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가 올해부터 정기공채를 폐지했다. 10대 그룹 중 최초다. 이전에는 1년에 두 번 상·하반기 채용을 진행했다. 이제는 필요할 때마다 뽑는다(상시 채용). ‘공개 채용’이라는 틀은 유지하며, 채용 규모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방점은 ‘직무’에 있다. 구성모 현대차 HR운영2팀 과장은 이번 결정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신입사원에게 요구하는 역량이 범용 역량에서 직무 역량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범용’이란 ‘어디에든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종전에는 ‘어디에든 사용할 수 있는’ 인재를 뽑은 뒤 회사 상황에 따라 각 직무에 배치했다. 상·하반기에 대규모 인원을 몰아 뽑는 정기공채는 이런 ‘범용 인재’ 확보에 적합했다. 현대차그룹 인·적성 검사(HMAT)와 취업 스펙 등을 기준으로 수많은 지원자 중 범용 역량이 높은 사람을 선발하면 되었다. 서류·필기·면접 전형을 한 번에 치를 수 있어 비용이나 관리 면에서도 효율적이었다. 이 시스템에서는 소수로 구성된 그룹 인사팀이 수많은 지원자를 일괄 평가해 선발·배치했다.

ⓒ현대자동차2016년 2월 현대차 기술직 신입사원 입사식에서 사원 대표들이 비전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두 가지 큰 흐름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첫째, 기술이 고도화되었다. 이제는 고도화된 기술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기업이 ‘똘똘한 대졸 신입사원’을 뽑아 기초부터 교육하는 방식으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현대차가 정기공채를 “과거 산업 성장기에 유효했던 방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자동차 산업은 전례 없는 생존경쟁에 직면해 있다. 로봇, 인공지능, 전동화 자동차(전기차), 스마트 카, 미래에너지 분야 등에서 경쟁 기업보다 앞선 상품과 서비스를 민첩하게 공급해야 한다. 최신 역량과 기술을 가진 인재를 적시에 확보하는 전략이 필수다.” 현대차의 설명이다.

직무별 상시 채용이 바꾸는 것들

둘째, 노동시장에서 평생계약이 무너졌다. 근속에 따라 임금이 높아지는 연공급 임금체계하에서 기업은 장기 근속자일수록 생산성에 비해 인건비가 높다고 판단한다. 하는 일보다 받는 돈이 더 많다고 본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희망퇴직·권고사직 따위로 사람을 자꾸 내보낸다. 법률상 정년은 60세지만, 40세까지 버틸 거라는 기대도 없다. “1990년대생들은 기존의 세대들과는 다르게 기업의 종신고용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낮다. (중략) 90년대생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정년 보장처럼 신뢰할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경력 개발을 위한 교육과 훈련이다.” 〈90년생이 온다〉 저자 임홍택씨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평생계약 붕괴가 정기공채 폐지와 무슨 상관일까?

정기공채 시대에 기업은 대규모로 ‘똘똘한 대졸 신입사원’을 뽑아서 재무·영업 등 이런저런 직무에 배치한다. 모든 신입사원의 커리어 구상을 일일이 맞춰줄 여유는 없었다. 형식적인 ‘5분 면담’ 이후 관료적인 방식으로 직무가 결정된다. ‘평생직장 시대’에는 그래도 되었다. 직원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직무 전문성이 아니라 회사였다.

그런데 평생계약이 붕괴하자, 이제 입사자들은 취업한 이후에도 자기계발의 압박을 강하게 받는다. ‘평생직장’을 기대하지 않는 이들은 취업 후에도 자신의 전문성과 커리어를 생각해야 한다. 직무 전문성이 점점 중요해지는 배경이다. 원하지 않는 직무에 배치될 경우, 이제 신입사원들은 버티는 대신 퇴사한다.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주니어들의 중도 퇴사가 늘어나는 것이 대기업들의 고민거리다. 현대차도 “직무 배치 시 회사의 수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신입사원의 직무 불만족과 퇴직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라고 밝혔다. 기업 처지에서 이는 엄청난 비용이다.

ⓒ연합뉴스지난해 4월 삼성그룹의 신입사원 공개채용을 위한 직무적성검사(GSAT)를 마친 응시생들이 고사장 밖으로 나서고 있다.

