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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은 삶, 살기 위해 춤춰야 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심인성 피부염이 생겼다. 그래도 1주일에 한 번 기를 쓰고 댄스스포츠를 했고, 새롭게 벨리댄스를 시작했다.

이영미 (대중문화 평론가)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3월 15일 금요일 제5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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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이 세상을 떠났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9개월 만이다. 40년 동안 인슐린을 투여하는 당뇨병 환자였으니 나보다 먼저 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간병에 장례, 한 사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최소한의 정리를 하면서, 내 몸은 완전히 방전 상태가 되었다. 무엇보다 머릿속에서 그와의 마지막 날이 자꾸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단전호흡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했던 국선도를 떠올려보긴 했지만 고요하게 호흡만 하는 방식이라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 것 같았다. 단전호흡과 강력한 허리 운동을 함께하는 혈기도 도장을 찾아갔다. 오래간만에 하는 스트레칭과 허리 운동이 힘에 부쳤지만 희한하게도 2시간을 하고 나니 머릿속에서 바글거리던 것이 조금 가라앉는 듯 느껴졌다. 혼자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려면, 오로지 운동하는 것밖에 길이 없었다.
ⓒ이우일 그림

혈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또 심한 몸살로 앓아누웠다. 익숙한 현상이다. 용을 쓰면서 버티는 운동에는 늘 이런 식으로 몸이 반응했으니까. 견디기 힘드니 그만두라는 신호였다. 이미 몸에는 피부염이 창궐하고 있었다. 얼굴 한구석이 가렵더니만 뺨과 턱, 목 전체로 빨갛게 번졌다. 처음 본 사람은 화상 환자라고 생각할 만큼 정도가 심했다. 병원에서는 그냥 습진이란다. 항히스타민제와 소염제, 소화제 등을 처방받았을 뿐이다. 원인을 모른다는 뜻이다. 이 피부염은 두 달간 지속되다가 겨우 가라앉았는데, 가족이 모이는 명절, 남편 생일, 기일 등 온갖 기념일·추념일이면 여지없이 올라와서 몇 주 동안 고생을 시켰다. 남편 지인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도,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뉴스와 함께 장례식장 장면이 나와도 재발했다. 심인성(心因性)이 확실했다. 의식의 영역에서는 괜찮다고 다독여놓았지만 무의식과 몸은 아직 괜찮지 않다고 자꾸 신호를 보내는 거였다. 물론 점점 정도가 약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마 이 글을 쓰고 나서도 솟아오를지 모른다.

가려움증이 한두 시간이나마 완화되는 것은, 딱 두 가지 경우였다. 집에서 체조와 단전호흡을 하고 나서, 그리고 주 1회 댄스스포츠를 하고 나서였다. 마치 약을 바른 것처럼 한두 시간 동안 가려움증이 조금 완화되었다. 체조와 단전호흡은 남편이 가고 난 이후부터 시작했다. 그전에는 24시간 간병인 신세라 체조는커녕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계속 부축이 필요했고 어디서 넘어질지 무엇을 떨어뜨려 다칠지 매 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오다 살짝 엉덩방아를 찧어 허리뼈가 골절되어, 재활운동을 몇 달 동안 쉰 적도 있었다. 강의 등 불가피하게 외출할 때에는, 누군가를 데려다 놓고서야 나갈 수 있었다. 운동은 언감생신이었다. 탭댄스는 중단했다.

