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매해 한 번꼴로 해외 취재를 나갔는데, 공교롭게도 갈 때마다 큰 변수가 생겨 당황하곤 했다. 사건이 반복되자 변수를 징크스로, 징크스를 상수로 받아들이게 됐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을 취재하러 갈 때에는 기사 구성을 어느 정도 미리 짜놓았다. 내 임기응변 능력을 믿는 것보다는 대비책을 세우는 게 낫다고 봤다.

‘예정된’ 기사는 대강 이런 줄거리다. 우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베트남 도착 장면을 길게 늘어뜨려 묘사한다. 다음으로 그가 봤을 ‘베트남 자본주의’ 풍경을 전달하고, 베트남 개혁·개방 모델이 무엇인지, 왜 북한이 이 모델을 택할 가능성이 높은지 쓴다. 마지막으로 회담 합의문 내용과 현장 기자들의 반응을 적는다. 지난해 베트남 호찌민에서 ‘베트남 모델’을 취재한 경험을 살리면 재미있는 기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무리 없는 구성이라고 봤다.

ⓒ시사IN 양한모
모두가 알다시피 ‘큰 변수’는 생기고야 말았다. 공동성명 합의 불발이었다. 얄궂게도 이 소식을 먼저 접한 루트는 하노이 프레스센터가 아니라 서울의 편집국이었다. “판 깨졌냐…”라는 메시지를 데스크에게 받았다. 마감 시간에 쫓기던 나는, 예상했던 구성 안에 기록해둔 장면을 삽입해 기사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프레스센터의 다른 기자들도 조용히 노트북만 보고 있던 때였다. 3~4분이 흐른 뒤에야 프레스센터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한국 기자들에게 외신 기자들이 의견을 물어왔다. 곧이어 정상들의 차가 떠났다는 방송이 나왔다. 급히 데스크와 의논해서 기사 방향을 고쳤다. 제599호 ‘그의 미소가 사라진 순간’에서 다룬 프레스센터 뒷이야기는 사실 ‘기자의 프리스타일’에 쓸 요량이었다.

주간지 특성상 회담 진행 소식을 조금 늦게 입수했다고 기사를 못 쓰지는 않는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사고’가 터지지는 않았다. 나를 멍하게 만든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변수가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느꼈고, 대응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혹시 계획을 믿은 나머지 현장에서 촉각을 덜 세웠던 건 아닐까. 앞이 보이지 않아 손으로 더듬어 나아가던 때에 비해 놓친 게 있지는 않을까. ‘역사의 현장’을 떠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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