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 바르니에 감독의 영화 〈인도차이나〉만큼 베트남 역사를 입체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1930년대, 부모를 잃고 프랑스인 농장주를 어머니로 여기며 자라난 베트남의 황녀가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감독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프랑스 사람들의 식민지배에 대한 성찰과 부채의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처연하고 감동적인 스토리에 하롱베이 (할롱만)의 아름다운 풍광이 더해져 인도차이나의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미군 철수로 서구의 태평양 연안 500년 지배 막 내려

1954년 4월26일, 제네바에 미국과 소련, 프랑스, 영국, 중국의 대표들이 모여 앉았다. 디엔비엔푸에 고립되어 이미 베트남에서 패색이 짙어가던 프랑스의 현지 철수를 공식화하고 그 뒤를 잇는 지배체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석 달에 걸친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열강들은 북위 17°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누는 데 합의한다.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북베트남에는 독립전쟁의 영웅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독립연맹(베트민)이, 사이공(현재의 호찌민)을 중심으로 하는 남베트남에는 응우옌 왕조의 후계자 바오다이를 내세운 베트남국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의 뒷배에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더 이상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미국이 버티고 있었다.

ⓒAP Photo섬 1000여 개가 점점이 떠 있는 베트남 하롱베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외세를 자국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싸워온 베트민 처지에서는 이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남베트남에서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세력들이 정권을 주고받으며 국민의 지지를 계속 잃어갔다. 결국 1964년부터, 우리가 흔히 ‘베트남전’이라 알고 있는 남북 베트남 간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은 점점 더 이 수렁에 빠져 들어갔다. 전쟁이 정점에 달했던 1968년에는 미군이 베트남에 파병한 지상군이 50만명을 넘었다. 이 전쟁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미국인이 900만명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텔레비전으로 연일 생생히 보도되는 현지의 참상은 미국 국내 여론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마침내 미국은 베트남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한다. 병력 철수는 빠르게 진행되어, 1975년에 접어들었을 때 베트남에 남아 있던 미군은 50명 내외에 불과했다. 이들도 4월30일, 헬리콥터로 베트남을 떠난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에 도착한 이래 시작된 서구 세력의 태평양 연안 지배가 막을 내리던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영화 〈인도차이나〉에서, 시련을 겪으며 황녀에서 공산당원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거듭난 주인공 카미유는 베트남 협상단의 일원으로 1954년 제네바를 방문한다. 그곳에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프랑스인 농장주가, 자신이 맡긴 아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모두가 반갑게 해후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날 법도 하지만, 식민지로서의 인도차이나가 사라졌듯 그들의 인연도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저마다의 길을 선택하고, 레만 호수의 도도한 물결을 배경으로 영화는 끝난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식민지 사람들의 아픔. 하노이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이 하나의 마침표를 찍으리라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그 좌초의 무대가, 수백 년에 걸친 길고 지난한 싸움 끝에 외세를 몰아내고 분단을 끝낸 나라였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역사의 큰 줄기에 하나의 마디를 내는 순간은 결코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더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순간은 태평양의 도도한 물길처럼 무심하게 다가올 것이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