간병 중 매주 1시간의 댄스스포츠가 유일한 숨구멍

그러면서도 매주 1시간 댄스스포츠는 기를 쓰고 유지하려 했다. 그게 유일한 운동이었으니까. 어느 날 서울 은평구에 사는 남편 친구가 문병을 오겠다고 해서 “저, 죄송한데 제가 외출하는 시간에 와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매주 일요일, 딱 한 시간만 운동도 하고 시장도 보고 오려고요”라고 염치 불고하고 부탁했다. 그는 정말 고맙게도 매주 바쁜 시간을 내어 와주었고, 그 덕분에 댄스스포츠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 9개월 동안 그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이제 운동이 더 필요했다. 몸이 그걸 요구하는 게 분명했다. 몸살을 앓고 나니 혈기도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춤 연습을 계속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즈음 나는 왈츠의 프리댄스를 훈련하고 있었다. 프리댄스는 남자가 보내는 사인을 눈치껏 받아 호응하는 게 핵심이다. 집에서 혼자 연습하면 오히려 프리댄스의 순발력을 깎아먹는다. 그렇다고 이미 다 배운 라틴댄스의 기본 춤만 지루하게 반복 연습할 수는 없었다. 지루한 건 못 참을 뿐 아니라, 혼자 하는 연습으로는 머릿속에서 바글거리는 것들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집에서 매일 혼자 체조와 스트레칭을 하고 있기는 하다. 매일 하는 효과는 강력해서, 6개월쯤 지나니 다리를 벌리고 가슴을 바닥에 대는 것이 가능해졌다. 입시 체력장으로 다져진 열아홉 살 때도 될까 말까 했던 자세였는데, 혈기도에서 스트레칭과 호흡을 결합하는 방법으로 매일 반복하니 이 나이에도 그게 되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새로운 운동이 필요했다.

탭댄스를 다시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지하철을 갈아타며 40분쯤 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혈기도 정도의 운동을 소화하기도 힘든데 한 시간을 뛰는 탭댄스는 무리일 것 같았다. 자신이 없다. 조금 더 부드러운 춤이 없을까?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벨리댄스 학원이 생각났다. 전철역 입구에 있어서 매일 오가며 그 간판을 보았지만 벨리댄스를 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건 뭘까 하는 호기심 정도였다고나 할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벨리댄스가, 살찐 사람들이 뱃살을 빼기 위해 추는 춤이라고만 치부하고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으니 허리가 굵어지기는 했지만 일부러 운동을 해가면서 몸매 관리를 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학원 이름과 함께 붙어 있던 ‘이집트 국립무용협회’라는 다소 어색한 명칭이었다. 사실 이걸 보고서야 “벨리댄스가 이집트 춤이야?”라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최소한의 지식이나 관심도 없었던 거다. ‘국립’은 뭘까 싶었다. 한국에 이집트의 ‘국립’ 단체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나중에 이곳에서 벨리댄스를 배우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원장인 이주연 선생님은 대학에서 한국 무용을 전공한 후 벨리댄스로 전향했고, 이집트에 가서 마흐무드 레다(1930~)에게 벨리댄스를 비롯한 이집트 민속무용을 배우고 돌아온 분이다. 마흐무드 레다는 이집트의 국립무용단 ‘레다그룹’을 만들고 문화부 차관까지 지낸 분으로, 이주연 선생님은 그가 가르친 최초의 한국인 전수자이다. 이 벨리댄스 학원이 이집트의 국립무용단을 만들고 이끈 레다의 춤을 계승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고자 이런 어색한 명칭을 붙였다는 게 이해됐다.

이러나저러나 당시 내 처지는 이런 걸 가리고 따질 수준이 아니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춤을 배울 곳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시작해야 했다. 벨리댄스 학원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주 2회란다. 더 좋다. 남편이 내 일을 모두 끊어놓고 갔으니 시간은 많다. 몸과 마음의 힘이 완전히 바닥이어서 당장 일을 더 늘릴 수도 없다. 남편이 쓰러지기 몇 달 전에, 나는 책 두 권을 출간했고 그것으로 최근 10년 동안의 작업을 얼추 정리한 셈이 됐다. 이래저래, 여태까지의 내 몸과 마음과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반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힘들지 않은 운동으로 시간을 채우는 게 유일한 출구였다. 댄스스포츠와 벨리댄스까지 주 3회를 춤 배우기 시간으로 박아놓으면, 그 진도를 따라 집에서도 계속 몸을 움직이며 복습하게 될 터이다. 그렇게 하자.

생각지도 않았던 벨리댄스는 이렇게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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