국의 합의에 따른 핵 폐기 후 러시아의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예는 이 조건이 난제 중 난제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다행히 괄목할 만한 진전도 있다. 회담이 결렬됐어도 양국 정상은 여전히 우정을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대로라면 오로지 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중지됐고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한 지도 1년이 넘었다.
앞으로 펼쳐질 긴 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할 일이 많다. 먼저 ‘비핵화’ ‘단계 대 단계’ 또는 ‘조치 대 조치’ 등 기본 개념을 정의하는 것부터 다시금 협상해야 한다. 미국 의회의 현재 요구는 사실상 협상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차근차근 밝혀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 예컨대 개성공단의 재개가 유엔의 제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트럼프 대통령이 슬그머니 인정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북한의 안전보장은 북·미의 합의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이제 ‘쌍중단(핵미사일 실험과 한·미 군사훈련의 동시 중단)’이 실현됐으니 중국이 ‘쌍궤(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길에 참여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북한의 안전보장을 포함하는 양국 타결 집합의 윤곽을 그려내면서 손에 쥘 수 있는 성과도 만들어내야 한다. 국회에서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를 인준하는 것은 교집합 부재라는 현재 상황을 타개하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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