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학부모 처지에서는 어떤 교사를 만날까 궁금하지만 아이들은 머리가 굵어갈수록 ‘선생님은 어차피 선생님.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올해 중학교에 진학한 내 아이를 봐도 그렇다. 첫날 학교에 다녀온 뒤 같은 반에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부터 줄줄 읊는다. ‘아는 아이’ 위주다. 희비가 갈린다.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면 세상 다 얻은 것처럼 든든하고, 옆 반이나 하다못해 같은 층이라는 사실이라도 꼽으며 안심(하고자) 한다. 앞으로 몇 년간 내 아이를 키우는 8할은 친구일 것이다.

혐오 문화가 원초적으로 작동하는 패거리 문화

친구 관계는 어떤 선생님께 어떤 가르침을 받느냐에 좌우되기도 한다. 질풍노도의 중학생에게 그게 제대로 보일 리 없지만, 그래도 먹힌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 아이의 새 담임선생님이 보낸 편지에, 학급 운영 시 ‘따돌리지 않기, 무시하지 않기’가 강조되어 있어 마음이 놓였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 패거리 문화가 도드라진다. 죽이 맞는 친구를 하나도 아니고 여럿 둔다는 건 좋은 일이다. 문제는 더 재미있게 노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배제하는 양상으로 번질 때다. 그것도 사사건건 말이다. 가령, 한 반에 여자아이 11명이 있다. 모둠별 노래 발표를 한다고 하자. 교사는 뜻 맞는 친구끼리 세 팀 정도로 짜라고 제안했다. 3:4:4로 나뉘는 게 누가 봐도 이상적이지만 아이들의 관계도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6:3:2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6:4:1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기 싸움이 벌어진다. “선생님이 친한 친구들끼리 팀을 짜라고 하지 않았냐”라는 게 웃자란 아이들의 항변이다. 교사는 뒤늦게 아차, 할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 교사의 지혜와 경험과 성의에 따라 일의 매듭은 전혀 다르게 풀린다. 교사마저 요령 없이 패거리에 휘둘리면 최악이다.


ⓒ박해성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문화가 어쩌면 가장 원초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이들 세계의 패거리 문화이기도 할 것이다. 저마다 이유는 있다. 어떤 결핍 때문에, 유난히 외로움을 타는 성정인지라, 대장 노릇 하려고, 이겨야 해서, 학습 스트레스가 심해서, 누군가를 따라 하다가, 그저 착해서, 휘둘려서…. 상처 입는 양상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때로는 교실이 정글이자 전쟁터로 둔갑하기도 한다. 여기서 가장 든든한 우군이자 무기는, 친구다. 단 한 명만 있어도 된다.

구한다고 구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좋은 친구는 타고난 복이랄까 인연인 것도 같다. 내 아이도 몇 차례 눈물 바람을 했다. “단짝이랍시고 카드 써주고 선물 주면서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엉엉, 지 필요할 때만 살랑거리고, 흑흑, 정작 놀 때는 나한테 양해도 없이 ○○랑 놀고, 컥컥.” 아이고 걔가 뭘 잘못 먹었나 보다, 정도로 장단만 맞춰줘야 한다. 바로 다음 날 해맑은 표정으로 문제의 그 아이와 다시 헤헤거리고 있는 꼴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이라도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 ‘관계의 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 아이도 어느새 다른 친구와 붙어다니며 놀고 있다. 결국 시간이 약이다. 맹렬히 크는 중일수록 몸도 마음도, 관계에 대한 태도에도 발육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혹시 지금 마음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친구가 없는 아이라면, 이렇게 일러주자. 그 ‘한 명’이 어디선가 열심히 자라고 있다고. 어쩌면 널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아이보다 먼저 걱정하거나 조바심 내지는 말자. 스스로 제 성장의 속도에 맞게 경험하고 구별하고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 ‘그 아이’가 내 아이의 창문 밖에서 신호를 보낼 때, 기쁘게 달려 나가려면 말이다.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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