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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는 왜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실패했나

구미시는 용지 무상 임대 등을 내걸었음에도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실패했다. 기업의 인재들이 ‘내려가지 않으려’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대구시와 연합’만이 살길이라는데….

구미·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2019년 03월 26일 화요일 제6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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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박정희로’에 접해 있었다. ‘수출대로’ ‘새마을로’ ‘산업로’도 근처였다. ‘공단동’에는 구미국가산업1단지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9년 3선 개헌을 앞두고 고향에 조성한 한국 최초의 산업단지다. 작은 농촌이던 구미가 ‘근대화의 기수’를 자임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최근 이 도시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 지난 2월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실패하면서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한국이 세계 1위인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 프로젝트다. 10년간 민간투자 120조원을 들여 반도체 특화 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는 2019년 업무보고에서 “적기에 대규모 투자와 차세대 기술 선점을 지원하여 (후발국이) 추월 불가능한 초격차 전략을 추진한다”라는 목표를 세웠다.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2위인 SK하이닉스가 투자를 주도하고, 50여 개 협력업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입지였다.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일찌감치 유치 경쟁을 시작했다. 수도권에서는 SK하이닉스 본사가 있는 이천과 서울에서 가까운 용인이 거론됐다. 지방에서는 충북 청주와 충남 천안, 그리고 경북 구미가 출사표를 던졌다.


ⓒ독자 제공
1월17일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를 희망하는 구미 시민들이 종이학 42만 개(구미시 인구 수) 접기 운동을 하는 모습.

구미시는 SK하이닉스를 설득하기 위해 몇 가지 유인책을 내걸었다. 10년간 용지 30만평 무상 임대, 보상이 끝난 2차 조성 원형지(조성 계획이 수립되지 않아 개발자가 자유롭게 건축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토지) 70만평 제공, 직원 사택·수영장·체육시설 공급 등이었다. 물밑 협상도 꾸준히 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장세용 구미시장이 청와대와 행정안전부, 국회를 돌며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를 건의했다. 장 시장은 민주당 계열 정당이 배출한 첫 구미시장이다. 시민들도 적극 유치 운동에 나섰다. 서명 운동과 청와대 국민청원을 하고, 몇몇은 영하권 날씨에 야외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감행했다. 옆에 선 다른 이들은 ‘I♡최태원(SK그룹 회장)’ 따위 팻말을 들었다. 지난 1월30일에는 3000여 명이 모여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대구·경북 주민들도 버스를 타고 와서 동참했다. ‘SK하이닉스 얼릉 오이소! 구미로 퍼뜩 오이소!’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시민들 “또 서울에 뺏겼다” 분노


결과는 실패였다. SK하이닉스는 구미가 아니라 용인을 택했다.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 조성을 위해 설립된 특수목적회사(SPC)는 국내외 우수인재들이 선호하는 수도권, 대·중소기업 협력 생태계 조성 용이, 반도체 기업 사업장(이천, 청주, 기흥, 화성, 평택 등)과의 연계, 전력·용수·도로 등 인프라 구축 용이 등을 선정 이유로 들었다. 즉 사람이 문제였다. 반도체 산업은 숙련된 고급 인력이 많이 필요한데 이들 대부분은 수도권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최후의 변수는 남아 있다. 인구 과밀을 방지하기 위해 서울·경기 일부 지역의 공장 신설을 제한하는 제도가 있다. 공장건축 총허용량제다. SK하이닉스가 택한 용인시 원삼면도 규제 대상이다. 수도권 정비계획법 시행령에 따라 ‘성장관리권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려면 국토교통부 장관 산하 수도권정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2월22일 산자부는 수도권정비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했다. 심의 통과가 어렵다고 보는 이들은 드물다.

구미가 받아들이는 이 사건의 무게는, ‘지역경제의 수혜 기회를 놓쳤다’ 정도의 아쉬움과 궤를 달리한다. ‘또 서울에 뺏겼다’는 분노에 가깝다. 2월22일 기자간담회에서 산자부는 과거 수도권정비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개발한 사례들을 언급했다. 이 자리에서 산자부 관계자는 2003년 파주LCD지방산업단지 개발을 첫손에 꼽았는데, 공교롭게도 이곳 역시 구미와 연관이 깊다. 구미 경제의 한 축을 떠받치던 LG디스플레이가 생산라인 일부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구미 인사들은 구미국가산업단지 쇠락의 시작으로 본다. 올해 초에는 삼성전자 네트워크사업부의 경기도 수원 이전이 확정되었다.

ⓒ연합뉴스
장세용 구미시장(아래)은 청와대 등을 돌며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힘썼다.
구미 시민들은 주로 정치권에 화살을 돌린다. 여당 출신 시장과 국회의원이 제 몫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구미의 입지 조건이 용인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아이스버킷 챌린지 등 유치 운동을 주도한 최현영 경북인터넷뉴스 대표는 “구미는 부지 특성상 곧바로 공장을 착공할 수 있고, 국가산업단지에는 생산 인력도 풍부하다”라고 말했다. 연구 인력은? “삼성은 대리급도 헬기로 오더라. SK 직원들도 얼마든지 헬기로 이동할 수 있다.” 지역 정치인들의 방기나 훼방이 없고서야 구미가 SK하이닉스 유치에 실패할 리 없다는 게 최 대표 생각이다. 지난 2월25일 시청 앞 기자회견에서 최현영 대표를 비롯한 시민 10여 명은 민주당 소속 김현권 의원을 비판했다. SK하이닉스 유치에 부정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성명을 듣고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장세용 시장에 대해 최 대표는 “‘불을 꺼야 한다’는 정부의 오더를 받은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구미 시민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 지역 언론 기자는 “지난해 말부터 이미 용인으로 정해졌다고 봤다. 주변 사람들 의견도 비슷했다. 곧이곧대로 기사를 쓰기도 어려워서 고민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나 시민들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승부를 뒤집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했다. 무엇보다 정부가 기업에 강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그런 시도를 한들 기업 고위 인사가 밀어붙이기도 힘들다. “반도체 산업은 박사 이상의 고급 인력이 많이 필요한데, 듣기로는 이들 가운데 ‘구미에 가느니 사표 내겠다’고 한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한다.”

