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참나? 아니, 우리는 왜 이런 굴욕을 견디는가? 장기 주택자금대출 때문에? 이 회사에서 성공해서 이루고 싶은 게 있어서? 이깟 일로 그만두면 지는 것 같아서? 모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정말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나도 내가 왜 참고 있는지를 가끔은 잘 모르겠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가 왜 성폭력을 당하고도 참았는지도 잘 모른다. 다만 김지은씨가, 참을 수 없는 회사를 참기로 한 최초의 노동자는 아니라는 점은 안다. 정치권 ‘감정노동’은 주로 여성 몫
정치인을 보좌하는 일의 상당 부분은 정치인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감정노동으로 소위 ‘심기 관리’라 불린다. 심기 관리는 격려하는 말하기, 좋아하는 간식 준비하기 등의 낮은 수준에서부터 스트레스 요인을 미리 제거하기 등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조치까지 모두 포함되고, 때로는 타인을 대신해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심기 관리 과정에서 정치 노동자들은 매우 친밀한 감정을 연기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심기 관리라는 감정노동은 정치권에서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여성 노동자에게 주로 요구된다. 여성 노동자의 친밀성 연기는 성애적 맥락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안희정 전 지사는 피해자에게 ‘외롭다’ ‘위로해달라’ 따위의 발언을 하며 성폭력을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아주 가까운 친밀성을 연기하는 감정노동을 요구받았던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요구한 친밀성 연기를 불륜의 증거라고 주장하며 가해 사실을 숨기고, 피해자는 자신의 노동과 범죄 피해를 구분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면 피해자가 처한 여러 사회적·개인적 맥락과 무관하게 완전히 무력해진다는 것도 성폭력에 대한 가부장적 환상이다. 피해자가 ‘일단은’ 참기로 했다고 성폭력이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피해자가 성폭력 전후로 업무적으로 연기한 친밀성은 불륜의 증거가 아니라 김지은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다. 김지은씨는 너무 열심히 일했고, 너무 많이 참았다. 개떡 같은 직장이 피해자의 책임일 수는 없다. 내 노동력으로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헛된 꿈을 품고 사는 정치 노동자로서 아직 남은 재판을 치러야 할 김지은씨에게 연대를 보낸다.
-
가족법에는 없는 어떤 ‘가족’
가족법에는 없는 어떤 ‘가족’
황도윤 (자유기고가)
지난 19대 국회에 제출됐다 폐기된 ‘생활동반자법(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은 혼인이나 혈연이 아닌 사이에서도 서로 돌보며 함께 살아가기로 법적으로 약정한다면, 일정한 대리권...
-
비리 유치원 그 배후에는
비리 유치원 그 배후에는
황도윤 (자유기고가)
올해 국정감사 최대 현안은 단연코 ‘유치원 비리’였다. 맘카페마다 유치원 비리에 분노하면서도, 당장 이러다 재학 중인 유치원이 폐업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가득하다. 국가...
-
사회적 약자 살리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사회적 약자 살리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황도윤 (자유기고가)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영 흥미롭지가 않다. 왜 열에 여덟아홉은 약간 느끼한 아저씨들이 온 영혼을 모아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인상일까. 우리가 그나마 특색이 있...
-
‘최교일들’의 기이한 상식
‘최교일들’의 기이한 상식
황도윤 (자유기고가)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의 스트립바 출입 논란을 처음 들었을 때, 그저 추한 일시적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주목한 건 최교일 의원의 반복적인 변명 자체다. 최 의원은 사건이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