기술 고도화와 평생계약 붕괴는 ‘범용 역량’을 중시하던 정기공채 시스템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채용에서 직무 역량을 고려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어느 직무도 무난하게 수행할 현대차 신입사원’을 뽑던 데서 ‘누구보다 해당 직무를 잘할 사람’을 뽑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전에는 회사별 인재상에 맞춰 비슷한 역량과 성격을 가진 사람을 대규모로 뽑았다면, 이제는 ‘직무별’로 전형을 세분화해 각 직무가 요구하는 다양성과 전문성을 가진 인재를 찾게 된다. 이 경우 회사는 지원자 한 명을 뽑는 데 전보다 더 많은 품을 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몇 년간의 과도기 끝에 직무별 채용이 더 효과적이라고 현대차는 판단했다.

직무별 채용을 하려면, 인재를 고르는 주체와 그 시기를 바꿀 수밖에 없다. 채용 주체는 그룹 인사팀에서 현업 부서로 전환된다. 인사팀 인력들은 현업 직무 전문가가 아니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직무별로 요구하는 기술과 역량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 신입사원에게 요구하는 역량이 범용 역량에서 직무 역량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채용 주체가 인사팀에서 현업 부서로 바뀐 것이다.

1년에 두 번이 아니라 상시(비정기)로 뽑는 것도 직무별 채용의 필연적 결과다. 현대차에 따르면 정기공채는 채용 공고부터 입사까지 6개월가량 소요되었다. 입사 후에 기수별로 집합 교육을 실시하는데 여기에 1개월이 추가로 소요된다. 채용 공고를 기준으로 총 7개월이 지나야 신입사원이 현업에 배치되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이러면 공채 공고가 떴을 때 필요했던 팀별 인원과, 이들이 현업에 배치되는 시점인 7개월 후에 필요한 팀별 인원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정기공채에서는 직무보다 넓은 개념인 직군으로 일단 뽑은 뒤, 신입사원 입사교육 이후 비로소 배치 면담을 통해 인력이 필요한 부서로 보냈다.

반면 직무별 채용에서는 채용 공고를 기준으로 2개월 남짓이면 신입사원을 선발할 수 있다. 선발된 신입사원은 며칠간의 현장훈련(OJT)을 거친 뒤 바로 실무에 투입된다. 현업 부서가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뽑는 게 가능하다. 지원자들이 채용 공고에 게시된 직무 내용과 근무지를 보고 지원하므로, 입사 후 반드시 해당 직무와 팀으로 배치된다. 배치 면담도 필요 없다. 지원할 때부터 이미 배치될 팀이 정해져 있다. 직무와 인력의 매칭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난 2월14일 현대·기아차가 정기공채 폐지를 발표해 화제가 되었지만, 삼성·LG· SK 등 그룹사들이 당장 정기공채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상반기 공채는 현대·기아차를 제외하면 여느 때처럼 진행되고 있어서, 이 이슈는 일견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의 정기공채 폐지는 해프닝이라기보다는 징후에 가깝다. 그룹 공채가 계열사별 공채로 바뀌고, 정기공채에 비해 상시 채용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트렌드는 사람을 직무별로 뽑으라는 신호이며, 직무별 채용이 확산 추세라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2017년 그룹 공채에서 계열사 공채로 전환한 삼성도 한때 상시 채용을 검토했다고 알려졌다. 채용 규모가 가장 크고 대부분의 지원자가 정기공채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바꿀 수 없어 채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기아차 정기공채 폐지에 취업 준비생들은 공채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구직 대비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한편, 채용 규모를 줄이는 것 아니냐고 걱정한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채용 방식 변화는 규모와 관계없다. 연구 개발하는 부서들과 이를 지원하는 부서들 중심으로 오히려 채용이 확대되는 부문이 많다”라고 설명한다.

취업 준비생들이 채용 규모 축소만큼 우려하는 대목은 또 있다. 직무별로 뽑을 경우 경력을 우대하리라는 예상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경력 비율이 높아지진 않는다. 인력 구조 측면에서 신입사원 수요가 더 많기 때문에 신입의 비중을 과거보다 낮출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회사가 신입사원에게 기대하는 직무 역량이란 경력이 아니다. 직무와 관련한 ‘전공 지식, 기술, 시장 트렌드 파악 능력, 대학 프로젝트 수행’ 등 모든 것이 직무 역량이다.”

이런 현대차의 설명과 별개로, 직무별 상시 채용은 일반적으로 경력직을 선호하는 속성을 가진다. 해당 직무를 가장 잘할 사람을 뽑는 게 직무별 상시 채용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정도만 정기공채 시스템이고, 미국이나 유럽 등은 그때그때 직무별로 뽑는 게 보통이다. 작은 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큰 기업으로 가는 경우가 흔하다. 그만큼 직장 간 이동이 활발하다. 이런 노동시장에서는 직무별 채용이 개인의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계단’으로 작동한다.

