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부산국제영화제(위)에서는 무수한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공식이라는 두 글자가 붙으려면 돈이 수천만원 필요하다.

다니엘 헤니는 말했다. “그렇게 긴 레드 카펫은 생전 처음 봤다. 300m는 넘어 보였다. 레드 카펫 양쪽은 기자들과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중간에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레드 카펫을 걸으면 어떤 식으로든 언론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 헤니는 또 이런 말을 했다. “개막작을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비가 내렸고 몹시 추웠다. 어수선했다.” 엔리오 모리코네만 부산국제영화제의 레드 카펫 앞에서 주춤했던 게 아니었다. 건장한 다니엘 헤니마저도 질겁했을 만큼 올해 부산의 레드 카펫은, 호사스러웠다.

부산영화제에선 무수한 공식 행사들이 열린다. 영화제가 주최하는 파티도 있지만, 영화사나 언론사나 외국 영화 단체가 여는 행사도 많다. 하지만 아무나 부산영화제에서 공식 행사를 열 수 있는 건 아니다. 공식이라는 두 글자가 붙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수천 만원 정도를 내고 부산영화제의 공식 스폰서가 돼야 한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선 매일 밤 숱한 공식 행사가 이어졌다.

방송 일을 하는 수현씨(27)는 올해 처음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친구들과 함께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러 온 건 아니었다. 그녀들은 성장을 한 채 밤마다 파티를 순례했다. 강동원과 유지태와 다니엘 헤니와 주진모와 사진을 찍었다. 한때 부산은 영화광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그녀들은 부산의 새로운 손님이었다. 이른바 ‘파티 피플’이었다.

영화제의 규모가 커지면 영화제는 안과 밖으로 나뉜다. 일찍이 칸과 베를린과 베니스가 그랬고, 새롭게 떠오른 토론토 영화제도 그렇게 나뉘는 중이다. 영화제의 밖엔 관객이 있다. 관객은 영화제가 준비한 영화를 본다. 상영 시간에 맞춰 극장을 찾은 감독과 배우와 질문 주고 받기를 한다. 레드 카펫에서 이른바 스타를 구경한다. 영화제 바깥을 서성여야 하는 관객으로선 이게 제일 큰 재미다. 언제부턴가 영화제 수상작을 평하는 영화평론가보다 레드 카펫에 오른 여배우들의 옷매무시를 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더 주목받게 된 건 그래서다.

또 영화제 밖에는 미디어가 있다. 미디어는 대략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인다. 스타일리스트한테 드레스에 관한 말 한마디를 따기 위해 애를 쓰거나, 반대로 그런 영화제를 비판하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부화뇌동이든 비분강개든 영화제 바깥에 있긴 마찬가지다.

호사스러운 부산, 아시아의 칸으로 바뀌어

그리고 영화제 안이다. 그 안에는 영화제 관계자들과 초청된 배우들과 감독들과 프로듀서들과 제작자들과 돈줄을 쥔 후원자들과 일부 기자들이 있다. 그들은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친분을 쌓는다. 영화제는 그들에게 영화를 보는 곳이 아니다. 영화는 바깥 관객이 본다. 그들에게 영화제는 홍보와 사교의 시장이다. 그런데 영화제가 이런 시장을 마련하려면 돈이 든다. 스폰서가 필요해진다. 당연히 스폰서는 미디어 노출을 원한다. 급기야 비즈니스용 행사마저 생긴다. 가끔씩 배우와 감독들은 영화제 바깥으로 외출을 한다. 그러면 강동원의 〈M〉 기자회견처럼 관객과 미디어가 난리법석을 피우게 된다. 이럴수록 영화제 안에선 영화가 사라진다. 스폰서와 비즈니스만 남는다. 칸 역시 이런 안팎의 자아분열 과정을 거쳐서 지금처럼 호사스러운 영화제가 됐다. 부산도 아시아의 칸이 돼가고 있다.

