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 사회와는 걸맞지 않아 보이지만, 지구상에는 ‘왕국’이 의외로 많이 있어. 일본도 그렇고, 동남아시아의 타이나 말레이시아, 유럽의 영국·네덜란드·벨기에·노르웨이·스웨덴·스페인 등이 모두 ‘국왕 폐하’를 섬기고 있단다. 질문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왕국(제국)’과의 인연을 왜 깨끗이 끊었을까? 1919년 4월 설립된 임시정부조차 ‘공화국’을 표방했고, 해방된 뒤에도 왜 국왕(황제)을 다시 모시자는 얘기가 고개도 내밀지 못했을까?

ⓒ서울역사박물관 제공동농은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위는 상하이
망명 시절의 동농 김가진 선생.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빠는 참으로 무능하고 나약하고 비겁했던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의 ‘로열패밀리’들이 국민으로 하여금 ‘만정’ 떨어지게 한 건 아닐까 해. 대한제국의 황제 이하 지배층은 나라가 망한 뒤에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잘 먹고 잘살며’ 한세상을 보냈단다. 그런 꼴 앞에서 다시 ‘국왕 폐하 만세’ 부르고 양반님네들을 받들어 모실 이유가 어떻게 남아나겠니. 수많은 조선인이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건만 대한제국의 고위 벼슬아치 가운데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은 거짓말처럼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어. 바로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이라는 분이지.

그는 첩의 자식이었어. 홍길동 같은 서자(庶子)였지. 여러 방면으로 재능은 탁월했으나 서자였기에 엄격한 차별에 답답하기 그지없는 젊은 날을 보내야 했어. 그의 시 한 수. “내 평생 헛되이 독서에만 기대었으나/ 지금은 백수로 놀기만을 좋아하며 한강변을 거니네/ 궁(窮)하든 현달(顯達)하든 백 년이 모두 운수가 있어/ 문장은 풍부하여 다시 짝할 이 없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변변치 않은 위인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잘나가는 동안 서자 김가진은 연회 자리에서 시를 읊으며 여흥을 돋우는 역할이나 했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울적했겠니.

그는 1877년에야 미관말직을 얻고 나라를 위해 재능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지. 처음에는 외세에 반대하는 척사(斥邪)적 태도를 보였지만 곧 개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개화파로 변신해 매진하게 돼. 특히 두각을 드러낸 건 외교 분야였어. 영국의 탐험가 A. H. 새비지 랜도어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김가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 “그는 내가 만난 수많은 외교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이 안 되었는데도 영어를 능히 이해하고 읽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외교 일선에서 김가진은 조선의 자주성을 무시하는 발언을 들으면 단호하게 대응했지. 1890년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가 조선을 ‘반쪽짜리 독립국’이라고 폄하하자 이렇게 받아쳤어. “조선은 중국의 지배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유서 깊은 나라다. 중국과의 사행(使行)에서 실익을 챙긴 나라는 조선이고, 중국은 단지 명분만 가져갔을 뿐이다. 조선 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말 한마디와 명령 하나)도 자주(自主)하고 있다.” 후일 ‘벽력대신’이라 해서 무시무시한 노호를 터뜨리기로 유명했던 김가진이니 아오키가 사색이 될 정도로 몰아붙였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구한말의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성실하면서도 유능한 관리였다. 고종에게 충성을 다하면서도 고종이 전제 왕권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면 “칙령의 제정과 칙임관의 임면 등에 관한 수속 절차를 정하고 이것을 바꾸지 못하도록 상헌(常憲)으로 정하여 국왕의 전제를 예방해야 한다(〈아주경제〉 2019년 1월29일)”라고 막아설 수 있었던 희귀한 존재였다. 개화파로서 일본을 본받고자 했으면서도 역시 ‘성실하고 유능했던’ 이완용처럼 친일파로 전락하지 않았던 강단 있는 대신이었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에 이르는 망국(亡國)의 세월 동안 대한자강회다 대한협회다 여러 단체들을 만들어 발버둥을 치며 나라를 지켜보려던 김가진이었지만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어. 나라는 망했고 일제는 득의양양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 출신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김가진은 남작이었지.

삶의 방향과 내용 바꾼 칠순 노인의 용기

조선을 반쪽짜리 독립국이라 부른 일본 외무대신을 혼쭐내고, 종주국 행세를 하려는 청나라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거침없이 대들던 외교관 김가진이 경술국치를 맞아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구나. 분명한 건 일본 제국의 남작이라면 본인은 물론이고 그 후손들 앞에 평생을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꽃길’이 열렸다는 사실이겠지. 1919년 3·1운동을 거치면서 나이 일흔넷의 대한제국 전임 대신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어. 비밀결사 대동단의 총재를 수락했고 급기야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로 망명을 떠난단다.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최연장자였지. 명문장가였던 그는 상하이로 떠나는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어.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죽고 사직은 기울었도다/ 치욕을 견디며 죽지 못해 살아 지금에 이르렀구나/ 이 늙은 마음에 아직 하늘을 찌를 뜻이 있나니 한 번 날아올라 만 리 길을 가노라.”

ⓒ연합뉴스김가진 선생과 아들·며느리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다룬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회 포스터.

당시 일흔넷이면 하던 일도 정리하고 아랫목 찾아 자리보전할 나이지. 그러나 김가진은 집을 박차고, 일본의 남작 작위도 외면하고 결단에 나섰다. 평생 충직한 왕의 신하로 살았던 그이지만 복벽(復辟), 즉 임금을 다시 섬기자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민국(民國)의 일원임을 자처했지. 외교관으로 잔뼈가 굵었던 그였으나 외교를 통한 독립 논리에 단호히 반대하고 ‘혈전’을 주창하면서 먼 친척이 되는 김좌진과 연계하려 노력했어. 그분의 애국심도 애국심이지만 아빠는 관성을 뿌리치고 자신의 삶의 내용과 방향을 과감하게 바꾸었던 칠순 노인의 용기와 통찰에 큰 경의를 표하고 싶구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자신을 바꿀 수 있었던 사람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야.

동농 김가진은 임시정부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었지만 하루에 한 끼도 챙겨 먹지 못하는 굶주림 속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어. 병마에 시달리는 중에도 자신을 따라 망명한 며느리 정정화가 국내에서 구해온 돈을 치료비로 쓰려 하면 완강히 거부했다고 해. 함께 망명한 며느리 정정화와 아들 김의한은 모두 독립유공자로 기려지고 있지만 정작 김가진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일제의 작위를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구나. 망명 전에 거창하게 ‘작위 반납식’이라도 거행하고 왔어야 한다는 얘기일까. 1922년 7월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장(國葬) 수준이었어. “난징의 금릉대학(현 난징대학) 등 중국 각지 30여 개 학교에서 조문단을 보내왔고, 임시정부의 홍진 주석이 식사를, 조완구가 약력을, 이발과 안창호가 추도사를 했다(〈한겨레〉 1997년 8월21일).”

그토록 당대 임시정부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사람이 100년 뒤 후손들의 나라에서는 독립 유공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그 유해조차 이국땅에 묻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면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역사에서 매우 진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체현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최고 고문 동농 김가진이 “한 번 날아올라 만 리 길을” 돌아올 날이 오기를 바라보자꾸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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