구미 시민들에게 구미의 취약점을 묻자 어김없이 나온 단어는 ‘정주 여건’이었다. 사람들이 구미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교통이 문제다. 서울에서 구미까지는 버스로 왕복 6시간이다. KTX가 서는 김천구미역도 구미 시내에서 차로 30분에서 1시간가량 걸린다. 자녀 교육도 걸림돌이 된다. 지역 언론 기자는 “구미는 고교 비평준화 지역인데도 명문고가 없다. 보통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부모들은 대구나 경북 타 지역에 있는 자율형사립고를 알아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근래 구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국장은 문화·예술을 꼽았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이들이 방학 때 구미에 오면 ‘할 일이 없다’고 한다. 인구(42만명)에 비해 문화 공연이 너무 부족하다.” 열악한 정주 여건이 핵심이라면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만 지방 이전을 꺼리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지방 이전이라는 선택지를 없애도 이상하지 않다.

한때 전국에서 노동자가 몰려들었던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선 대기업이 서서히 빠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구미시 제조업은 삼성과 LG 등 대기업 의존도가 매우 높다. 일감이 충분할 때야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대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세우고 국내 물량을 줄이자 자생할 만한 기술이 없는 기업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대기업이 연이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자 구미는 정주 여건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박정구 구미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은 구미가 별다른 충격 없이 발전한 까닭에 체질 개선의 호기를 놓쳤다고 말했다. “사실 IMF(1997년 외환위기) 때도 구미에는 ‘표정 관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수출 중심 기업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이때 벌어들인 돈으로 공장만 더 지을 게 아니라 학교나 교통 등 장기적 정주 여건을 개선하는 데에 누군가는 나섰어야 했다.”

땅이나 건물은 그때그때 기초자치단체가 판단해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교통·교육·문화는 더 큰 단위의 계획과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 구미시는 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시에서 제시한 조건이나 시민들의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낡고 무모해 보이지만, 이들이 특별히 어리석거나 산업의 실정을 몰라서 이 방식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지자체들처럼 언감생심으로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이미 대기업 주도 산업단지로 성장한 경험이 있는 구미는 불나방처럼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매달렸다.

ⓒ구미 뉴스 제공
2000년대 들어 대기업들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면서 구미시에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위는 구미공단의 한 공장.


지역 정치인들 ‘광역권 동참’에 미온적

조근래 구미 경실련 사무국장은 “죽었다 깨어나도 구미 단독으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연합전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논거를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각 지자체가 경쟁하는 모양새에서 최우선 기준은 ‘어디가 사업에 가장 적합한가’가 될 수밖에 없다. 반도체 클러스터뿐 아니라 대부분 사업은 수도권 가까이에서 하는 게 경제성이 좋다. 지방에 기회가 돌아가려면 ‘수도권인가, 지방인가’라는 일대일 구도가 짜여야 한다. 판이 이렇게 짜이면 형평성이라는 잣대가 각광받기 유리하다. 둘째, 정주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필수적인 선택이다. 군소 도시가 자력으로 교통·교육·문화 환경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인근 도시들, 특히 광역시와 상시적으로 협조해야 실력을 갖출 수 있다. 조근래 사무국장은 구미의 파트너로 대구를 지목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도 비슷하게 분석했다. “광역 단위로 접근해야 한다. 구미를 비롯한 경북 도시들은 대구와 묶어서 보는 게 맞다. 먼저 ‘서울의 대항마’인 지방 대도시가 하나 필요하다고 본다. 서울은 경제 기능이 집중된 ‘국제 금융도시’로 두고, 지방 대도시에는 청와대까지 내려간다면 국토 활용의 지형이 달라진다.”

이 계획에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지역 정치인들에게 부담이 된다. 재선을 노리는 지역 정치인들의 최우선 목표는 대개 임기 내에 달성되는 확실한 치적이다. 대기업 유치는 이 기준에 부합한다. 하지만 타 지자체와의 협의는 희생을 요한다. 기업 유치 양보든, 혐오시설 용인이든 표는 빠진다. 구미 지역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구와 구미 간에 경전철을 놓아서 교통이 편리해지면 구미 시민들이 모두 좋아할까? 아니다. 왜 구미 사람들이 대구에서 돈 쓰게 하냐고 욕하는 상인들이 있다.” ‘광역권 동참’이라는 미래를 대가로 눈앞의 이익을 양보하자는 지역 정치인이 쉽사리 배출될 수 있을까? 여기에 비하면 한겨울 아이스버킷 챌린지 정도는 어렵지 않은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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