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쓰는 말이 세계를 납작하게 만든다. 우리는 “계집애처럼 굴지 마”라든지 “사내답다”는 말처럼 특정 성별을 거론하는 말에 담긴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의미를 체화하며 산다. 말이 빚어낸 편견 안에서 여성이나 남성 이전에 한 ‘인간’이 가진 개성은 자주 실종된다.

인천 강화여고 학생들은 개교 이래 지난 60년간 ‘여자다워라’라는 교가 후렴을 좋든 싫든 불러왔다. 상황은 2016년 5월 바뀌었다. ‘강남역 사건’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경험들을 재점검하게 만들었다. 먼지 같은 성차별이 봄볕 아래 털려 나왔다. 당시 강화여고 재학생들에게도 질문이 생겼다. “여자다운 게 뭘까?” 각자가 품고 있던 질문이 서로를 향하고 학교로 뻗어나갔다. 6개월 만에 학생들은 스스로 교가를 바꿨다.

김민섭 작가는 〈훈의 시대〉(와이즈베리)에서 성차별적 교가를 바꾼 강화여고 사례를 ‘희망의 증거’로 비중 있게 다룬다. 학생들은 교가를 바꾸는 과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을까. 또 어떤 것이 달라졌을까. 교가가 바뀐 직후인 2017년 강화여고에 입학해 현재는 3학년인 김미나·김미승·고영지(가명) 학생을 3월18일 김민섭 작가와 함께 만났다. 교가 공모 업무를 담당했던 김혜연 사서 교사도 동석했다.


‘여자다웁게’라고 새겨진 돌은 여전히 교정을 지키고 있더라.

김민섭:그러게, 아직 ‘잘’ 있더라(웃음). 2017년에 강의하러 왔을 때 한 친구가 “그 돌 치우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교장선생님이 〈훈의 시대〉를 읽고 돌을 치우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책을 보내드리기도 했다.

김혜연:안 그래도 치우려고 했다고 하시더라. 돌을 치우려면 중장비를 불러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처음에는 ‘아예 없애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신 것 같은데 산 옆에 구시대의 유물처럼 전시할까 고민 중이신 것 같다(웃음). 누군가는 그 돌에서 전통을 느끼겠지만 누군가는 변화를 기억할 수도 있으니까.

교가에 대한 학생들의 문제 제기 이후 굉장히 빠르게 교가가 바뀌었다.

김혜연:당시 교장선생님이 의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의견을 냈는데 아무 변화가 없으면 교육적으로도 나쁘다고 보았다. 교장선생님이 빨리 교내 대회(교가 개사 공모전)를 열라고 했다. 공모전을 통해 응모작 11편이 들어왔고, 선생님 5명이 심사해서 지금의 가사로 바뀌었다.

‘여자다워라’에서 ‘지혜로워라’로 바뀐 교가를 부르면서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다.

고영지:내가 졸업한 강화여중도 같은 교가를 쓴다. 잘못됐다는 생각은 중학교 때부터 갖고 있었다. 그 노래를 부르고 졸업했는데, 입학할 때 바뀌어 있어서 기뻤다. ‘몇 구절 바꾸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라는 마음 한편으로 ‘나는 왜 선배들처럼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김미승:가사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갖고 있는 불편함이 사소한 일이 아니었구나’ 하고 위로를 많이 받았다. 살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여자라서’ ‘남자라서’ 같은 프레임을 씌우는 일이 많지 않나. 나도 일상에서 성별화된 언어를 쓰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김민섭:각 학교의 교훈과 교가를 조사하면서 ‘강화여고 교가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아담한 우리 여성의 몸 참 아름답구나’ 같은 교가가 있다. 아담함이 하나의 미덕으로 권장되는 것인데, 남고 교가를 찾아보니 완전히 다르더라. ‘세계로 뻗어나가는 패기의 학우들’처럼 남성의 몸은 한 지역이나 국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가야 할 몸이 된다. 교육부가 2000년 6월에 남녀차별금지법 시행 1주년을 맞아 남녀차별적 교훈(교가)을 바꿀 것을 권고하는 공문을 일선 학교에 보냈지만 다수의 학교가 따르지 않았다. 바꾸지 않겠다고 하면 강제할 수는 없고, 실제 좌초된 경우도 있다. 그런 와중에 강화여고를 보면서 희망을 보았다.

지금 다시 강화여고 교가 가사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바꾸고 싶은가?

고영지:‘세계로 나아가자, 큰사람이 되자’는 의미를 담고 싶다.

김미승:각자가 아무리 자신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해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영향을 받는데 그것이 모두 좋은 영향일 수는 없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게 하는 말들도 많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의 주체가 되어라’는 어떨까.

김미나:요즘 학교에서 메타 윤리학을 배우는데 ‘선과 악이란 무엇일까’ ‘선과 악은 정확히 판가름할 수 있는가’를 배운다. 교가의 단어들을 보면 결국 사회가 정한 틀에 학생들을 맞추는 내용이다. 나는 ‘자유로워라’는 말을 교가에 넣고 싶다.