하지만 영화제는 영화제여야 한다. 영화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수많은 영화제가 영화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더 이상 영화의 축제일 이유가 없어서다. 부산영화제가 처음 열리던 1995년 무렵엔 영화제가 절실했다. 대중문화의 토양은 척박했다. 영화라는 씨를 뿌리려면 씨앗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한곳에 모여야 했다. 거름 노릇을 해줄 관객이 있어야 했다. 여성영화제나 서울독립영화제 같은 영화제들이 대부분 그 무렵 만들어졌다. 부산에 이어 부천과 전주국제영화제도 생겨났다. 극장주들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며 외면하는 영화들을 영화제에서는 볼 수 있었다. 한국 영화 문화의 성장은 온갖 영화제들이 범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저변이 확대됐다. 형태와 규모는 달랐지만 영화제들이 모두 비슷한 바탕을 지녀서였다. 영화예술을 찬미했다. 더 좋은 한국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젠 누구도 영화예술을 찬미하지 않는다. 더 좋은 한국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이 버는 한국 영화를 제작하는 게 중요하다. 영화제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영화제들도 살아남아야 한다. 상업성과 결탁하게 된다. 영화는 언제나 투자자와 미디어의 구미를 당긴다. 스타 콘텐츠를 쥐고 있어서다. 결국 볼거리 위주의 행사를 치르게 된다. 올해 어떤 해외 손님을 모셔왔는지에 목을 매단다. 부산영화제가 영화쇼가 된 건 당연하다. 그것도 부산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전주나 부천도 그게 고민이다. 서울 지역 안에서 열리는 이런저런 영화제들이 주저하며 바라는 것도 그거다. 쇼가 되는 거다.

극단적 상업화로 볼만한 영화 사라져

바로 이 지점에서 불량품들이 발생한다. 경주시와 한국영화배우협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영화연기대상이 그렇다. 얼마 전 SBS가 생중계를 포기하겠다고 해서 말이 많았다. 그 한가운데에는 영화가 아니라 스타 콘텐츠가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화려한 영화쇼를 바란다. 영화제를 유치해서 관광수익도 얻고 도시 이미지도 바꾸겠다는 기획안은 지자체 공무원들의 단골 메뉴다.

하지만 영화에는 관심들이 없다. 영화 때문에 찾아올 유명 배우들이 목적이다. 이걸 거들어주겠다고 어떤 단체가 나설 수도 있다. 영화 행사가 수익 사업인 탓이다. 미디어까지 낀다. 역시나 영화보다는 스타가 궁금해서다. 장동건 같은 배우가 카메라에 잡히면 본전은 뽑는다. MBC가 대한민국영화대상을 치르는 거나, KBS가 청룡영화상을 잡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SBS가 생중계를 포기한 까닭은 솔직했다. 배우들이 대부분 대리 출석을 한다고 해서였다.

한때 영화제가 너무 많다는 논쟁이 있었을 정도로 한국은 영화 축제의 나라였다. 그때 영화제는 영화제다웠다. 영화를 모아 상영하고 그 영화들 속의 이념을 공유하는 행사였다. 한국에서 영화가 발달한 것도 영화가 대중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실어 날랐기 때문이었다. 때론 급진적이고 때론 전복이며 때론 사회 비판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는 영화가 담을 새로운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제도 보여줄 영화가 없다. 남은 건 영화제 스스로 영화의 죽음을 선언하는 길뿐이다. 스스로 극단적으로 상업화되는 걸로 말이다. 

작은 영화제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한 영화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부산은 다른 영화제들과 작은 영화들한테 해를 입히고 있다. 한국에서 질 좋은 예술 영화로 모을 수 있는 관객은 많아 봐야 몇 천 명 정도다. 그런데 부산에서 그 영화를 틀어버리면 볼 사람은 다 보게 된다. 극장 개봉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대신 부산은 영화를 소개해준다는 명분으로 관람료 수익을 고스란히 챙긴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지금도 오롯이 영화제의 원형을 지키고 있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안팎없이 어우러지는 축제다. 서울인권영화제나 서울환경영화제는 영화로 세상을 고민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대중상업영화를 소재로 한 영화제들은 변질돼 가고 있다. 어쩌면 정직한 일이다. 한국의 영화 문화가 변질됐기 때문이다. 결국 사라진 가치를 대신할 건 돈과 쇼뿐이다. 올해 부산영화쇼처럼 말이다.

 

기자명 신기주 (프리미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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