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라디오〉 존 치버 지음, 황보석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무슨 횡재한 기분이라고 할까. 레이먼드 카버와 나란히 거론되곤 하는 현대 미국 단편소설의 거장 존 치버(1912∼1982)의 단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레이먼드 카버와는 달리 장편도 여러 권 썼고 그 중 〈팔코너(Falconer)〉(1977) 같은 책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뉴스위크〉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으니 그를 단편 작가라고 부르는 건 부당한 일이겠지만, ‘교외(郊外)의 체호프’라는 별칭 그대로 그의 매력은 단편에서 또렷하다.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책도 그가 말년에 엮은 단편 선집 〈The Stories of John Chee ver〉(1978)였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은 이 책을 완역하고 네 권으로 분권한 것이다.

단편 선집으로 퓰리처상 받아

자신이 존 치버와 궁합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우선 국역본 선집 제1권 〈기괴한 라디오〉의 첫 작품 ‘참담한 이별(원제: 굿바이, 나의 형제여)’을 읽어보면 된다. 초기작이지만 대표작 중 하나이니까. 떨어져 살던 형제들이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기 위해 어느 바닷가 절벽 위의 집에 모인다. 그 중 막내인 로런스는 모든 게 못마땅하다. 그는 이를테면 ‘아, 행복해’라고 말하기보다는 ‘왜 사람들은 행복한 척하는 것일까’를 묻는 시니컬한 인물이다. 로런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가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마침내 파국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메시지 따위에는 시큰둥해 보이던 작가가 날린 결정적인 한 방.  

“아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눈길이 사람들 속에서 여드름 난 뺨과 허약한 팔을 찾지 않도록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에게 인류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 삶의 거친 외면적 아름다움에 반응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손가락이 엄연한 진실, 그 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포가 힘을 잃는 진실을 가리키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끔 한국의 소설가들이 단편을 너무 ‘열심히’ 쓴다는 생각을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뛰어난 단편은 어쩐지 아주 경쾌하게 ‘대충’ 쓴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네 단편소설이 더 사소하고 더 건조하고 더 사악해졌으면 좋겠다. 좀 거창하고 좀 눅눅하고 좀 착하다는 얘기다. 모름지기 단편이라면, 크고 둔한 톱으로 슬근슬근 톱질할 것이 아니라 잘 갈아진 작은 칼로 날카롭게 한 번 긋고 가야 한다. 치버를 읽으면서 한 생각들이다.

이미 레이먼드 카버 전집을 다 읽어버려 속이 허한 분에게 월동(越冬) 식량으로 권한다.

기자명 신형철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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