김혜연:강화여고 교가가 1절밖에 없는데 새로 공모전을 열게 된다면 이런 의견을 반영해 2절, 3절도 만들 수 있겠다(웃음).

각자가 생각하는 ‘여자답다’의 의미가 궁금하다.

김미나:우리 집은 어머니가 ‘권력자’라서 여자답다는 말이 좋은 의미였다(웃음). 교가가 바뀌었다기에 여자답다는 말이 좋은 의미가 아닌가 보다 했다. 그 안에 순종적이고 얌전하고 남자 말 잘 듣고 조용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

김민섭:남학생들에게 ‘여자애(계집애) 같다’는 말이 욕처럼 쓰이지 않나.

 

 

 

 

 

ⓒ시사IN 신선영인천 강화여고 교정에는 ‘여자다웁게’라고 새겨진 돌(위)이 있다. 학교 측은 이 돌을 곧 옮길 예정이다.


고영지:나는 여중·여고를 나왔는데 왜 나라는 주체 앞에는 ‘여자’가 늘 붙는 걸까 생각한다. 내가 사람이기 전에 여자라는 걸 강조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다.

김민섭:2000년대 이후 개교한 학교 중에는 학교 이름에 성별 표기를 하지 않는 곳도 드물지만 있다. 여성이 공부한다는 게 100년 전만 해도 특별한 일이었다. 이제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닌데,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학교 이름에 ‘여자’라는 단어를 없애고 공부하는 몸으로 자기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만이 아니고 사회가 (남)기자-여기자, (남)의사-여의사처럼 남성을 기준으로 놓는 관행이 여전히 존재한다. 학교 안팎에서 느낀 차별이나 불편함이 있다면?

김미승:방학 때 횟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식당이다 보니 무겁고 뜨거운 걸 많이 들었다.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무거울 것 같은데 도와줄까?” 하면 내가 울컥하는 마음에 꼭 혼자 들고 그랬다(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무거워 보여서 도와줄 수도 있는 건데 남들이 나를 ‘연약한’ ‘여성’으로 바라볼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여자답다, 남자답다를 떠나서 개인의 특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영지:초등학교 때 출석번호 매기는데 여자는 뒤 번호부터 시작인 게 정말 싫었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차별이다.

김미나:지난여름 교회 수련회에 참가하려고 안내장을 보니까 ‘여학생은 반바지 금지’라고 써 있더라. “이건 남녀차별인 것 같은데 납득이 안 가요”라고 문제 제기를 하자 선생님이 “그냥”이라는 거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셔야 납득이 될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너네가 그렇게 입으면 남자애들이 너희를 눈요깃거리로 보게 된다”라고 답했다. 남자들은 어쩔 수 없다면서. 그래서 수련회에 안 갔다(웃음).

김미승:중학교 때 반에 말썽쟁이 남학생이 내 볼펜을 빼앗아갔다. 달라고 손을 뻗었는데 볼펜심이 나온 상태로 내 손을 내려쳐서 손등에 볼펜이 박혔다. 선생님께 말씀드리니까 “걔가 널 좋아해서 그래”라고 하셨다. 정말 충격받았다. 쇼트커트에서 머리를 기르던 중에는 “사귀고 싶은 남자 있냐? 왜 갑자기 머리를 길러?”라는 말도 들었다.

학생 당사자로서 ‘스쿨 미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이를 계기로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나?

김미나: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지만 우리도 외부 강사가 강의 중 적절치 못한 발언을 해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사과문에 ‘여학교인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같은 말이 있었다. 자신의 발언은 문제가 없지만, 우리가 여학생이라 예민하다는 의미로 들렸다. 물론 이 사과문도 무척 어렵게 받았다고 들었다.

김민섭:아마 남고에서는 문제 삼지 않을 발언이었을 거다. 군대나 민방위 교육 강사들도 ‘재미’를 이유로 성차별적 농담을 한다. 그러면 좋아서 손뼉 치는 사람도 있다. 이제는 그런 농담에 반응해주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강화여고 학생들 덕분에 그 강사는 다른 곳에서도 조심할 것이다. 여러분이 중요한 일을 했다.

김미승:한정된 자신의 경험이 세상의 이치인 줄 아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변화는 ‘좋은 징조’라고 얘기하고 싶다. 자신의 가치관을 깨부수고, 나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고영지:문제를 말했을 때 ‘너는 왜 그렇게 매사에 불만이냐’는 식의 반응을 듣고 위축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조금 더 예민하게 불편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누군가 문제 제기를 하면 그동안 불편을 느낀 사람이 얼마나 외롭고 혼자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을지 헤아려줬으면 좋겠다.

김민섭: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괜찮은가’라는 물음표를 가지면 너는, 우리는, 이 시대는 어떠한가로 질문이 확장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훈’에 각자가 물음표를 가지게 되면 나와 내 주변을 바꾸는 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특히 강화여고 학생들은 그걸 경험한 개인이 되었다. 학교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자기 자신과 공간에 물음표를 던지고 주변을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강화·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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