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상계에는 자조적인 속설이 있다. “3월이면 잠잠해지고, 프로야구 시작하면 싹 덮인다.” 동계올림픽 시즌마다 빙상 종목은 뛰어난 성적 못지않게 여러 잡음으로 구설에 올랐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파벌 싸움이,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안현수 선수 귀화 논란이 일었다. 그 중심에는 항상 ‘빙상계 대부’로 불리는 전명규 한국체육대학교(한체대) 교수가 있었다. 각종 문제의 배후로 지목될 때마다 전 교수는 잠시 몸을 숙인 뒤 여론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왔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이후 대한빙상경기연맹을 떠났다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부회장으로 복귀한 게 대표적이다. 그때마다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은 좌절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폭로가 체육계를 뒤흔들었다.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의 선수 폭행 사건은 심석희 선수의 고발을 통해 ‘스포츠계 미투’로 이어졌다. 폭력과 성폭력이 단순히 몇몇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체육계의 뒤틀린 구조에 기인한다는 문제의식이 공감을 얻었다. 3월21일 교육부는 한체대 종합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재범 전 코치에게 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전명규 교수가 합의를 종용했으며, 한체대 빙상장·수영장을 사유화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가족 수당 1000여만원을 수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교육부는 한체대에 전명규 교수에 대한 중징계를 요구했다.
전 교수는 이번에도 그 권력을 지켜낼 수 있을까. 전명규 교수는 현재 학교에 병가를 낸 상태다. 스포츠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뜨겁지만 체육계 내부 온도는 다르다는 얘기가 나온다. 빙상계 개혁을 위해 모인 ‘젊은 빙상인 연대’의 여준형 대표는 “선수, 코치 등 경기인들은 아직도 소극적이다”라고 말했다. “전명규 교수가 문제의 중심에 있는 걸 다 알지만 정작 빙상계 내부에서는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전명규 교수와 측근들이 버틸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온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감사를 받은 빙상연맹은 감사 뒤 기존 임원들이 물러났고, 전횡 등 고질적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대한체육회는 빙상연맹을 관리단체로 지정했다. 대한체육회는 후속 조치로 관리위원회 위원 9명을 새로 임명했다. 그런데 위원 가운데 최소 2명이 전 교수와 가까운 사이라는 얘기가 돈다. 김관규 용인대 교수는 빙상연맹의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이사 출신으로 전명규 교수가 연맹 전무이던 시절인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감독을 지냈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인 김 교수의 아들은 2016년 한체대에 진학했다. 성백유 서울시 체육회 이사는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 출신이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이후 전 교수가 빙상연맹에서 물러나자 SNS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옥에 가둔 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위기감 조성하는 대한체육회
학부모들도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심석희 선수의 미투 이후, 한 학생이 전명규 교수의 측근인 A코치에게 당한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려 하자 다른 학부모들이 피해 학생의 학부모를 찾아가 만류하는 일도 있었다. “학교도 다녀야 하고 앞으로 실업팀도 가야 하는데 시끄럽게 하면 더 피해를 본다”라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B씨는 대한체육회가 위기감을 조성해 체육계 쇄신에 제동을 걸고 있다고 봤다. “내 제자들 중에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도 있다. 소년체전·전국체전에서 입상한 제자들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다. 한 사람이 메달을 따기 위해서 수백, 수천명이 폐쇄적인 훈련 환경 속에서 희생된다. 설령 메달을 따더라도 망가지는 선수들이 부지기수다. 그 제자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이런 폐해가 있음에도 체육인들이 스포츠 개혁에 주춤한 수준을 넘어 반기를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B씨는 ‘먹이사슬’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 따르면 체육계는 제일 상위의 대한체육회부터 시·도 지부, 각 종목별 경기 단체, 일선 학교 운동부까지 촘촘히 연결돼 있다. 이 라인을 타고 예산이 내려온다. 기존 체육계 관행을 답습하면 돈을 빼먹을 구석이 많다. “장비 구입하면서 커미션을 받는다. 합숙 훈련 가면 장부는 만들기 나름이다. 예를 들어 숙소를 잡을 때 숙소 주인과 짜고 영수증을 꾸미면 알 수가 없다. 사실은 방 7개만 이용하고 10개 썼다고 영수증을 끊어주면 남는 돈은 그 지도자 주머니로 들어간다. 타성에 찌든 일부 체육인들한테는 원래 하던 걸 그대로 하는 게 제일 좋다.” 대한체육회의 연간 예산은 3000억원 안팎으로 대부분 정부 지원금이다. 대한축구협회 등 극소수 인기 종목 단체가 아니면 경기협회와 연맹 대다수가 대한체육회의 예산에 기대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체육 관련 학과 교수는 “엘리트 체육인들이 개혁에 맞서는 논리 중에 하나가 ‘도쿄 올림픽 메달 위기’이다”라고 꼬집었다. “더 이상 인권을 희생하면서 성적을 내면 안 된다는 것이 국민들 생각인데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19년 봄도 지난해 봄의 전철을 밟게 될까. B씨는 절박하게 말했다. “심석희 선수는 화약고에 폭탄을 지고 들어간 격이다. 그만큼 체육계에서 비리에 대한 폭로는 쉽지 않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다. 이번만은 제대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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