채용 변화가 장벽 아닌 ‘계단’ 되려면

다만 한국의 노동시장은 그렇지 않다. 대기업·유노조·정규직으로 대표되는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무노조·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2차 노동시장 간 격차가 극심하다. 이 격차는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는 ‘어떤 회사에 다니느냐’에 따른 것이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에서 대기업 입사 여부는 일종의 신분처럼 되어 있다. 지금은 그걸 위해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 완전 상시 채용으로 바뀌면 그게 이전보다 불확실해진다. 대·중소기업 간 격차가 줄지 않으면 청년들에게 더 가혹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라고 전망했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직이 쉽지 않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때문에, 둘 사이에 커리어의 ‘계단’을 놓기가 간단치 않다. 이런 격차를 그대로 둔 상황에서 직무별 채용 확산은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연합뉴스지난해 6월 한 시민이 현대차의 자율주행차인 넥쏘를 시승하고 있다.

직무별 채용이 ‘장벽’이 아닌 ‘계단’이 되려면 노동시장 전반의 이동성이 높아져야 한다. 단, 전제 조건이 있다. 채창균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미래인재·자격연구본부장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첫 직장이 어디냐’가 평생을 좌우한다. 일단 중소기업에 들어가면 그 경력 자체가 일종의 낙인으로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한번 중소기업에 들어가면 대기업으로 뛰어오르기가 쉽지 않다. 청년 처지에서는 당연히 첫 직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 “임금 공시라도 해서 대·중소기업 격차를 낮춰야 한다. 더불어 대기업이 중소기업 경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만약 대기업만 들어가려 줄 서 있는 대신 빨리 노동시장에 들어가 중소기업에서 경험을 쌓고, 이를 어필해 대기업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면 청년고용 문제도 지금보다 훨씬 덜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정기공채 폐지와 직무별 상시공채 전환이 긍정적 구실을 하리라고 본다.”

〈공채형 인간〉을 쓴 사과집 작가(필명·28)도 현대차의 이번 결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2015년 현대차에 공채로 입사했다. 사회공헌이나 홍보 쪽 업무를 하고 싶었지만 공고가 뜬 ‘경영지원’에 원서를 넣었다. 토익을 봤고 HMAT를 풀었고 역사 에세이(지금은 폐지)를 썼다. 5주간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5분간의 배치 면담을 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할지 그때 비로소 정해졌다. HRD(인재개발) 업무를 담당했다. 직무가 맞지 않아 3년 만에 퇴사했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내가 공채여서 합격했다는 생각이 든다. 겉보기에 나쁘지 않은 학력과 경력에 근사한 말로 잘 지어낸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쓰고, 꾸며낸 사교성으로 어렵지 않게 면접을 통과하지만 실상 제대로 된 전문성은 없는, 여지없이 딱 공채형 인간.”

사과집 작가는 “공채형 인간은 결국 퇴사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사회가 제시한 틀에 맞춰 고군분투해 입사했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일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 곧 직무에 대한 고민을 미리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니어들이 퇴사하는 건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산업 전망이 불투명할 때, 조직문화에 문제가 있을 때, 무엇보다 이 직무를 하며 커리어를 쌓아나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다. 윗분들은 이렇게 좋은 회사를 왜 나가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이유가 명확하다. 평생직장이 없는 요즘은 내가 원하는 직무에서 커리어를 쌓아가야 한다. 10년, 20년 뒤 전문성을 생각해야 한다.”

사과집 작가는 최근 자신이 몸담았던 HRD 부서가 낸 채용 공고를 보고 뭔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자기소개서에서 HRD 담당자로서의 강점이 뭔지, HRD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커리어 패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HRD 이슈 중 관심 있는 게 뭔지 묻더라. IQ 테스트 같은 적성검사도 생략할 수 있고, 현업 부서 인력이 직접 채용에 개입한다. 내가 입사한 2015년과 지금 채용 방식 중에서 어느 쪽이 적절한 인재를 뽑을 수 있을까? 당연히 후자다. 애사심 있는 ‘현대차 직원’보다는, ‘그 일을 잘할 인재’를 뽑는 직무별 채용으로 가는 게 옳다고 본다. 회사뿐 아니라 지원자에게도 그렇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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