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4월26일, 제네바에 미국과 소련, 프랑스, 영국, 중국의 대표들이 모여 앉았다. 디엔비엔푸에 고립되어 이미 베트남에서 패색이 짙어가던 프랑스의 현지 철수를 공식화하고 그 뒤를 잇는 지배체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석 달에 걸친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열강들은 북위 17°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누는 데 합의한다.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북베트남에는 독립전쟁의 영웅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독립연맹(베트민)이, 사이공(현재의 호찌민)을 중심으로 하는 남베트남에는 응우옌 왕조의 후계자 바오다이를 내세운 베트남국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의 뒷배에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더 이상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미국이 버티고 있었다.
영화 〈인도차이나〉에서, 시련을 겪으며 황녀에서 공산당원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거듭난 주인공 카미유는 베트남 협상단의 일원으로 1954년 제네바를 방문한다. 그곳에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프랑스인 농장주가, 자신이 맡긴 아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모두가 반갑게 해후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날 법도 하지만, 식민지로서의 인도차이나가 사라졌듯 그들의 인연도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저마다의 길을 선택하고, 레만 호수의 도도한 물결을 배경으로 영화는 끝난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식민지 사람들의 아픔. 하노이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이 하나의 마침표를 찍으리라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그 좌초의 무대가, 수백 년에 걸친 길고 지난한 싸움 끝에 외세를 몰아내고 분단을 끝낸 나라였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역사의 큰 줄기에 하나의 마디를 내는 순간은 결코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더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순간은 태평양의 도도한 물길처럼 무심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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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과 마오리족의 피가 묻지 않은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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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가 12t에 달하는 거대한 카누가 물살을 헤치고 나아간다. ‘응아토키마타파오루아’라는 이름만큼이나 기다란 이 카누를 움직이는 것은 55명의 건장한 마오리족 전사들이다. 1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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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닌 일본, 류큐 왕국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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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오키나와 나하(那覇) 중심부에 있는 슈리(首里)성에는 200여 년 전, 성에서 열렸던 행사를 재현해놓은 미니어처가 있다. 전통적인 일본 군주 복장이라기보다는, 어딘지 한국이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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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두 번 즐기려면 사모아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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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1872년 10월2일 저녁 8시45분 영국 런던을 출발해 인도-일본-미국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80일이 되는 12월21일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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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에 울려 퍼진 ‘화이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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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1975년 4월29일 10시, 사이공(현재의 베트남 호찌민 시)의 ‘아메리칸 라디오 서비스’ 채널에서 다음과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이공의 온도는 현재 화씨 105°(섭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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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똥 전쟁’ 패배자, 볼리비아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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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볼리비아에 취재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광업도시로 유명한 포토시(Potosi)의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한 떼의 어린아이들과 마주쳤다. 선생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이 분명한 아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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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 정신’ 지켜낸 파타고니아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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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2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신문에 ‘파도를 타는 남자, 이목을 집중시키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베니스 비치의 파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는 물 위를 걷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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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하게 무모했던 최초의 태평양 횡단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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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최초로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것은 1521년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 때였다. 비행기로 태평양을 건넌 것은 그로부터 410년이 더 흐른 뒤였다. 1929년, 1차 세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